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52화 (52/130)

52. 이 말을 해 보고 싶었지.

***

갑자기 나타난 네 명이 누군지는 잘 알고 있다.

천마신교 6대 천마 진천군이던 시절, 제자 설운혜를 위해 마련해 둔 칼과 방패들.

통칭 사마군.

꽤나 쓸 만한 녀석들이었다.

무재도 좋았고 제자를 향한 충성심과 사랑도 지극했다.

하지만······.

‘나한테 충성을 바친 건 아니지.’

제자에 관련된 일을 제외한다면 전생에서도, 그리고 현생에서도 이수민은 눈치가 느린 편은 아니었다.

사마군이 자신에게 그다지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다.

그런 면까지 포함해서 이수민은 사마군에게 합격점을 줬던 것이다.

그들이 목숨을 바쳐야 할 대상은 신교도 이수민 자신도 아닌, 오로지 설운혜 단 한 명이었으니까.

겉으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수민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이어나가고, 결론을 조립했다.

‘이놈들 지현이를 찾아온 거야.’

어떻게 찾아올 수 있었는가.

그것은 아직 모른다.

왜 찾아왔는가.

자기들 딴에는 못다한 충성을 바치려고 찾아왔다고 말하겠지만······.

‘지현이한테 그런 거 필요없다고!’

이수민의 예리한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사마군이 제자를 만나면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평지풍파를 일으킬 것이 틀림없다.

이수민에게 있어서는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걸 막을 가장 간단한 방법은······.

‘두들겨 패는 게 최고지.’

실제로 전생에서는 상당히 유효했던 방법이다.

하지만 당장은 사용하기 곤란한 수이기도 했다.

‘나 지금 약하잖아······.’

제자에게 격체전력으로 넘겨준 내공은 정말로 막대한 양이어서, 아직 원래 수준의 삼 할도 회복하지 못했다.

자연지기를 운용하는 천마신공이라 해도 이수민 정도의 고수라면 본신의 내공 역시도 일정량 이상은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데, 현재는 그에 턱없이 못 미쳤다.

결론적으로 지금 이수민은 도저히 입신경의 고수라고 보기는 어려운 상태.

최소한 일 년은 더 있어야 예전에 근접한 수준으로나마 회복이 될 것이다..

‘제압하는 건 무리야.’

모르긴 몰라도 기세로 파악할 때 사마군은 적잖이 강해진 걸로 보였다.

특히나 혁련휘는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은 지금은 맞상대를 피해야 할 걸로 보였다. 거기에 나머지 세 명이 가세한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

다구리에 장사 없는 법이니까.

‘그러면 어떻게 한다······.’

유지현의 행방을 알려주기는 싫다. 조금 더 지켜볼 일이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설운혜가 아님을 밝히고, 힘으로 사마군을 제압해 억제하는 것도 어렵다.

하극상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터.

결국 이수민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방어가 불가능한 궁극의 기술.

“누구······세요?”

이른바 기억상실증.

‘기억 안 난다고 하면 지들이 어쩔 거야. 어쩔 거냐구!’

과연 효과는 굉장했다.

혼잣말로 궁시렁거리길 즐겨해서 이수민에게 가장 많이 얻어맞았던 진태호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운혜야, 모르겠어? 오라비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고 따랐던 오라비!”

‘이 미친놈이 어디서 약을 파는 거야!’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느끼며 이수민이 대답했다.

“저 중국말 모르는데······.”

당연히 알아듣지만 못 알아들은 척 이수민은 한국말로만 이야기했다.

설운혜를 다시 만났다는 기쁨에 통역마법도 해제하고 있던 천유화가 다시 마법을 운용했다.

그리고 혁련휘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이수민은 생각했다. 이놈 머리통이 결국엔 삶은 달걀처럼 돼버렸군, 이라고.

‘흠, 이미 예정된 일이긴 했지.’

혁련휘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기억을 하지 못하신다면 믿기 힘드시겠지만 당신은 저희 네 사람의 하나뿐인 주군이었습니다. 주군께서 운용하시는 천마신공이 그 증거입니다.”

“천마신공이요? 혹시 이걸 말하시는 건가요?”

이수민이 한 손에 내공을 집중했다.

주변의 자연지기가 손을 중심으로 미세하게 운동하고 있는 것을 사마군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거! 운혜가 틀림없다니까?”

“가만히 있거라. 당신께 여쭙겠습니다. 그 힘을 어찌 알고 계신지요.”

이수민은 고심하는 척 떠듬떠듬 답했다.

“그냥······, 언젠가부터 내가 이런 방식으로 힘을 다룰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나는 운혜라는 사람이 아니라 이수민이에요.”

“이수민, 이수민······.”

헌터 이수민에 대한 정보는 검색만 해도 얼마든지 나온다.

이수민이라는 여자가 대한민국에서 출생해 26년간 살아온 순수 토종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사마군이 인지하는 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혁련휘가 결론을 내리듯이 중얼거렸다.

“환생······인가.”

‘그래, 잘 아네.’

환생이 맞긴 했다.

천유화가 반론을 제기했다.

“환생? 그런 거 없는-”

“유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여기에 엄연히 존재하시지 않나.”

혁련휘가 척, 하고 손으로 이수민을 가리켰다.

“성화의 폭발에 휩쓸려 환생하신 것이겠지. 연결이 끊긴 건 그 때문일 테고. 무의식으로나마 천마신공을 기억하신 것이 천운이었군.”

놀랍게도 진실에 상당히 근접한 추측이었다.

설운혜가 아닌 이수민이라는 결정적인 오류가 있었지만.

혁련휘가 말했다.

“혹여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 네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부디······.”

혁련휘가 고개를 숙였다.

반질반질한 머리가 이수민의 정면을 향했다.

주먹을 꼭 쥐어서 웃음기를 억누르고 이수민이 답했다.

“네, 괜찮아요. 저도 이 힘이 어디서 온 건지 항상 궁금했으니까요.”

이제 당근을 하나 던져줄 차례였다.

“가끔씩 꿈을 꿔요······. 하늘까지 뻗은 산이 있고, 사람들이 많았어요. 나는 가장 높은 의자에 앉아서 그 사람들을 지켜봤어요. 나는 그 사람들이 좋았어요······.”

“오, 오오!”

“기억이 완전히 없는 건 아닌 것 같아!”

“그건 당신의 전생. 만인을 보살피던 신교의 천마로서의 기억일 것입니다. 저희가, 저희 사마군이 주군께서 기억을 온전히 되살리실 수 있도록 보필하겠습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사마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수민은 불현듯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재수없는 얼굴로 이죽거리던 누군가가 생각났다.

‘하무린, 너도 이런 기분이었나?’

뭐랄까.

재밌다고 해야 하나.

흥미진진하다고 해야 하나.

타인을 속인다는 것의 짜릿함을 알아버린 것만 같았다.

혁련휘가 말했다.

“가시죠. 주군께 천천히 하나씩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섯 사람이 함께 자리를 이동하려던 차에, 갑자기 진태호가 나섰다.

“형님 잠깐만요.”

이수민을 제외한 나머지 셋이 진태호를 째려봤다.

평소와 달리 위축되는 기색도 없이 진태호는 야비한 웃음을 실실 흘렸다.

“모두 주목. 다들 잘 들어보십쇼.”

“뭐예요, 이상한 거 말할 거면 그냥 가만히 있어요.”

진태호가 사마군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연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지금 운혜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억이 없다니까요?”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진태호가 양손을 활짝 펼쳤다.

“운혜는 지금 모릅니다. 신교도, 우리도, 그리고······. 진천군도.”

불길한 예감이 이수민에게 경고했다.

지금 당장 저 입을 막으라고.

하지만 진태호가 더 빨랐다.

“예전부터 운혜 앞에서 이 말을 해보고 싶었지.”

하늘을 올려다본 진태호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진천군 이 개애- 새끼이이-!”

새끼, 새끼, 새끼이이이.

내공까지 끌어다 외친 듯이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하지만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이 아동학대범!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는 천하의 변태 같은 놈! 수틀리면 주먹부터 나가는 깡패 새끼! 정파에 하무린이 있었다면 신교에는 진천군이 있다아아아-!”

잠시 말을 멈춘 진태호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그리고 배를 잡고 웃었다.

“아니, 생각해 보라고요. 지가 지 이름을 천군이래요. 하늘의, 크흑, 왕이래요. 크흐흑.”

조소를 가득 담은 말이 이어졌다.

통역마법을 한 번 거친 덕분에, 현대의 문물을 이미 풍부하게 받아들인 이수민에게 진태호의 말은 이렇게 들렸다.

“하늘의 왕? 그래서 지 이름대로 하늘 가버렸쥬? 개꿀이쥬? 꺼어어억.”

“야, 너무 심한 거- 아, 아냐······.”

말리려던 곡비령은 천유화의 차가운 시선 앞에 손을 거둬야만 했다.

천유화가 말했다.

“그럼 기념으로 그거 한 번만 하고 가요. 운혜야, 잠깐만 기다려줘?”

사마군 네 사람이 각기 한 손을 하늘로 들어 교차시켰다.

“그러면 제가 선창할게요. 진천군!”

“-개새끼!”

힘찬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그 광경을 속절없이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던 이수민은,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시이바아아알, 이 개 좆같은 새끼드으을······!’

***

맥주 한 잔 하면서 휴대전화를 보다가 문득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얘 프사 내렸네?”

“누구 말입니까?”

우철이가 묻는 말에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줬다.

“천군이.”

“어? 그러네요?”

지현이랑 나란히 찍은 셀카를 프사로 해두고 상태메시지는 시뻘건 하트였는데.

지금 보니 프로필 사진은 내려버리고 상태메시지도 다른 걸로 바뀌어 있었다.

<혼란스럽다>

도대체 뭐가 혼란스럽다는 거지?

왜곡된 성욕을 드디어 깨달았다는 건가?

최근에는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사부님. 이게 심상치가 않습니다. 서준이 기억나시죠? 걔도 좀 이상하다고 했다니까요?”

첫 마법 수업을 마친 후기 겸해서 말할 게 있다고 우철이가 불러서 왔더니 한다는 소리가 이거였다.

대머리와 여자가 수상하다, 라고.

귀를 후비적대며 답했다.

“뭐가 수상한데, 뭐가.”

“어디서 한 번은 본 것 같은데 그게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너랑 이서준이가 그렇게 생각했으면 전생이란 거 아냐.”

“그렇죠?”

“거기 서역 애들도 있었냐?”

전생에 뜬소문처럼 그런 말이 돌긴 했다.

만리 길에 다시 만리를 더해 도착한 서역.

그곳에는 머리색 노랗고 눈동자가 시퍼런 놈들이 살고, 그중에는 무공과는 다른 신비한 힘을 사역하는 자들도 있다고.

딱히 가서 확인해 본 놈들도 없고, 그래봐야 법술이나 주술 비슷한 거였겠지만.

아무튼 굳이 마법사라고 한다면 서역 코쟁이들밖에 없을 텐데.

우철이가 고개를 저었다.

“순수 동양인 구성이었습니다.”

“근데 뭘 그래. 마교 쪽에도 내가 알기로 마법이니 뭐니 하는 건 없었어. 그리고······.”

내가 결정적인 증거를 입에 담았다.

“그 정도 대머리면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지. 나는 처음 보고 무슨 소림사 사대금강 보는 줄 알았잖아.”

잠시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우철이는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부님 말씀이 다 맞기는 한데 그래도 뭔가, 뭔가 이상합니다······.”

“왜? 김유진 씨 하는 일에 차질 생길까봐 불안한 마음이 안 가시냐?”

“아니, 꼭 그래서 이러는 건 아니고요, 그렇다고 그게 아니라는 것도 아니고, 예······. 걱정됩니다······.”

우철이가 마침내 실토했다.

기시감이니 뭐니 하는 건 별로 큰 일은 아니고, 그냥 김유진 걱정이 태산 같은 거구만.

흐뭇한 마음이 들어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잔을 탁, 내려놓으며 내가 말했다.

“좋아. 솔직히 말했으니 이 사부가 한 번 봐준다. 며칠 기다려봐라.”

“정말입니까, 사부님?”

“그래. 열흘만 기다려.”

11월 초중순에는 우리 집의 중대한 행사가 연속으로 이어진다.

나랑 수희가 처음 정식으로 사귄 날.

애 엄마 생일.

그리고 지현이 생일까지.

그 사이에 머리 복잡하거나 혹시라도 피 볼 일은 만들기 싫었다.

대머리랑 싸가지 없는 여자도 일단은 온건해 보였으니까.

“제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나중에 김유진 씨랑 같이 정식으로 자리 한 번 만들어. 그거면 돼.”

“감사합니다!”

“자, 한 잔 받아라.”

우철이에게 맥주를 따라주며 생각했다.

내 예감이라는 게 틀리지가 않는다고.

대머리 그놈. 내 다시 볼 일이 생길 줄 알았지.

잔을 부딪치고 우철이를 향해 말했다.

“이제 내 얘기도 좀 들어봐라. 요즘 내가 속이 탄다, 속이 타.”

“왜 그러십니까?”

“지현이 이게 집에 맨날 늦게 들어와서 말야······.”

***

그리고 아버지의 걱정을 한 몸에 사고 있는 자칭 서울시의 수호자.

중2병 선행학습 중인 14세 유지현 양은 오늘도 서울 상공을 활보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를 주시하는 중이다.

의문으로 남은 카페 화재 이후 좀 더 활동반경을 넓혀서 수색을 하던 와중에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유지현보다 낮은 곳에서 허공을 유영하던 누군가.

상대는 아직 유지현을 발견하지 못했다.

서로간의 거리는 일 킬로미터 안쪽.

유지현은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고도를 더욱 높이 올렸다.

마치 장난치는 것처럼 허공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집던 상대는 다 놀았다는 듯이 유유히 도심 외곽의 산속으로 방향을 돌렸다.

속도를 맞춘 유지현이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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