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51화 (51/130)

51. Prologue······?

***

정예슬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두꺼운 종이뭉치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걸 다 외우라고?’

로브를 푹 뒤집어써서 얼굴이 거의 다 가려진, 몸집이 가녀린 여자가 얼음장처럼 싸늘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게 최소 분량이에요. 못 외우겠으면 당장 나가도 좋아요.”

그리고는 혼잣말인지 들으라는 건지 애매한 느낌으로 덧붙인다.

“멍청이들 빠지면 편하고 좋지.”

헌터계의 인싸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본 정예슬은 확신했다.

‘저 사람 나랑 안 맞아. 띠꺼워!’

느닷없이 개론서라면서 건네준 종이뭉치도, 조소를 가득 담은 저 말투도 둘 다 싫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다들 정예슬과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종이뭉치를 팔랑팔랑 흔드는가 하면 ‘이게 뭔 소리야.’ 라고 중얼거린다.

“지금까진 편했죠? 운좋게 마나 얻어서, 몸에 힘줘서 꺼내쓰고. 그게 다였죠? 마법은 그런 식으로 못 쓰니까 배우기 싫으면 말아요. 다 자기 손해지.”

정예슬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중의적인 의미로 폭력적일 만큼 쉽게 가르쳤던 참스승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아른거렸다.

“스미스 선생님. 그립습니다······.”

‘어?’

정예슬 본인이 한 말이 아니었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봤다.

치아가 가지런한 최민호의 모습이 보였다. 최민호가 이어서 읊조렸다.

“꽃이 지고서야 봄인 줄······.”

정예슬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흡족한 마음으로 정예슬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거면 된 거야······.’

한편 천유화는 심기가 좋지 못했다.

‘골라서 뽑아왔다더니 바보들만 고른 거야?’

애초에 배울 의욕도 배울 만한 자질도 없어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배틀 메이지의 방식으로 전투에 마법을 섞어 강화하는 정도라면 천유화가 내어준 종이를 구태여 다 외울 필요는 없었지만, 천유화는 그런 어중간한 방식으로 마법을 전수할 생각이 없었다.

“삼십 분 시간 줄게요. 거기 일 장이라고 표시해 둔 부분 따라서 마나 움직여 보고-”

천유화가 오른손바닥을 펼쳤다.

몇 센치 위로 자그마한 마력구체가 떠올라 회전했다.

“이거 만들 수 있는지 한 명씩 검사받으시면 돼요. 이제 시작해요.”

‘아마 못하겠지만.’

그리고 예상대로 결과는 형편없었다.

자질 있는 A랭크 헌터들과 이미 검증받은 S랭크 헌터들이라면서 기본적인 마력구성체조차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틀렸어요.”

“이거 아니에요.”

“이런 걸로는 모닥불도 제대로 못 피울 건데 왜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거예요?”

일곱 명의 헌터가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남은 건 세 사람.

이서준, 정우철, 정예슬.

아까 연습하는 걸 지켜보니 그나마 가장 싹수가 있어 보이는 세 사람이긴 했다.

“이서준. 나오세요.”

천유화는 이서준이 만들어낸 마력구성체를 유심히 바라봤다.

‘흐음.’

마력구성체의 크기가 일정하지 못했고 회전하는 궤도도 불안정했다. 하지만 아주 글러먹은 것도 아니었다.

자꾸 천유화 본인과 혁련휘를 흘낏거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제대로 한 건지 확인하려고 그러는 거겠지.

“못 쓸 정도는 아니네요. 다음, 정우철.”

그리고 당당하게 나선 정우철이 보인 결과물.

‘어?’

이걸 ‘나쁘지 않다’ 라고 말하는 건 박한 평가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상당히 좋았다.

‘한 명 정도는 칭찬해주자.’

천유화가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괜찮네요. 잘하네.”

정우철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홉 명도 얼굴색이 밝아졌다.

“다음 정예슬.”

혼자 연습해 보고 은근히 할 만하다고 생각했던 정예슬은 자신감 있게 앞으로 나섰다.

왼손바닥을 위로 하고 앞으로 뻗었다.

정우철의 것보다는 못하지만 다른 아홉 명보다는 확실히 모양이 잡힌 마력구성체가 떠오르다가······, 이내 픽 꺼졌다.

칭찬을 일발장전 중이던 천유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집중력이 무너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딱히 그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문을 담고 정예슬을 바라봤다. 입을 우물거리는 게 표정이 이상했다.

하지만 정예슬의 현재 심경은 심각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닮았잖아?’

여자 옆에 조용히 팔짱만 끼고 무게를 잡고 있는 대머리 남자.

분명 동양 사람이 맞긴 하다. 하지만 닮았다.

‘브루스 윌리스······.’

두상도 삶은 달걀처럼 생겨서 대머리가 더할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저만한 완성형 대머리는 대한민국에서 만나보기가 쉽지 않다.

‘삭발한 건가? 아니면······.’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아주 큰 실례가 될 지도 모르니까.

작년까지 헌터 정예슬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하나씩 존재했다.

단점이라 함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못 참고 결국은 해버린다는 것.

반면에 장점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말해도 의외로 분위기가 싸해지지 않는다는, 극한에 달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다.

하지만 올해 여름 이후 정예슬은 변했다.

무언가를 말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제재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자연의 섭리를 지금은 없는 한 남자에게 배웠다.

정예슬은 속으로 애타게 그 이름을 불렀다.

‘스미스 쌤. 나한테 힘을 줘요······. 정예슬! 예슬아, 넌 할 수 있어.’

결코 대머리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집중력이 흩어졌다. 마력구성체가 펑,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천유화는 생각했다.

‘소질은 괜찮지만 저러면 대성하기는 어려운데.’

“됐어요. 들어가-”

“잠깐.”

천유화가 하려던 말을 묵직한 강철 같은 목소리가 막아섰다.

지금껏 한 마디도 않고 있던 혁련휘였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태산 같은 기세가 함께 했다.

그리고 정예슬을 향해 말했다.

“하나 물어보지.”

“······네. 네에?”

“왜 나를 쳐다본 다음 집중력이 흐트러졌지?”

정예슬은 생각했다.

‘으아아악! 들켰다!’

무조건 안 봤다고 발뺌하는 건 통하지 않을 것이다.

정예슬은 필사적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아, 그게 말이죠. 분위기가 너어무 멋있으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

하나도 안 먹혔다는 걸 깨달았다.

대머리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정예슬은 마인드컨트롤을 하기 위해 속으로 주문을 읊었다.

‘자, 자라나라······.’

정예슬에게는 영겁과도 같았던 오 초의 침묵이 지나고서야 대머리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다는 듯 으스스한 한 마디를 경고처럼 남기면서.

“앞으로 지켜보겠다.”

“하, 하하. 안 그러셔도 되는데-”

죽다 살아난 정예슬이 동료들 쪽으로 걸었다.

한데 어째 바라보는 시선들이 싸했다.

방금 자신이 저승 입구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듯했다.

메시지 앱 알람이 울려서 정예슬은 잠깐 휴대전화를 꺼냈다.

지금 같이 있는 헌터들 중 하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예슬아 너 저런 타입 좋아하니······?>

정예슬은 단 세 글자로 답장했다.

<전혀요>

그러한 혼란 속에서 전직 무림맹주 이서준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랄까. 기시감 같은 게 느껴졌다.

저 여자가 구사한 듣는 사람의 혈압을 급격히 오르게 하는 말투.

대머리 남자의 기세.

모두 어디선가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닌가?’

마법사라는 존재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픽션에서 봤던 것과 헷갈렸나 보다, 라고 이서준은 결론내렸다.

현생부터 센다면 이미 삼십 년 전.

단 한 번, 그것도 십수 분에 지나지 않는 마주침.

백 명 이상이 혼전을 벌이던 상황.

전생을 하나하나 오롯이 기억하지는 못한다는 맹점.

마법사가 아니었던 천유화.

결정적으로, 그 시절 아직은 힘겹게나마 버티고 있던 혁련휘의 머리숱.

그 모든 것들이 겹쳐서 일어난 불상사였다.

***

한편 그 시각.

진태호와 곡비령은 천마신공의 기운을 추적하고 있었다.

손목 위에 새겨진 문신이 빛나는 걸 보며 진태호가 말했다.

“저쪽인가봐.”

추적방법은 이러했다.

카페 안에 남아 있던 기운을 정제해 진태호의 손목에 새긴다.

그러면 문신이 주변에서 동일한 기운을 감지하고, 진태호와 곡비령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뭐야, 되게 쉬은데? 간단하네.’

‘간단하다고······? 이게 쉬워보여?’

천유화가 으르릉거렸다.

‘오라버니는 천 년을 수련해도 못 쓰는 초고위 마법이니까 제발 나 심기 거스르지 마요.’

‘아, 알았어······.’

과연 천유화가 말한대로 마법은 효과가 좋았다.

이리저리 바삐 다니길 반나절.

문신이 점점 빛을 밝게 냈다.

거기서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

화아악.

마침내 문신이 불타오르며 자취를 감췄다.

‘찾았다······!’

진태호와 곡비령은 숨을 죽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내 서로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거 같지?>

<응. 아마도. 아니, 확실해.>

겉모습은 바뀌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이 기운을 가진 사람은 천하에 오직 그분 외에는 없으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 얼굴을 맞댄 후에 해도 늦지 않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진태호가 메시지를 보냈다.

<형님, 운혜를 찾았습니다.>

삼십 분도 안 되어서 혁련휘와 천유화가 도착했다.

조금이나마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던 진태호와 곡비령과는 달리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혁련휘가 물었다.

“확실한가?”

“네. 이거 보십쇼.”

진태호의 손목은 이제 문신이 없었다.

천유화가 말했다.

“이러면 맞아요.”

혁련휘가 시야에 보이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좋은 곳에 사시는군.”

“들어가서 문을 두드려 볼까요?”

“불경스러운 짓 마라. 교주님이 나오실 때까지 기다린다.”

그때부터 사마군은 출입구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기다렸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우리를 바로 알아볼는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듣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단 하나뿐인 주군이 출입구로 모습을 보였다.

<쟤입니다. 쟤가 운혜라고요!>

<나도 보면 안다.>

저 당당한 기운을 보라.

그러면서도 묘하게 수줍은 데가 있는 몸짓.

혁련휘도 이제는 확신했다.

“가자.”

사마군이 함께 걸었다.

그들의 주군은 마실 것을 홀짝이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열 걸음 뒤에서 혁련휘가 대표로 나섰다.

주군? 아니다.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지금만큼은 다르게 부르고 싶었다.

“운혜야······.”

낮은 목소리에 여성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눈물콧물이 사마군의 얼굴을 적셨다.

진태호가 가장 먼저 달려나갔다.

“운혜, 운혜야아!”

사실은 사마군 중에 가장 마음이 약한 곡비령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으며,

천유화는 웃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지 표정을 다잡았지만 곧바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야 했다.

혁련휘는 다가갔다.

다가가서, 세 걸음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교의 천마를 배알하나이다. 소임을 미처 다하지 못한 불충을 남은 목숨으로 사죄하겠습니다. 나의 주군이시여.”

진태호가 여성의 얼굴을 부여잡고 말했다.

“우리 알아보겠니? 형님은 결국······, 저렇게 돼버리셨지만. 그래도 알아볼 수 있겠지?”

곡비령은 교주님이라는 호칭도 잊은 채 눈물을 쏟아냈다.

“운혜, 우리 불쌍한 운혜······.”

“운혜야. 말만 해라. 이제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줄 수 있어. 이제 행복하게만 살면 돼. 그러면 돼······.”

너무 놀랐는지 여성은 어떤 대답도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마실 것을 떨어뜨린 채 그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그게 더욱 안쓰러워서 사마군은 다 함께 달려들었다.

꿈에도 그리던 그들의 어린 천마를 꼭 끌어안았다.

***

야채주스를 마시면서 걷고 있는데 전생의 부하들이 뜬금없이 달려나왔다.

“운혜야아!”

“우리를 알아보겠니?”

알다마다.

모를 리가 있나.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우리 못다 이룬 마도천하를 한 번 이뤄볼까? 너는 말만 하면 돼. 우리가 다 해줄 테니까!”

“와아, 마도천하! 와아, 천마지존!”

“······.”

내 표정이 어지간했는지 부하들이 울상을 지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니? 응, 우리 천천히 하나씩 이야기하자. 할 얘기라면 넘칠 만큼 있으니까.”

아니, 놀라고 자시고를 떠나서.

‘난······, 난 이수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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