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강렬한 트롤의 기운.
유지현은 거침없이 밤하늘을 활공하며 지상으로 향했다.
화재가 난 카페 건물과 삼십여 미터 떨어진 시점에서 몇 차례 손을 튕겼다.
탕! 타앙!
지풍에 닿은 이층 창문의 일부가 깨지고,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렸다.
어차피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테지만,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며 유지현은 카페 내부로 진입했다.
그리고 곧바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층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한 명도 빠짐없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화재의 진원지 역시 한눈에 들어왔다.
‘저기구나.’
한쪽 구석의 테이블. 집채만 한 불길이 꺼질 기미도 없이 활활 타올라서 주변을 태우고 있었다.
저 정도야 내력으로 간단히 끌 수 있다고 생각한 유지현이 불길이 붙은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한데 다가갈수록 석연찮은 점이 보였다.
‘어······?’
단순한 불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느껴지는 특별한 힘.
천마신공을 본령무공으로 삼는 유지현이라 잘 알았다.
이건 마나를 근원으로 해서 일어난 불길이었다. 게다가 지금도 주변의 마나를 잡아먹으면서 더욱더 거세지고 있었다.
내력을 사용해서 강제로 진압한다면 자신이 떠나고 난 후에 다시 불길이 되살아날지도 몰랐다.
온 천지를 순환하는 자연지기와, 그걸 동력으로 삼는 천마신공 고유의 공능을 이용해 이곳 카페 전체를 안정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그 다음은 어려울 것도 없이 간단했다.
유지현이 허공에 손을 떨쳤다.
빛이 뿜어져나와 카페 내부를 어루만지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밝은 빛이 카페 내부를 훑고 지나간 후에는 불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있었다.
유지현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뒷일은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다. 여기저기 새카맣게 그슬리긴 했지만 그것까지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까.
카페 안을 빙 둘러보며 유지현이 느물느물한 미소를 흘렸다.
‘흐흐, 오늘도 한 건 해결.’
이제 사람들 올라오기 전에 자리를 빠져나가야 했다.
유지현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힘차게 바닥을 박찼다.
하지만 뿌듯한 마음 한편으로 이런 의문도 들었다. 저 불의 정체가 대체 뭐냐, 라는 의문.
혼자 고민한다고 결론이 나올 문제는 아니고 누군가와 상의를 해야 했는데······.
아빠와 엄마는 당연히 논외이니 첫 번째 후보는 사부인 이수민이다.
하지만 유지현은 곧 고개를 저었다.
중대한 문제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수민 언니 지금 약해······.’
격체전력으로 내공을 넘겨준 이수민은 아직도 본래의 무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경한 생각이긴 하지만, 지금 싸운다면 일백 초식 안에 제압 가능하다.
연로하신 사부님께 괜히 걱정거리를 안겨드릴 수는 없다고 유지현은 생각했다.
‘앞으로는 순찰도 강화하고······,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단단히 추궁해줘야지.’
그래도 지금 당장은······.
우우웅, 우웅.
벌써 다섯 번째로 걸려온 전화에 담긴 엄마 아빠의 분노를 어떻게 진정시킬 지가 급선무였다.
***
“오빠?”
“네, 내무부 장관님. 부르셨습니까?”
“지현이 있잖아. 한 달에 얼마 쓰지?”
애 엄마가 서슬이 퍼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쌀쌀한 거실이 한층 더 서늘해졌다.
나는 정직하게 답했다.
“지현이 한 달 용돈은 십만 원입니다.”
“오빠? 나 얼마 쓰냐고 물었는데?”
“······십만 원이요.”
애 엄마가 나직이 한숨을 쉰다.
나는 직감했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얼마?”
“십오만원······ 입니다.”
내가 애 엄마 몰래 만 원, 이만 원씩 주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오빠. 중학교 일학년이 한 달에 십오만 원은······, 좀 많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현이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지만 당연히 못 본 체했다.
간신배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지.”
“내가 볼 때는, 응. 애가 용돈이 너무 많아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아. 연락도 안 하고 학교 끝나고 놀다오고. 그치? 오빠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엄격, 근엄, 진지하신 대법관님의 판결이 이어진다.
“오만 원으로 줄일 거야. 오빠가 가끔씩 더 주는 건 아무 말 안 하겠지만 그것도 오만 원 이내로 하고.”
“히잉······, 아, 아냐. 엄마 말이 맞아.”
애교를 부려서 협상을 해보려던 지현이는 애 엄마의 눈빛에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했다.
애 엄마가 안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내가 말했다.
“딸?”
“······.”
지현이가 배신 당했다는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아빠 어깨가 좀 뻐근한 것 같은데-”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지현이가 표정을 확 밝혔다. 그리고 내 등 뒤에 섰다.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주는 건 오만 원이라도, 안마 수고비는 따로 계산해야지?”
“그치이. 아빠 말이 맞아!”
“세게 좀 부탁할게?”
“응, 응!”
지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어깨를 주물거렸다.
십 분 정도 지나서 지현이의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이 쥐어졌다.
안방 쪽에 경계의 시선을 늦추지 않으면서 지현이가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여기까지만 보면 중학생 딸을 둔 가정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요즘 지현이 귀가 시간이 늦어진 것.
그 자체가 왠지 모르게 수상했다.
친구들이랑 논다고 늦어졌다고 말하긴 했고, 실제로 알리바이도 몇 번 증명해내긴 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온갖 일을 다 겪은 내 이성은 사태를 그리 녹록히 판단하게 두지 않았다.
이 사고뭉치가 도대체 밖에서 뭘하고 돌아다니는지 한 번 알아봐야겠다 싶었다.
이수민한테 물어봐야 하나?
지현이는 이수민이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놈은 이중 스파이로 전직한지 이미 오래였다.
정했으면 속전속결이다.
바로 메시지 앱으로 연락을 했다.
<이수민 씨?>
언제나 그랬듯이 1이 바로 사라졌다.
이 반응속도는 도통 알 수가 없네.
<네, 네! 지현이 아버님.>
<여쭤볼 게 있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뭐든지 말씀해 주세요 *^~^*>
이모티콘의 상태가 상당히 거슬렸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고 본론을 꺼냈다.
<지현이 요즘 귀가가 많이 늦어서요. 친구들이랑 놀고 왔다고 말은 하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좀 되네요.>
<글쎄요······. 저랑은 주말에는 만나도 평일에는 연락만 해서요.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응? 이수민도 모른다고?
<그나저나 요즘 날씨가 많이 춥죠? 건강 관리는 잘하고 계시나요? ^ㅡ^>
<네, 이수민 씨도 환절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갑자기 연락 드려 실례했습니다.>
주절주절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이수민의 메시지를 단호히 끊어내고 생각에 골몰했다.
뭐지? 정말로 용돈이 많은 게 모든 사태의 근원일 뿐인가?
아냐. 뭔가 수상한데······.
최근 몇 달간 지현이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느꼈던 그 기운.
강렬한 트롤의 기운이 내 주변을 맴돌며 사라지지 않았다.
***
“네가 대충 가르쳐서 그렇잖아!”
“뭘 대충 가르치냐, 대충 가르치긴. 네가 맡았어봐. 여기 건물 다 태워먹었을걸?”
당일 영업을 중단하고 불이 꺼진 카페.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녀 한 쌍이 말다툼을 이어나갔다.
사마군의 두 번째와 세 번째인 진태호와 곡비령.
두 사람이 급기야 삿대질까지 시작했을 때, 경멸 섞인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둘 다 똑같아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 식충이들.”
“저기, 유화야? 오라버니한테 그건 좀······, 아니, 아니다.”
“······미안해.”
숨겨진 실세이자 실질적인 핵심인 천유화 앞에서 행동대원 두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
머리숱이 없어 추워보이는 혁련휘가 세 사람을 진정시켰다.
“사람은 안 다쳤다고 하지 않나. 그쯤 해둬라.”
천유화가 새초롬한 어조로 답했다.
“골라도 무슨 그런 사람을 골라가지고. 앞으로는 나랑 혁련 오라버니한테 허락부터 맡아요.”
천유화가 도끼눈을 뜨고 흘겨보았다.
진태호가 떠듬떠듬 변명했다.
“그게 말이다. 자질은 괜찮았거든. 세밀함이 좀 부족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실수할 줄은 나도 몰랐지······.”
쩔쩔매는 진태호를 보고는 천유화가 조금 진정해서 말했다.
“여기 협회랑 이야기도 끝났는데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자고요. 아무튼 화내서 미안했어요.”
뒤늦은 사과였지만 곡비령은 추궁이 이쯤에서 끝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태호가 화제를 돌릴 겸 말했다.
“그러면 이제 알아보러 가죠.”
그들 네 사람, 사마군 전원이 굳이 이곳 카페로 찾아온 건 고작 책임소재를 추궁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사마군이 함께 땅을 박찼다.
가벼운 발놀림 한 번으로 그들 네 사람은 일제히 카페 이 층의 내부로 들어섰다.
혁련휘가 짧게 말했다.
“유화.”
“네.”
천유화가 바닥에 양손을 댔다.
컴컴한 바닥으로 연한 초록빛이 퍼져나가더니, 점차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려나갔다.
그리고 혁련휘가 초록빛과 카페 전체를 아우르며 기감을 집중했다.
아직 미세하게나마 남아 있는, 누군지 모를 화재 진압자의 기운.
사마군은 그 기운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왔다.
창문이 깨진 후 불길이 꺼지기까지는 몇 초의 시간밖에는 소요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모든 건 고스란히 남겨두고 오직 불길만 진압한 솜씨.
차라리 건물 전체를 날려버렸다면 모를까, 이 시대의 헌터들 따위에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해서 작은 가능성이나마 희망을 품고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아······!”
실낱 같은 가능성이 마침내 현실이 됐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에 떨어진 후, 사형제나 다름없던 사마군은 제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됐다.
본디 몸을 움직여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던 천유화는 마법이라는 새로운 신비에 치중했다.
재능이 넘쳤으며, 의욕도 충만했다.
누천 년간 마법을 발전시켜온 그 세계에서도, 시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마법사를 단 한 명만 꼽으라 하면 모두가 천유화라는 이름을 입에 올렸다.
진태호와 곡비령은 본래의 무공과 마법을 결합한 전투 방식으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사마군의 수좌 혁련휘는,
그만은 마법이라는 이적에 눈 돌리지 않았다.
오직 지닌 바 무공을 더욱 단련했고 사투 속에서 한계를 깨나갔다.
그리고 도달했다.
강호무림에서도 하늘이 허락한 자만이 올라선다는 자리.
무공으로 신을 엿본다는 입신경의 경지에.
그런 혁련휘의 감각에 지금 잡힌 기운은······, 꿈에도 그리던 것이었다.
천마일맥 독문무공.
고금제일 천마신공.
억조창생을 자비로 감싸는 자연지기의 흐름이 혁련휘의 기감에 닿았다.
“형님. 어떻습니까? 맞습니까?”
진태호가 애가 타는지 보채듯이 물었다.
혁련휘는 대답하지 않고 다만 눈을 감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었다.
다섯 번의 호흡이 있은 후에야 혁련휘가 눈을 떴다.
그리고, 사마군 모두가 기다린 그 말을 마침내 입 밖에 냈다.
“찾았다.”
“······!”
“교주님이 이곳에 계셨다.”
환호성이 터졌다.
진태호와 곡비령은 언제 앙숙이었냐는 듯이 손을 부여잡고 빙빙 돌다가 서로를 껴안았다.
천유화는 뒤돌아서서 손으로 슬쩍 눈가를 훔쳤다.
혁련휘가 말했다.
“태호와 비령. 너희 둘은 이 흔적을 바탕으로 교주님의 자취를 쫓아라.”
“어? 형님이랑 유화는요?”
“저랑 오라버니는 내일부터 협회 가야 되니까요.”
진태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운혜 찾을 수 있는데 지금 마법 가르쳐주는 게 문제입니까? 그냥 무시하고 다 같이 운혜부터 찾죠.”
나머지 셋의 싸늘한 시선이 진태호를 향했다.
천유화가 대표로 말했다.
“흔적을 쫓는 건 두 명으로도 충분하고 아직 교주님 의중을 모르잖아요? 우선은 계획에서 어긋나지 않는 게 상책이죠.”
혁련휘가 말을 받았다.
“유화가 말한 대로다. 나와 유화는 내일 예정대로 협회에 방문한다. 내일 만나기로 한 게-”
“열 명이요.”
천유화가 척하면 척이라는 듯이 답했다.
“제법 자질이 괜찮은 사람들만 뽑았다고 하더라고요. 명단이 그러니까······.”
정예슬, 최민호, 정상우, 김호철, 백하은······.
천유화의 입에서 여러 이름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두 사람.
“이서준, 정우철. 이렇게 열 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