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중2병이 예정된 다크나이트.
천마 설운혜 직속 호위대, 사마군의 막내 천유화는 생각했다.
‘이 사람······.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뭘 하지 말라고 한 것 같기는 한데 통역마법으로도 정확히 해석이 안 됐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긴 하다.
하는 말과 생각이 완전히 따로 놀거나 상대방이 사용한 어휘가 아예 낯선 종류일 때.
그럴 때는 통역마법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의도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 온 지도 두 달이나 지나서 이제는 이런 경우가 드물었는데······.
천유화는 한껏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가 잘 못 들어서요.”
상대방의 표정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혼잣말로 뭐라고 구시렁거린다.
‘왜 저러는 거지?’
천유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차에 남자가 말했다.
“나 탐색하는 거 하지 말라고요.”
“······!”
이번에는 확실히 이해했다.
그제서야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챈 천유화가 다급히 혁련휘에게 전음을 보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바로 알아챘어요.>
혁련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협회라는 곳에서 준비한 한 수다 이건가?’
천유화의 마력을 곧바로 감지해 내다니.
이곳의 인간들에게 쉬이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강하다.’
직접 손발을 맞부딪치면 좀 더 확실해지겠지만 강하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주어진 힘을 어떻게 활용하는 줄도 모르는 시시한 놈들밖에 없다고 여겼는데.
설마 이 정도로 완성된 강자가 존재할 줄은 몰랐다.
혁련휘가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군. 사과하도록 하지.”
남자가 또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
이 새끼들 뭐하자는 거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대차게 한 판 붙어보려고 도발을 해봤는데 먹히지가 않았다.
내가 산전수전 다 겪어봤지만 이런 도발에 저렇게 대응하는 놈들은 또 처음이다.
순진하게 생긴 저 여자는 내 도발에 대해 어떠한 감정적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달라고? 욕을 한 번 더 먹고 싶다는 건가? 그런 건 아닐 텐데.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서 일단 다시 한 번 내 뜻을 전달했더니 이젠 사과를 한다.
그리고 곧바로 내 주위에서 스멀대던 기척이 사라졌다.
······뭐지?
생각보다 참을성 있고 정중한 놈들인가?
쓰는 말투는 이상하게 노이즈가 낀 것 같이 계속 지직거리고 있긴 하지만 크게 해가 되는 수작질을 부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한 단계 평가를 상향해줘도 되겠다 싶었다.
그래.
일단은 대화 먼저 해보자. 대화 먼저.
내가 물었다.
“당신들 특이한 힘을 쓴다면서? ‘마법’이라고 했나?”
대머리가 대답했다.
“그렇다.”
“마법이란 건 헌터와 뭐가 다른 거지?”
“많은 것이 다르지.”
대머리의 입가에 조소가 스쳤다.
“너희들은 너희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건 겨우 그 정도에 그치는 힘이 아니다. 물론 너는 다른 놈들과는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이 새끼 은근히 샤바샤바하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자연스럽게 칭찬을 섞는 기술이 일품이었는데, 의도적인 게 아니라 아예 체화된 것 같았다.
아부 좀 할 줄 아는 놈인가?
나도 모르게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건 그래. 그렇긴 하지. 아무튼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한 가지 제안과 한 가지 요구가 있다.”
“요구부터 말해봐.”
“간단하다. 우리를 받아들여라.”
바로 견적이 나온다.
이야기가 간단해서 좋네.
“우리는 먼 곳에서 왔다. 우리는 고향이 없다. 우리와 맞서려 하지 말고 우리의 뒤를 캘 생각도 하지 마라. 그저 있는 그대로 우리를 인정해라. 요구는 그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대등한 협력 관계가 되고 싶다는 거네.
주류 사회로의 편입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대답을 않고 있자 대머리가 재차 말한다.
“그리 한다면······.”
대머리가 옆의 여자에게 눈짓한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양손을 활짝 펼친다.
곧 허공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휘황찬란한 구체가 나타나 천천히 회전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지만 그것이 이치에 맞닿아 있는 신비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너희에게 마법을 선사하겠다.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
그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다른 수작을 부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건 저놈들한테는 꽤 밑지는 장사일 텐데.
의도가 궁금했다.
“하나만 물어보지.”
“말해라.”
“너희는 목적이 뭐지? ”
내 말에 대머리와 여자가 다시 한 번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대머리가 말했다.
“분명히 우리에게는 목적이 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없다. 말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이 너희에게 해가 될 일은 없다. 개인적인 일일 뿐이니까.”
“누구 죽이거나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싶다거나. 아무튼 그런 쪽의 목적은 아니라는 말이지?”
“그렇다.”
“흐음.”
대머리의 말에서 삿된 바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저놈들 나름대로는 있는 패를 다 공개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부탁받은 게 있으니까 하나는 일러둬야지.
“허튼 수작 부리는 거라면 재미없을 거야. 그것만 알아라.”
대머리가 피식 웃었다.
“그건 서로 마찬가지 아닌가?”
흐음, 머리숱만큼이나 버릇이 없는 놈이군.
언제 한 번 예의범절에 관한 친절한 교습이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야기 자체는 생각보다 잘 풀렸다.
휴대전화로 김유진을 호출했다.
“네, 김유진 씨. 들어와도 됩니다.”
오 분쯤 지나서 김유진이 들어 왔는데 옆에 우철이를 달고 왔다.
뭐라고 하면서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호위라도 하는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김유진 이 사람, 내가 그렇게 안 봤는데 공적인 권력을 사적으로 쓰는 타입이었구만?
으음.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아무튼.
김유진이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 말했다.
“재밌네. 진행시켜요.”
나야 이제 발 뺄 거지만 김유진은 앞으로 쟤네랑 얼굴 자주 볼 테니까 일부러 들으라고 말했다.
“한 번 터놓고 이야기 더 나눠보시죠. 손해 볼 일 없을 것 같으니까. 그럼 나 갑니다.”
“살펴가세요!”
“나중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우철이와 김유진 인사를 뒤로 하고 방 밖을 향해 걷다가 잠깐 멈춰섰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을 흘렸다.
“우리 왠지 또 볼 일 있을 것 같은데.”
대머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직감했다.
내 앞에서 저런 식으로 뭐가 있는 듯이 뻗대던 놈들은 신기하게도 꼭 다시 마주칠 일들이 생겼고, 결국에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게 됐거든.
지금껏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이틀 후에 우철이를 통해서 소식이 왔다.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말이었다.
협회에서는 그놈들 편하게 지낼 수 있게 전반적인 편의를 제공해주고, 그쪽에서는 협회가 몇 명 데려오면 마법이란 걸 기초부터 가르쳐주는 식이라고 했다.
우철이 말을 들어보니, 이게 처음도 아니란다.
<저희 쪽이랑 접촉하기 전에 이미 몇 명 가르쳐주기도 한 모양이더라고요. 거기서 분위기가 좀 싸해졌는데 그래도 잘 마무리가 됐습니다.>
<잘 됐네.>
<정말 감사합니다, 사부님!>
<왜 네가 감사한데?>
메시지를 그렇게 보냈더니 이 새끼······. 읽고 씹었다.
한 시간 후에야 답장이 왔다.
<근데 어째 인상이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꼭 어디서 한 번 본 것 같기도 하고요.>
대화 주제 돌리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재차 추궁을 하려는데 부엌에서 애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밥 다 돼가는데 지현이한테 전화 좀 해줄래?”
알겠다고 대답한 뒤 시간을 보니 벌써 7시가 넘어 있었다.
오늘은 학원도 안 가는 날인데 이 기집애가?
지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
그리고 같은 시각.
어두운 밤하늘의 그늘.
유지현은 허공에 뜬 채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
친구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었다.
역 앞에서 티격태격하는 남녀의 실루엣도 보였다.
한 마디로 별다를 건 없이 평화로웠다.
유지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별 일 없네.’
지난 여름.
초대형 게이트와 스미스 아저씨가 얽힌 그 일을 겪은 후 유지현은 줄곧 생각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뭘까, 라고.
소설 집필?
물론 재미있고 흥미롭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최근에는 의욕이 부쩍 떨어졌다.
엄마가 집필을 도와주기 시작한 이후로 평가는 비약적으로 상승했지만-
유지현은 서글프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이제 내 소설이 아냐······.’
독자들이 좋아한 건 엄마가 도와준 글이다.
유지현 본인의 힘으로 쓴 글이 아니었다.
아빠가 도와주는 건 허용범위 내였다.
유지현이 생각하기로 그 정도는 자신도 노력하면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였으니까.
한 마디로 충분히 비빌 만했다. 결단코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도와주는 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나는 이십 년 더 지나도 그렇게는 못 쓸 거야······.’
격의 차이란 걸 절감하게 된 것이다.
유지현은 사랑하는 엄마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당황스러웠고, 준비가 안 된 멘탈 약한 지망생답게 도망치길 선택했다. 도망치는 건 때때로 도움이 되는 법이니까.
결국 ‘칠대 천마의 전설’은 현재 잠정적인 연재 중단 상태였다.
처음 엄마의 도움을 받았을 때 ‘작가가 필력을 숨김’ 이라며 좋아하던 독자들은 연재주기가 점차 느려지자 ‘필력과 연재주기를 맞바꿨다’ 라고 항의했다.
열흘이 지나서는 급기야 대필 의혹까지 제기했다.
쪽지함은 아예 열어보지도 않았다.
이불 속에서 괴롭게 뒹굴거리다가 유지현은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을 아직 못 찾았다면 적어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근데 내가 뭘 잘하지?’
공부? ‘수학만 뺀다면’이라는 조건을 달면 중위권. 다시 말해서 뒤에서 세는 게 더 빨랐다.
소설? 이건 일단 생각하고 싶지 않다.
청소? 하고 나면 엄마가 고스란히 다시 해야 한다.
요리? 직접 만든 요리를 내어줬을 때 엄마와 아빠의 표정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옷을 세탁하는 것이라면 세탁기 버튼만 누르면 된다. 물론 해 본 적은 없지만 더할 나위 없이 간단한 일이다.
그 정도는 자신에게도 충분히 가능할 터.
엄마와 아빠가 데이트를 나간 주말.
유지현은 쌓여 있는 빨래들을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결과물은 참담했다.
‘갸아아악! 이게 뭐야아!’
세제를 너무 많이 넣었던 탓인지 세제 가루가 엉망으로 묻어 있었다.
누가 볼까 두려워 유지현은 서둘러 세제 없이 빨래만 다시 돌렸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다시 돌아와서 ‘우리 딸이 빨래도 했네’ 라고 정말로 기쁜 듯이 미소지었을 때.
애써 뻐기는 표정으로 밝게 웃었지만 유지현의 마음은 그날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절망하며 유지현은 생각했다.
남은 건 단 하나뿐이라고.
‘나한테는 이제 무공밖에 없어······.’
다행히 무공수위는 여름 이전과 비교해서 압도적으로 상승했다.
사부인 이수민이 격체전력으로 넘겨준 내공은 정말로 막강해서 거의 반강제적으로 천마신공의 화후가 10성을 넘었다.
몇 년을 더 고련한다면 11성까지 가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지현이 하려는 일은 지금의 성취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헌터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엄마가 허락하지도 않을뿐더러 최근에는 게이트니 던전이니 하는 것도 부쩍 줄어서 현역 헌터들도 일거리가 많지 않다고 하니까.
유지현이 생각한 것은 헌터가 아닌······.
‘다크나이트.’
월등해진 내공을 바탕으로 허공답보를 펼쳐서 서울 상공을 돌아다닌다.
혹시 나쁜 일이 생기려 하면 그걸 막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간단하면서도 훌륭한 계획이었다.
유지현이 듣기로 최근에 부쩍 늘어난 신규 각성자들 때문에 경찰도 헌터들도 골머리를 썩히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힘이라면 작은 도움이나마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 지 한 달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보람이 있었다.
음주운전을 하는지 어지럽게 내달리는 차를 몰래 세우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걸 몰래 제압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많이 도움을 줬다.
물론 은밀하게 움직인 덕분에 누구도 유지현의 정체를 알아채지는 못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유지현은 매일 되뇌었다.
‘이건 절대로 중2병이 아냐. 왜냐하면 나는 실제로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고 있고, 게다가 중학교 1학년이니까.’
아직 반년이라는 유예가 남아 있었다.
‘근데 오늘은 별 거 없네.’
평소보다 길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도 적고 눈에 띄는 일도 없었다.
게다가 교복 안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까도 한 번 왔는데 또다시 오는 걸 보니 집에서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그러면 내일 다시-’
그렇게 생각하면서 집 쪽으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저 멀리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불이야, 불!”
유지현은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멋들어진 카페 건물 2층.
불길이 단단히 붙은 건지 붉은빛이 강하게 새어나왔다.
건물 밖에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서 아우성치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미약한 의문이 가슴을 스치는 걸 느꼈지만 그런 데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유지현은 쏜살같이 지상으로 급강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