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48화 (48/130)

48. 물줄기도 뿜던데요.

슬슬 밤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시기였다.

겉옷 매무새를 정리하면서 약속장소로 들어갔다.

“몇 분이세요?”

“아, 일행 있어요.”

내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걸 봤나 보다.

출입문이 보이는 방향으로 앉아 있던 우철이가 반색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여깁니다, 여기!”

우철이랑 자주 보는 건 아닌데 그래도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는 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얘는 이제 진짜로 우철이네.

정철우가 아닌 정우철.

처음에 개명한다는 말 들었을 때는 너무 전생에 매몰되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자기 말로는 그런 건 아니란다.

헷갈리기도 하고 이쪽이 더 편하다나 뭐라나.

아무튼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랍시고 톡 보내는 건 오히려 받는 내가 귀찮아서 하지 말라고 해뒀건만, 술 한 잔 하자고 불러대는 걸 매번 거절하긴 좀 그래서 가끔 맥주라도 같이 마셨다.

복작거리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서 우철이가 앉은 테이블로 걸어갔다.

한데,

“일찍 왔- 어?”

“안녕하세요······.”

자리에 우철이 말고 한 명이 더 있었다. 나도 잘 아는 사람이다.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해내는, 나의 공범이자 든든한 조력자.

편의주의적 전개와 개연성의 수호자.

“김유진 씨가 왜 있습니까?”

딱히 추궁하려고 물은 건 아닌데 김유진이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아, 그게-”

“아무튼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요. 근데 우철아.”

“네, 사부님.”

“나 어디 앉으면 되는 거냐.”

우철이랑 김유진이 마주보는 식으로 앉아 있어서 내가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편하게 혼자 앉고 싶은데.

눈치 빠른 김유진이 잽싸게 자기 술잔을 들더니 우철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

얘네 뭐냐.

왠지 둘이 사이좋게 나란히 앉는 게 하나도 안 어색한 것 같다.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것들 봐라?

유수현, 34세.

할 말은 한다.

“우철아. 김유진 씨.”

“네. 사부님.”

“네?”

“혹시 둘이 사귀나?”

테이블에 쨍, 하고 소리가 났다.

김유진이 자기도 모르게 맥주잔을 엎지른 거다.

잔에 담겨 있던 맥주가 테이블 위를 자유롭게 유영했다.

내 쪽으로는 못 오게 허공섭물로 방파제를 만들어둬서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뇨, 아아뇨. 사부님 무슨 말씀을-”

우철이는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김유진 쪽은 어째 분위기가 싸하다.

둘이 나이 차이가 열 살 조금 안 되게 나는 걸로 아는데.

우철이 이 새끼 도둑놈 주제에 발뺌까지 해?

열애설을 너무 빨리 터뜨려버린 파파라치 기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괜히 미안해졌다.

머리를 긁적이며 무적의 비기를 시전했다.

“그래? 아님 말고.”

“크흡. 사부님, 그게 말입니다.”

“나는 그냥 둘이 분위기 좋아보이길래 나한테 소개해 주려고 데려온 건 줄 알았지. 아무튼 김유진 씨 반갑네요. 잘 지냈습니까?”

“으으. 잘 지내지는 못했지만 저도 반가워요······.”

김유진의 목소리에는 피곤함과 스트레스가 묻어나 있었다.

“요즘도 일이 많습니까?”

“네에. 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어요.”

김유진이 왜 죽을상을 하는지는 알 만했다.

최근 두 달 정도 새로 각성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김유진이 푸념하듯이 말했다.

“이번 달은 각성자 신규 등록만 해도 기존 수치의 두 배가 넘었거든요. 비신고 각성자들까지 포함하면······. 요즘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런데도 게이트나 던전이 열리는 빈도는 확 줄어들었으니까요.”

그건 나도 일하면서 수치를 접하니까 잘 아는 사실이다.

현역 헌터인 우철이에게 물었다.

“너도 요즘 일이 별로 없다고 했지?”

“그렇긴 한데 저는 괜찮습니다. 근데 아무래도 C랭크 이하 분들은······.”

한 마디로 돈 잘 벌던 헌터 업계가 졸지에 레드오션 비스무리하게 돼 버렸다는 말이다.

게다가 새로 각성자가 되는 사람들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골치 아픈 일이 생기고 있고.

술 취해서 난동 피우다가 경찰서 왔는데 갑자기 각성해서 경찰서 초토화 시키고 도망간 놈도 있으니까 말이지.

다행히 아직 정말로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위험요소가 늘어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까 엎질러서 텅 비어버린 김유진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면서 말했다.

“사회지도층으로서 노고가 많습니다.”

“저야 그냥 아빠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

그렇구만.

근데 김유진 이 여자 자꾸 눈치를 슬슬 보는 게 신경이 쓰인다.

술 마음놓고 편하게 먹으려면 지금 정리해 둬야겠다 싶었다.

“그러면 김유진 씨는 나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온 겁니까?”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우철이와 김유진이 흠칫하며 눈빛을 교환했다.

나를 잘 아는 우철이가 바로 머리를 박았다.

“맞습니다. 김유진 씨가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쓰러워서 제가 데려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우철 씨······.”

이 시건방진 자식들.

부탁은 나한테 할 거면서 왜 분위기는 둘이 내는데.

그래도 김유진 부탁이라면 듣지도 않고 거절할 필요는 없다.

나도 염치란 게 있는데 내가 받은 것의 반의 반절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절반까지는 좀 그렇고.

“뭔지 말해보십쇼. 어지간한 건 들어줄 테니까. 할 이야기 있으면 빨리 끝내고 술 먹읍시다.”

“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김유진은 그렇다 치고, 우철이 너는 왜 꼭 네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하냐?

내가 이 의문을 해결하고 싶다고 느끼는 차에 김유진이 입을 뗐다.

“지현이 아버님. 혹시 시간 괜찮으실 때 누구 좀 만나주실 수 없을까요?”

김유진의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랬다.

최근에 헌터 협회 쪽으로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들이 접촉을 해 왔다.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

각성자로서의 소질도 일반적인 S랭크를 아득히 상회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그것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이 있었다.

“특이한 힘을 써요.”

“특이한 힘이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각성자라는 거 자체가 원래 특이한 힘이잖아.

“네. 일반적인 각성자랑은 좀 달랐어요.”

“날아다니고 손에서 불 뿜고 그럽니까?”

웃으면서 물었다.

내가 방금 든 예시는 강호무림에서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신기다.

허공답보나 삼매진화 같은 것.

단순히 신체를 강화하거나, 마나를 방출하는 정도에 그치는 현대의 각성자들에게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특이한 힘이겠지.

하지만 이어진 김유진의 말에는 나조차 놀랐다.

“물줄기도 뿜던데요······.”

“물이요? 이거 말하는 거 맞습니까?”

테이블 구석에 놓인 물병을 흔들면서 물었다.

김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날아다니고, 엄청나게 밝은 빛 같은 것도 만들 수 있고, 손에서 불덩어리 나가고, 물줄기도······. 그, 꼬부기 비슷한 느낌으로요······.”

“그게 뭡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저 정도면 강호무림의 무공보다도 범용성이 높은 수준인데.

호기심이 일었다.

“정체를 아예 모른다고요?”

“신원을 알 수 있는 정보가 하나도 없어요. 그쪽에서도 말하더라고요. 조사해 봐야 소용없을 거고 괜히 어디다 떠벌리면 재미없을 거라고요.”

저건 꼭 내가 할 법한 멘트인데.

“근데 그쪽에서 딱 하나 알려준 게 있긴 했어요.”

“뭘 말입니까?”

“자기들이 쓰는 힘을 이렇게 말했어요.”

김유진이 지금도 안 믿긴다는 듯이 말했다.

“‘마법’이라고.”

***

어차피 맥주 한 잔만 간단하게 마시려고 나온 자리여서 채 한 시간 정도 후에 자리를 파했다.

내가 일찍 빠져준다니까 우철이도 김유진도 은근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어? 생각하니까 열받네?

아무튼 김유진 부탁이란 게 협회 쪽 자원으로는 뾰족한 수가 안 나오니까 내가 마법사인가 뭔가 하는 놈들을 만나서 이게 안전한 패인지 알아봐달라는 말인데.

솔직히 귀찮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흥미도 생겼다.

그런 놈들이 서울에서 설치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얼굴 정도는 봐두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결국 자리를 나서기 직전에 승낙하겠다고 말했다.

내 정체는 김유진을 비롯한 극소수만 아는 조건으로.

혼자 가을 밤거리를 걸으면서 지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곱 시 반 조금 넘었으니까 수학학원 끝나고 분식집에서 떡볶이 같은 걸 사먹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 근처이기도 하고 옆에 친구들 있으면 같이 계산해주면서 ‘우리 딸이랑 친하게 지내렴’ 같은 대사 쳐주면 지현이 교우관계가 더 좋아지려나?

나 어릴 때는 그런 거 오히려 싫어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일단 지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십 초 정도 기다려봤는데 받지 않았다.

어차피 수학학원이 이 근처라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걷는데, 문득 골목 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지현이가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안기듯이 내 팔을 확 잡아챘다.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니까 지현이가 슬쩍 피한다.

2학기 되고부터는 밖에서는 이런 거 하면 묘하게 창피해한단 말이지.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면서 물었다.

“딸 공부 열심히 했어?”

“응? 아니!”

지현이의 미소가 해맑았다.

너무 해맑아서, 최소한의 주의 정도는 줘야겠다 싶었다.

“엄마한테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아빠는 나를 대체 어떻게 보는 거야?”

지현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당연히 엄마한테는 공부 열심히 한다고 말하지이. 히히.”

으음, 그게 그런 문제였냐······.

“떡볶이 사가서 엄마랑 셋이 먹을까?”

“응. 나 양 많이 주는 데 알아. 가자.”

목적지를 학원 앞 분식집으로 잡고 지현이랑 같이 걷는데, 문득 내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딸?”

“응?”

“그거 교복. 단추 떨어진 거 아냐?”

지현이 교복 겉옷에 단추 하나가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내가 말해주고서야 알았는지 지현이가 눈에 띄게 당황한다.

“어? 어······? 그러네······?”

“안감에 예비 단추 있을 거니까 집에 가서 엄마한테 달아달라고 하자.”

“아, 으응.”

묘하게 놀라 하는 지현이의 안색이 잠깐 마음에 걸렸다.

우리 딸도 슬슬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쓰는 나이가 돼버린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그리고 며칠 후.

널찍한 방에서 다리를 꼬고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진이 일렀던 말이 생각났다.

‘염치없이 너무 많은 걸 부탁 드릴 순 없으니까요. 대화 정도만 해 주시면 돼요. 최소한이나마 신뢰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아버님 판단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내 판단을 어떻게 믿고요’

‘최소한 저희가 판단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대강 그런 말이었는데.

대화, 대화라.

그거 꼭 말로만 해야 한다는 법 있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 대화방식을 바꿀 수도 있는 거지.

예를 들어서 주먹이라거나.

물론 괜히 머리 아픈 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최후의 수단이긴 하지만.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문이 열렸다.

김유진에게 들었던 대로 두 사람이었다.

덩치가 산만한 남자 하나와, 대조적으로 아주 가녀리게 보이는 여자 한 명.

패도적인 기세를 줄기줄기 흘리며 들어온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놀랐다.

이건······. 이 새끼······.

대머리잖아?

그야말로 대머리의 완성형. 바이블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근데 뭐지?

김유진한테 들은 거랑 완전히 달랐다.

꼬부기라면서. 물줄기 뿜는다고 했잖아.

불덩어리도 날린다고 했는데.

그야 꼬부기도 대머리인 건 맞긴 하지만, 저놈은 아무리 봐도 강호무림식의 고수인데?

그것도 제법 강한 놈이었다.

나한테 안 되는 거야 자연의 섭리처럼 당연한 것이지만, 내 전생 기준으로 봐도 저만한 고수를 그렇게 많이 보지는 못했다.

이상하네. 김유진이 없는 말을 지어냈을 리는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마법이라는 게 저 여자를 말하는 거였구만.

순진하게 생긴 저 여자에게서 나온, 정체를 알 수 없는 흐름.

그게 다가와서 나를 엿보려고 하고 있었다.

단순히 기감으로 상대를 가늠해 보려는 느낌은 아니었다.

몹시 불쾌했고, 내가 굳이 참아줄 이유도 없다.

‘적잖이 언짢은 바가 있으니 무례한 행위는 부디 삼가해 주시길 바란다’ 라는 내 뜻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여자분?”

내가 대머리 말고 여자한테 말을 건 게 의외였는지 둘 다 얼굴에 이채가 감돌았다.

여자가 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 말씀이신가요?”

각박한 세상살이 같은 건 하나도 안 겪어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주 정중하고 신사적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내가 제안했다.

“그······, 뒤지기 싫으면 그만 엿보는 게 어떨까요? 기분이 아주 좆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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