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사람을 찾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지?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현실에서도 보정효과라는 것이 가능하게 된 건가?
인류의 기술은 이미 거기까지 진보해 버린 것인가?
······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미모였다.
단순히 이목구비만이 아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라거나 여러 가지 면에서 그야말로 완벽했다.
헌터들이 직접 뽑은 미인 순위 17위에 당당히 랭크된 이수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참패했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목소리까지 좋았다.
“어머, 어디 불편하세요?”
사려 깊고, 상냥하고,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한가득 담은 말.
패배감에 고개를 떨구고 있던 이수민이 흠칫 놀라 답했다.
“아뇨, 아뇨.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혹시나 우리 지현이 때문에 잠이라도 제대로 못 주무셨나 했거든요.”
‘우리 지현이, 우리 지현이라고······.’
“아아냐. 엄마 나 진짜 완전 조용히 있었어.”
“으이구, 퍽이나 그랬겠- 아하암.”
장난스럽게 유지현의 코를 움켜쥐다가 하품을 한다.
숨길 수 없는 약간의 피로감 같은 게 거기서 느껴졌다.
그리고······.
얼굴이 마치 백옥처럼 반질반질했다.
분명 피곤한 걸로 보이는데 얼굴은 환하게 빛난다는 이 모순적인 상황.
이수민은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보시지. 잠을 제대로 못 잔 건 오히려 그쪽 아닌가?’
“언니 저 갈게요. 바로 톡할게요!”
“으응. 잘 가······.”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이 들어왔다.
“괜찮으시면 저희랑 같이 가시겠어요? 이야기도 나눌 겸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
“응. 그것도 좋아. 언니도 가요!”
하지만 이수민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 있고 싶으니 모두 나가줬으면 싶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다음에, 다음에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유지현의 엄마가 휴대전화를 내민다.
“괜찮으시면 번호 알려주세요. 다음에 제가 꼭 먼저 연락드릴게요.”
“네······.”
마치 항복선언서에 도장을 찍는 것처럼 이수민이 꾹꾹 번호를 입력했다.
“다음에 봬요! 우리 딸. 우리 지현이. 이뻐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네······. 안녕히 가세요······.”
“언니 안녀엉!”
마침내 문이 닫혔다.
이수민은 지친 걸음으로 다시 침실로 향했다.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열정적으로 쿠데타를 준비 중에 있다가 격의 차이를 알아버린 듯한 이 패배감. 부끄러움.
세상에는 어떠한 의도도 없이 상대방의 전의를 꺾을 수 있는 사람도 존재했다.
생각이 이어짐과 함께 허공에 뜬 이수민의 발이 마구잡이로 춤을 췄다.
그러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저예요. 최대한 빨리 던전 하나 잡아주세요. A랭크요. 네. 저 혼자 들어갈 거예요. 데려가긴 누굴 데려가요. 아,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요오! 네? 왜 없어요, 왜애. 그러면 두 시간 안으로 잡아주세요. ······뭐요? 평소에는 기를 쓰고 일 안 하려고 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냐고요? 그거야 제 마음이죠! 저도 생각만큼은 뭐든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는 거 아녜요? 아무튼 빨리 잡아줘요!”
전화를 끊고 거친 동작으로 휴대전화를 뺨에서 떼어냈다.
“······.”
왠지 모르게 휴대전화 윗부분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닦아내어서 혀에 대어봤다. 슬픈 맛이 났다.
이수민은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천마신교 교주 직속 호위대. 통칭 사마군 四魔君.
그들 중에서도 가장 현명하고, 가장 강하며, 가장 월등하게 머리숱이 없는 남자 혁련휘가 말했다.
“교주님은 분명히 살아계신다.”
“거 다들 아는 걸 왜 굳이 말하고 그럽니까. 살아계신데 못 찾는 게 문제죠.”
귀를 후비적대며 미남자가 대답했다.
사마군 서열 세 번째인 진태호였다.
시원스런 이목구비의 미인.
사마군 서열 두 번째의 곡비령이 타박을 줬다.
“누가 들으면 제놈은 무슨 대단한 묘수라도 있는 줄 알겠네. 셋째야. 밥만 축내고 네가 할 줄 아는 게 대체 뭐니?”
“내가 왜 셋째냐? 네가 셋째잖아.”
진태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받았다. 곡비령이 기가 막힌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버릇없는 놈이 누나한테 말버릇하고는······.”
“그리고 마법 겉핧기로 배운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인데 왜 나보고만 그러냐? 당장 유화가 통역마법 안 써주면 우리가 뭘 할 수 있냐고.”
“뭘하긴요. 세 분 다 개방 거지마냥 동냥밖에 못하겠죠.”
얌전해 보이지만 할 말은 다 하는 사마군의 막내 천유화가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곡비령과 진태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인정하는 바다.”
“이놈들이 정말······.”
언제나 그랬듯이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동생들을 훑은 혁련휘가 다시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곳은 무림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든,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든 더 이상 우리가 알던 강호무림은 없다. 하지만 교주님이 이곳에 계신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
“그래서요?”
혁련휘가 재차 말했다.
“교주님도 성화의 폭발에 휩쓸려 이곳으로 오신 것이겠지.”
“연결이 끊긴 이유는 모르겠지만 원인은 성화가 맞겠죠.”
“그래.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혁련휘가 두 손가락을 편 후에 우선 하나를 접었다.
“우선 교주님이 어떠한 충격으로 인해 기억과 힘을 잃으셨을 경우. 이건 문제될 게 없다. 온 천하를 뒤져서라도 그분을 찾으면 되는 일이지. 문제는 두 번째다.”
“이거 말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무게 잡은 거죠? 정곡이죠? 크악!”
혁련휘가 날린 지풍에 얻어맞은 진태호가 비명을 질렀다.
담담한 어조로 혁련휘가 말을 이었다.
“만약 그분의 신변에 이상이 없다 해도 이제는 평온한 삶을 사시려 마음먹으신 것이라면?”
“그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우리 착한 운혜가 마음고생한 걸 생각하면······.”
진태호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자 천유화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이쯤에서 제가 막내로서 제안합니다. 오랜만에 그거 해요. 그거!”
곡비령이 머뭇거리며 제지하려고 나섰다.
“어- 또 해······?”
하지만 생글거리는 천유화의 얼굴이 너무도 단호했다.
나머지 두 사람도 곡비령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배신자로 몰릴 것 같았기에 곡비령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유화가 재차 말했다.
“그러면 오늘은 비령 언니가 선창해요. 하나, 둘, 셋, 하고요.”
“······내가?”
“왜요? 하기 싫어요? 흐음. 언니 혹시······.”
천유화의 눈매가 좁혀졌다.
배신자가 되기 싫었던 곡비령은 결국 굴복했다.
“알겠어. 내가 할게······.”
양심의 가책을 어렵사리 이겨내면서 곡비령이 오른손을 위로 뻗었다.
그리고 주춤주춤 외쳤다.
“그러면 한다? 하나. 두울, 셋! 지, 진천구운!”
나머지 셋의 힘찬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개새끼!”
이윽고 모두 함께 박수를 쳤다.
오직 곡비령만이 누가 볼까 무서운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왜요? 다 자업자득인데.”
천유화가 냉소적으로 한 말을 진태호가 받았다.
“우리가 언제 진천군한테 충성이라도 바쳤나? 맞으면 아프니까 참은 거지. 그놈도 말했잖아. 우리는 신교도 진천군 그놈도 아닌 오로지 운혜만을 위해 살라고. 사실 그 말도 웃기지. 본인이나 잘할 것이지 말이야.”
진태호가 분통 터지는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도 생각나네. 운혜 복숭아 먹고 운 거. 걔는 그게 너무 맛있어서 운 건지도 몰랐다니까? 유화야. 왜 그런지 알지?”
“먹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내가 진천군 그 새끼한테 말했잖아.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하고. 아주 당당하게.”
“그때 나도 있었잖아. 너 그런 식으로 말 안 했는데?”
곡비령이 진실을 이야기하자 진태호가 흠칫했다.
“아무튼 내 마음은 그랬다는 말이지. 교주로서의 마음가짐? 아이가 자라는 데 필요한 영양을 정성 들여 챙기고 있다고? 그럼 뭐하냐고. 맛이 없잖아, 맛이! 그런데도 운혜 그 기집애는 정에 굶주려서 그저 사부님이라고.”
“두부를 삼매진화로 구워놓고 운혜가 좋아하겠지? 라고 하던 건 나 역시 분통이 터지긴 했지······.”
“그렇게 맛있으면 본인이나 많이 처먹을 것이지 말이에요.”
각각 혁련휘와 천유화가 한 말이었다.
그렇게 십여 분 동안 성토의 장이 이어졌다.
이대로라면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아 혁련휘가 상황을 정리했다.
“우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인다. 첫 번째는 교주님을 찾는 것. 그분의 의중을 모르는 상황이니 신속하게 행동하되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분을 다시 뵈었을 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할 것.”
두 번째는 계획이 있었고 첫 번째는 지금 당장이라도 실행 가능했다.
필요한 물건들은 이미 준비해 두었다.
혁련휘가 눈짓하자 곽태호가 흰 종이뭉치를 주섬주섬 꺼냈다.
곡비령도 몰래 훔쳐온 벼루와 먹을 탁자에 올렸다.
그리고 세 사람이 동시에 천유화를 바라봤다.
천유화가 썩은 동태눈을 하고 중얼거렸다.
“식충이들······.”
곧 눈부신 빛이 공간을 덮었다.
***
“으으. 덥다, 더워.”
원래 8월이란 게 여름의 끝 아닌가?
지금은 그중에서도 31일. 마지막 날이다.
그런데도 더웠다. 밤인데도 더웠다.
학생들 방학 마지막 날이라 그런가 공원 여기저기에 돗자리 펴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긴 하다. 내일이 지현이 개학날이라 애 엄마랑 셋이서 같이 나온 나도 마찬가지였고.
애 엄마랑 지현이는 먹을 거 사러 갔고 나 혼자 앉아서 돗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괜히 심심해서 언령처럼 읊조렸다.
“죽어라, 사계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흐음, 무적신공을 대성하면 좀 다르려나?
요즘 이래저래 쓸 일이 많았어서 그런지 슬슬 고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올라가면 뭐가 있을지 궁금해서 가보고 싶기는 한데······.
막상 가보면 저승 입구일지도 모르잖아.
나는 죽어도, 절대로 등선은 안 할 거니까.
그건 스스로 용납 못한다.
아무튼 오랜만에 셋이서 나들이 나오니 기분이 상쾌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몇 개월을 오늘로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근데 쟤네는 뭐지? 잡상인인가?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공원 입구 쪽에서 남녀 두 사람이 종이 같은 걸 보여주고 있었다.
다들 손사래를 치는데도 한사코 들이밀다가 거절당하고, 다시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길 반복하고 있었다.
얼마나 맛없는 걸 팔길래 저러지?
한 번 가볼까 궁금했는데 돗자리를 지켜야 해서 가만히 있었다.
잡상인들은 오 분쯤 더 있다가 공원을 떠났다.
많이 파세요.
눈을 살짝 감고 그들의 장사가 번창하길 기도했다.
그때쯤 지현이와 애 엄마가 돌아왔다.
“아빠, 사 왔어!”
애 엄마는 맥주와 음료수 같은 게 들어 있는 봉지, 지현이 손에는 사각형의 박스가 들려 있었다.
“맛있는 거 사 왔어?”
“히히. 치킨!”
······치킨이라.
나는 어제 많이 먹었는데.
두 박스를 나 혼자 먹었더니 이젠 조금 물렸다.
애 엄마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속삭인다.
‘오빠만 먹고 나는 못 먹었잖아? 지현이도.’
그러면서 봉투에서 뭔가를 꺼낸다.
마실 것만 들어 있던 게 아니었네. 이건 나 먹으라고 사온 건가 보다.
역시 우리 와이프가 최고지.
먹을 것들을 보기 좋게 펼쳐두고 셋이서 건배했다.
지현이는 펩시.
애 엄마와 나는 맥주.
한 모금 가득 들이킨 후에 지현이에게 물었다.
“우리 딸 이제 2학기잖아?”
“응.”
“2학기 때 하고 싶은 거 있어?”
지현이가 슬쩍 눈을 피했다.
뭔가 생각하는 게 있는 모양인데 말해주기 싫은가 보다.
뭐 어때. 머리 아픈 일은 다 끝났는데.
그때 애 엄마가 말했다.
“하고 싶은 건 몰라도 해야 할 건 하나 있지?”
지현이와 내가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애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개학하고 수학학원 다녀야지. 알아보니까 괜찮은 데 있더라. 월수금 세 번이야.”
“으응? 어, 엄마. 수학은 있잖아! 혼자 힘으로 생각하는 게 중요하대. 나, 나 혼자 할 수 있어!”
“안 돼.”
“히잉······.”
지현이가 울상을 지었다.
애 엄마가 달래듯이 말했다.
“만약에 우리 딸 공부 열심히 하면 엄마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뭐를?”
“딸 소설 쓰는 거.”
지현이의 눈동자가 복잡하게 움직였다.
엄마가 도와만 준다면 컨택도, 유료 연재도 가능해······.
그런 헛된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결국 지현이가 말했다.
“응. 그 대신 확실하게 도와줘야 돼?”
“당연하지.”
“딸? 그러면 이제 아빠 도움은 필요없어······?”
왠지 소외된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지금껏 열과 성을 다한 내 노고를-
“응. 아빠는 이제 괜찮아. 고생했어. 쉬어도 돼. 엄마, 엄마만 있으면······. 흐, 흐흐······.”
지현이가 실실거렸다.
애 엄마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게 행복했다.
***
“여기는 안 되겠어. 다들 정신없어서 본 척도 안 하잖아.”
“기세 끌어올려서 집중시키면 안 되나?”
진태호의 말에 곡비령이 핀잔을 줬다.
“아까 오라버니 말씀 못 들었어? 찾는 건 열심히 찾되 소란 피우면 안 된다니까?”
“끄응······.”
진태호가 답답한 지 침음성을 흘렸다.
속이 타는 건 곡비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제안했다.
“안 되겠어. 사람 더 많은 곳으로 가보자.”
“여기보다? 그런 데가 있나?”
곡비령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까 보니까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오가는 곳이 있더라? 거기서 찾는 게 좀 더 가능성이 높을 거야. 저기 보이네.”
곡비령이 가리킨 곳은 커다란 문이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저길 뭐라고 한다고 했더라? ‘지하철역’이라고 했나?”
“특이한 이름이군.”
“아무튼 저기로 가보자.”
두 사람은 최선을 다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봤고, 들고 있던 종이를 나눠주었다.
하지만 신통치 않았다.
받아가는 사람도 많이 없었고 받았다 해도 곧 버려지기 일쑤였다.
종이에 그려진 아름다운 여인.
천마신교 7대 교주 설운혜의 초상화.
종이 상단에는 삐뚤빼뚤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람을 찾습니다’
허나 불행하게도, 천마 설운혜의 초상화를 보고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지 않았고, 그들의 노력은 무용하게 계속되었다.
여름이 완전히 가고 마침내 가을이 찾아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