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46화 (46/130)

46. 나는 실물파니까.

핑크색의 아기자기한 파자마를 입은 이수민이 현관문 앞을 어지럽게 서성였다.

오늘 낮에 그 사단을 겪고, 유지현에게 ‘혼자 있고 싶다’ 라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져 집에 틀어박힌지 몇 시간째.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뒤척거리는 와중에 유지현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지금 사부님 집에 가도 돼요?>

이수민은 곧바로 전화를 걸어 승낙의 뜻을 전했다.

그 전까지의 우울함이 싹 가시는 걸 느끼면서 이수민은 정성들여 집을 치우고 유지현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문을 열어둘까?’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직접 비밀번호를 입력해서 도어락을 열고 들어오는 걸 보고 싶었다.

뭐랄까······.

‘당연히 와야 할 곳에 온다’ 라는 느낌을 받으려는 의도였다.

해서 이수민은 애써 마음을 억누르고 벌써 십 분째 현관문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손에는 유지현에게 입히려고 마련해둔, 핑크색 커플 파자마가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수민의 예민한 청각에 익숙한 소리가 잡혔다.

띵, 하고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였다.

‘왔다!’

이수민은 더욱 기감을 집중했다.

‘여기가 맞나······? 으음, 비밀번호가······.’

비밀번호를 하나씩 입력하는 소리.

마침내 문이 열렸다.

이수민은 세 번이나 연습해 둔 어조로 말했다.

“지현아! 왔어?”

“아, 언니!”

문 열고 들어오는 걸 봤으니 이제 됐다.

현관문으로 달려가 유지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는 데 덥지는 않았어?”

“으으응. 괜찮았어요.”

준비해 둔 파자마로 갈아입히고, 샐러드와 생과일 주스를 내온 후에 이수민이 안부인사처럼 물었다.

“우리 지현이, 오늘은 자고 갈 거지? 너무 늦게 집에 가면 아버님 걱정하실 건데 내일 언니가 데려다줄게. 아버님한테는 언니가 연락드릴까?”

“응. 나 오늘 자고 가야 해요!”

이수민의 머릿속으로 미약한 의문이 스쳤다.

말의 늬앙스가 조금 이해가 안 됐다.

자고 가고 싶다, 라는 게 아니라 자고 가야 한다니.

이수민이 웃으며 물었다.

“왜? 언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음, 그것도 있고요. 그리고······, 방해하면 안 되거든요.”

그리고 이수민은 충격적인 한 마디를 듣게 된다.

“오늘 엄마 와서요!”

엄마, 엄마라······.

거기에 다른 뜻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던 유지현의 엄마.

신작 소설 쓰는 것 때문에 따로 떨어져 살고 있다고 유지현은 말했었지만 이수민은 그 말에서 선명한 불안감과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나? 라는 생각도 했다.

한데 만면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제자를 보자니 그건 이수민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갈등이란 게 있었지만 지금은 해결이 되었던지.

‘아······.’

이수민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침음성을 흘리다가, 스스로에게 화들짝 놀랐다.

‘내가 왜······?’

그러한 내적갈등도 모른 채 유지현이 도란도란 말을 이었다.

“아까 집에 들어가 보니까 와 있었어요. 그리구 나도 눈치란 게 있으니까. 히히.”

이수민이 기계적으로 손뼉을 쳤다.

“와아, 잘 됐네. 그런데 지현아.”

“네?”

“어머니 사진 저번에 보여줬잖아. 되게 미인이시던데 한 번만 더 보고 싶은데 괜찮아?”

“응! 잠시만요?”

유지현이 자랑스럽게 보여준 몇 장의 사진을 이수민은 심도 있게 분석해 나갔다.

유지현과 둘이서 나란히 찍은 셀카.

유수현까지 가족 세 명이 함께 담긴 전신사진.

서재에서 글을 쓰는 걸 유지현이 찍은 사진까지.

모든 안력을 집중해 바라봤다.

그리고 확신에 차 결론내렸다.

‘포샵이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포토샵으로 떡칠을 했다.

영혼을 담아 깎아낸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저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내 눈은 못 속인다.

포샵이거나, 성형이거나.

혹은 둘 다일 것이다.

그래도 사진 고치는 재주만은 인정할 만했다.

SNS 상에서 수백만 팔로워를 자랑하는 이수민 자신보다도 사진 기술로는 위일지도 몰랐다.

‘흥, 그래봐야 사진은 사진이지. 왜냐하면 나는 실물파니까.’

사진 같은 걸로 비교하는 건 불합리했다.

왜곡된 논리구조를 통해 정신적으로 승리를 거둔 이수민이 말했다.

“그러면 또 언제 가셔?”

“으으응. 이제 일 다 끝났대요. 옛날처럼 셋이 같이 산다구 했어요!”

“아아, 그렇구나······.”

스스로도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수민은 도저히 경계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인 유수현도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 아빠는 좋다 이거야.

충분히 허용범위 안이다. 처음에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인정할 수 있다.

꽤나······, 아니.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엄마라는 건 뭐랄까, 이수민이 느끼기에는 완벽하게 자신의 상위호환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이수민이 있을 곳을 하나 남김없이 빼앗아버리는 듯한······.

“언니? 사부님······?”

고민에 빠져 있던 이수민을 현실로 데려온 건 의아해 하는 유지현의 목소리였다.

이수민은 자책했다.

‘내가 지현이를 앞에 두고 대체 무슨 생각을······.’

오늘 밤을 즐겁게 보내는 데도 시간이 모자랄 터이다.

일단 복잡한 건 내려놓고, 이수민은 지금을 즐기기로 했다.

“지현아, 언니가 있잖아. 우리 지현이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데요?”

“잠깐만 기다려봐?”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미리 꺼내둔 조각상 두 점.

전생의 자신인 진천군과 전생의 제자인 설운혜를 조각해 도색까지 마친, 한 마디로 말해서 피규어.

이수민은 양손에 피규어를 하나씩 들었다. 손을 뒤로 숨기고 유지현 쪽으로 다시 왔다.

유지현이 의문과 기대감을 가지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심장이 요동치는 걸 느끼면서 이수민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짠! 이거 봐라? 이게 뭐어게?”

유지현도 곧장 알아봤다.

놀라면서 말했다.

“와, 이거······.”

뿌듯한 마음으로 이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현이랑 언니! 잘 만들었지?”

유지현이 신기한 듯이 피규어를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와, 진짜 같아요······.”

“응. 언니가 지현이 보고 싶어서······. 그래서 만든 거야······.”

불현듯 유지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수민은 이미 아까 전부터 눈동자가 시뻘개져 있었다.

“흐윽, 흑. 사부님!”

“운혜야!”

눈뜨고 볼 수 없는 감동적인 해후의 시간이 펼쳐졌다.

서로 끌어안고 한바탕 신파극을 펼치다가 이수민이 유지현에게 말했다.

“언니 집이 보면 알겠지만 혼자 살기는 너무 크거든. 우리 지현이 자주 와주면 너무 좋을 것 같은데······.”

“응. 자주 올게요!”

역시 피규어의 힘은 위대했다.

거기 담긴 사랑을 제자도 알아본 게 틀림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방’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사실은 유지현이 오기 전에 방문까지 잠가뒀다.

미리 대비도 해뒀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수민은 유지현에게 집안 이곳저곳을 소개해 줬다.

“여기가 언니 잠 자는 방. 저쪽 방은 옷방인데 언니 어릴 때 입던 옷도 있거든. 지현이한테 맞는 옷 있으면 다 가져가도 돼.”

그렇게 물량공세를 펼치던 와중에, 유지현이 궁금해 하며 물었다.

“그런데 저 방은 무슨 방이에요?”

유지현이 가리킨 곳은 가장 안쪽의 방이었다.

지금은 열쇠로 잠가둔, 제자에 대한 사랑이 집결된 방.

물론 이수민은 자신의 제자에 대한 사랑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린 제자에게 있어서는······, 조금은 무겁게 느껴질지도 모르니까.

그래. 저 방을 봉인한 것에 그 이상의 이유는 없다.

이수민은 상냥한 어조로, 하지만 확실히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아, 저기는 뭐라고 해야 하나······. 약간 언니 혼자 쓰는 개인적인 공간이라서······. 지현이 다른 데는 다 들어가도 되는데 저기는 금지! 알겠지?”

“알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유지현은 들어가지 말라니까 들어가지 말아야겠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그렇지만, 문득 시선이 갔다.

왠지 저 방에서 귀기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것 같-

“침실에 티비 엄청 크니까, 오늘은 언니랑 영화 보다가 같이 잘까?”

“무슨 영화요?”

이어지는 정겨운 대화에 유지현의 머릿속에서 그런 의문도 어느새 사라져 갔다······.

***

일어나 보니 애 엄마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이쪽을 돌려 말해 왔다.

어째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

“오빠, 깼어? 좀 더 자지.”

“아냐, 일어나야지.”

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그래봐야 다섯 시간도 못 잤네.

비척거리면서 일어나려고 매트리스에 손을 짚었는데 뭔가 감촉이 이상했다.

이미 매트리스로서의 수명을 다해버렸달까.

새하얗게 불태워버린 것처럼 생명력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새로 하나 사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부엌으로 향했다.

어제 잠깐 휴식 시간에 시켜두고는 결국 한 입도 못 먹은 자메이카 통닭이 식탁에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자메이카. 어제는 내가 너무 바빴어.

다리를 하나 집어 들고는 한 입 뜯었다.

우적우적 씹어서 삼켰다.

어서 와라, 고기.

몸이 강력하게 고기를 원하고 있었다.

어느새 화장을 다 끝냈는지 애 엄마가 외출옷을 두 개 들고 내 옆으로 와 물었다.

“오빠, 둘 중에 어느 게 이뻐보여?”

여기서 그냥 둘 다 이쁘다고 하면 안 된다.

“왼쪽은 청순한 데다 기품이 있고, 오른쪽은 화사한 매력이 느껴지는데?”

“그래? 그러면······, 오늘은 왼쪽이 좋겠네?”

애 엄마가 그렇게 말하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는 왼쪽 옷.

그러니까, 푸른빛이 감도는 원피스 차림이었다.

“오늘 어디 가?”

외출 약속은 없는 걸로 아는데.

애 엄마가 태연하게 답했다.

“조금 있으면 오후잖아? 지현이 데리러 가야지."

“그거만?"

“나간 김에 지현이랑 쇼핑도 하고 밖에서 외식도 하고 오긴 할 건데, 일단 제일 큰 목적은 데리러 가는 게 맞지?”

솔직히 이해는 안 갔지만 내가 이해하고 말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나도 같이 갈까?”

“음······, 아냐. 오늘은 지현이랑 둘이서 데이트나 하게.”

“알겠어. 그러면 다녀오고, 저녁에 괜찮으면 한강에 돗자리 깔고 나들이나 갈까?”

“으으응. 오빠 오늘 피곤할 텐데 내일 가. 모레 지현이 개학하니까.”

애 엄마가 내 뺨에 입을 맞추고 현관을 나섰다.

두 개째의 자메이카 통닭을 집어들면서 생각했다.

천군아······, 진짜로 미안하다······.

***

차수희는 생각했다.

노리고 있던 사냥감을 처리하는 일은 언제나 두근거리는 법이라고.

‘요즘은 이런 일도 많이 줄었는데 말이야······.’

돌이켜보면 사냥꾼으로서의 자신의 최전성기는 열아홉 살 때였다.

그러니까 유수현이 대학교에 막 입학했던 시기.

그때는 수능 공부보다도 오히려 그쪽에 더 힘을 썼었다.

남편이야 자신이 스무 살 이전까지는 마냥 착하고, 밝고, 상냥했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건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딸을 임신하기 전이든 그 이후이든.

그녀는 원래 이랬다. 적어도 유수현에 관한 일에서는 언제나.

‘이수민 씨는 어떠려나······?’

이야기 들어보면 별로 주의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오랜만에 지현이와 데이트하기 전의 가벼운 여흥 정도는 되지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여유롭게 차를 몰아가다가, 차수희의 시야에 특이한 무언가가 잡혔다.

‘저 사람들 뭐야?’

어디서 연극 같은 걸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지만, 꼭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굉장히 특이한 옷차림이었다.

게다가 횡단보도가 파란불도 아닌데 당당하게 도로를 건너고 있었다.

통행량이 없는 곳이긴 해도 저건 좀······.

그들이 위풍당당하게 도로를 건너는 걸 잠깐 쳐다보다가 차수희는 다시 목적지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이십여 분 후, 고급스러운 아파트 현관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두어 번 소리가 울리고,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지현이였다.

“엄마!”

“딸, 잘 잤어?”

“응. 일찍 왔네?”

“우리 딸 보고 싶어서 빨리 왔지이.”

“히히, 나도.”

정겨운 대화를 나누면서 차수희는 현관 문 안을 곁눈질했다.

키가 크고 일견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젊은 여성이 주춤주춤하면서도 왠지 결연한 자세로 서 있었다.

차수희가 먼저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지현이 엄마되는 사람이에요.”

“아, 네-”

“참, 우리 딸이 폐 끼치지는 않았나 모르겠어요. 제가 죄송해서······.”

“폐 안 끼쳤어! 언니랑 나랑 얼마나 친한데!”

“네. 지현이랑 있어서 저도 좋았······.”

차수희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맥이 탁 빠졌다.

차수희는 저런 부류를 잘 안다.

이미 몇 명 본 적이 있으니까.

그리고 차수희의 분류 기준에서 이수민은······.

‘레벨 1이네. 시시해라.’

총 다섯 단계의 경계 기준에서 가장 낮은 단계.

가만히 놔둬도 아무것도 못할 수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였다.

***

충격 속에서, 자칭 실물파 이수민이 생각했다.

‘정정당당하게 사진빨로 승부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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