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나 먼저 씻고 올게?
불꽃 속에서 조금 전의 외침과는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운혜? 너 미쳤구나? 소교주 님이 네 친구야?”
“친구라고? 물론 친구가 아니지. 우리는······.”
잠깐 멈추었던 말이 한껏 무게를 잡고 이어졌다.
“우리는 ‘가족’이다.”
“와, 웬일로 멋진 말을 하시네요.”
“이 화상들아! 신교의 법도에 맞게 소교주 님이라고 제대로-”
“······너희 셋 다 틀렸다.”
“저 둘은 그렇다고 치고 나는 왜요?”
“소교주가 아니라 교주님이시지. 이 못난 놈들. 비좁으니까 나가기나 하자.”
이윽고 불꽃 속에서 네 명의 남녀가 걸어나왔다.
선두에 선 남자는 덩치가 태산만 했고 대머리였다. 가로수 조명에 비친 머리통이 반질반질했다.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미남자가 두 번째.
각각 체구가 작고 큰 여성 둘이 그 뒤를 따랐다.
연원을 알 수 없는 특이한 복색을 한 그들 넷은 위풍당당하게 대지에 내려섰고,
곧 주위를 둘러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야?”
“우리 제대로 온 거 맞아? 유화야. 우리 새로운 신녀님. 이거 어떻게 된 거냐?”
미남자가 물었다.
피부가 희고 체구가 가녀린 여자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연결을 더듬어 온 거라서 맞긴 할 텐데 그게 끊긴 연결이라서······.”
“확실한 건 아니다?”
“네······.”
완전히 맥이 빠져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정파의 위선자들을 모조리 처죽이려고 신처럼 강해져서 왕처럼 귀환했는데.
“그럼 운혜는? 우리 어린 교주님은 어떻게 된 거냐고.”
“너만 걱정되는 거 아니니까 따지듯이 묻지 마.”
비교적 키가 큰, 이목구비가 시원스런 미인이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녀도 적잖이 동요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입에서 울컥 피를 뿜던 설운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성화의 폭주에 휩쓸려 맞이한 세계.
마법이라는 신비가 존재하는 그곳에서 그들 네 사람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손에 넣었다.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되었고, 황제가 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설운혜의 그 처연했던 얼굴이 눈에 밟혀 사라지지가 않았다.
그녀만이 아니라 그들 네 사람. 교주 직속 호위 사마군 전원이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기존의 신녀였던 설운혜와 성화 사이의 연결이 끊겨 성화의 권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자마자 다급하게 돌아왔다.
지금껏 얻은 부귀와 영화는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아마도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상관없었다.
한데 이게 대체······.
대머리 남자가 좌중을 정리했다.
“틀리게 온 건 아닐 거다. 성화의 권능을 의심하지 마라. 우리가 먼저 얻어야 할 건 정보다.”
투박한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대머리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야 해.”
“그리고요?”
“당연한 걸 뭘 묻나. 교주님을 찾아야지. 연결이 끊기기 전까지 그분은 분명 살아계셨다. 그리고 연결이 끊겼다면 그건 자의에 의한 것이거나, 혹은 강압에 의한 것이겠지.”
대머리 남자의 말을 들으며 나머지 셋은 다시 의욕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의 몸 주변으로 감히 대항할 수조차 없을 투기가 흘러나왔다.
미남자가 가벼운 어조로, 하지만 무거운 의지로 물었다.
“자의에 의한 것이라면?”
“교주님을 찾는다. 복수를 원하신다면 그리 하고 신교천하를 원하신다면 그리 한다. 그분이 뜻하시는 모든 걸 이뤄낸다.”
“좋네요, 아주 좋아.”
이번에 말한 것은 키가 큰 미녀였다.
“만약에 말예요. 생각하기도 싫지만요. 혹시라도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 역시도 마찬가지겠지. 교주님을 찾는다. 그리고.”
그 다음 대머리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언령처럼 세상에 울려퍼졌다.
“교주님께 위해를 끼친 자들과 그와 관련된 모든 자들을 찾아내어서 모조리 죽인다.”
“난 형님 말에 찬성.”
“나도.”
“저는 반대예요.”
체구가 작은 여성이 그리 말하자 다들 놀라서 그녀를 응시했다.
천사처럼 해맑은 미소로 여성이 말했다.
“중간에 빠졌잖아요. ‘가장 고통스럽게’.”
“앗······.”
“역시 새로운 신녀님. 제가 오늘 개안을 하는군요.”
“그러면 그렇게 정한 것으로 하고 일단 가보자.”
그리고 잠시 후.
미남자가 길을 걷는 한 여성에게 다가갔다.
본인은 친절한 미소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을 띠고 말을 걸었다. 물론 중국말로.
“으흠. 실례이오만-”
중국말을 모르는 여자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저 남자친구 있어요.”
이내 쭉 뻗은 밤거리로 걸어간다.
이후 십 분 동안 세 번을 더 실패했다.
“······한 번만 더 해보죠.”
목표를 포착하고 다가가서 물었다.
“거기 소협. 내가 물어볼 게-”
“저 이슬람교 믿는데요.”
이쪽은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미남자는 다시 혼자 남았다.
“······뭐라고 한 거야?”
무슨 말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통역마법이라는 데에 사마군 모두가 동의했다.
***
손을 들어서 뺨을 꼬집어 봤다.
이게 무슨 일이지?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 나 보고만 그러는데? 나 잘못한 거 없어!”
“유지현. 너 엄마한테 그게······.”
애 엄마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비틀거린다.
눈가에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한 지현이가 그걸 보고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다.
그렇다.
햇수로만 십사 년만에 처음으로 지현이가 애 엄마한테 대들고 있었다.
“나도, 나도 열심히 하려고 했어. 근데 수학 어렵단 말야! 다들 학원에서 배워왔다고 교과서에도 안 나오는 거까지 나오고! 엄마처럼 맨날 전교 1등만 한 사람은 저얼대 모르겠지만.”
저 부분은 동의한다.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수희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내게 했던 말.
‘······오빠는 왜 이걸 모르는 거야?’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마음의 상처다.
“그리고 소설 쓰는 건 내 자유잖아? 허락도 안 받고 남의 쪽지 열어보고! 나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는 사람인데.”
그 프라이버시는 나도 침해했는데.
심지어 나는 몰래 로그인해서 본 거잖아.
괜히 찔려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충격을 받아 듣고만 있던 애 엄마가 반격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남? 유지현 지금 엄마 보고 남이라고 했니? 엄마가 남이야?”
“엄마가 나도 아니잖아. 그리고 헌터는 아빠도 하라고 했단 말야!”
이게 왜 불똥이 나한테 튀냐.
지현이가 눈물을 흩뿌리며 내게 와 안긴다.
“아빠아, 아빠가 말 좀 해줘. 엄마가 자꾸 나만 뭐라고 해······.”
반사적으로 지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걸 본 애 엄마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다.
“오······빠?”
둘 다 왜 나한테 그러냐니까······.
하지만 지현이가 계속 칭얼댄다.
“엄마 완전 독재자. 엄마도 소설 쓴다고 몇 달씩 나가 있고 연락도 잘 안 받았으면서.”
지현이 유치원 다닐 때쯤부터 애 엄마가 필명으로 책을 몇 권 냈는데 그게 벌이가 상당히 괜찮았다. 내 연봉보다 높을 때도 있었으니까.
그동안 집을 비운 것도 표면상으로는 새 소설을 쓰려고 취재하고, 작업실에서 혼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해두었는데······.
솔직히 지현이도 핑계인 걸 아는 마당에 저걸 역으로 써먹을 줄이야.
애 엄마가 주춤거리며 말했다.
“지현아. 그거는-”
“다른 사람들은 다 나보고 행복하게 살라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라고 한단 말야. 근데 엄마는 맨날 타박만 하구.”
이건 안 되겠네.
지현이도 오늘 워낙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그런 거겠지만 엄마한테 저러면 안 되지.
내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유지현.”
지현이가 나를 쳐다본다.
“당장 엄마한테 버릇없이 말해서 죄송하다고 해.”
내 말에 지현이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어떻게 아빠가?’라는 표정인데 왜, 뭐가 어때서.
내가 내 와이프 편 들어준다는데.
“······싫어. 나 잘못 안 했어.”
두려움에 떨면서도 지현이가 어렵사리 고개를 젓는다.
목소리를 더 엄하게 냈다.
“셋 셀 동안 잘못했다고 안 하면 아빠 진짜 화낼 거야. 하나, 둘-”
“오빠, 잠깐만. 잠깐 있어봐. 지현이랑 내가 다시 얘기를 해 보고.”
애 엄마가 서둘러 지현이 손을 붙잡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여유롭게 거실에서 기다렸다.
왜냐하면 모든 게 내 큰그림이었으니까.
강압적으로 나가면 애 엄마가 말릴 줄 알았다.
내가 이 집안의 모든 악을 뒤집어쓰고 애 엄마와 지현이는 화해하는 거지.
이 한 몸 바쳐서 가정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면야.
안방에서 둘이 속닥거리는 것 같은데 애 엄마가 무슨 수라도 썼는지 기감을 집중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안 들렸다.
삼십 분쯤 지나서야 지현이와 애 엄마가 같이 나왔다.
둘이 손 잡고 있는 걸 보니 일단 화해는 한 것 같고.
지현이가 내 쪽으로 왔다.
그런데 어째 입가가 움찔거리는 게 꼭 웃음을 참는 것 같다.
지현이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아빠, 잘못했어요.”
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
심지어 나까지 타박 안 듣는 전개라니.
아무튼 잘 된 일이니 나도 인자한 목소리로 답했다.
“딸, 아빠도 무섭게 말해서 미안해?”
“응. 괜찮아.”
애 엄마는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웃으며 지현이와 나를 보고 있다.
‘나 잘했지?’ 라는 뜻으로 눈을 찡긋했다.
마주 윙크가 돌아온다. 뿌듯했다.
이거지. 이게 가정이지.
한데 나와 애 엄마를 번갈아 쳐다보던 지현이가 갑자기 자기 방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왔을 때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게다가 현관 쪽으로 걸어간다.
“딸, 어디 가?”
“음······. 반성의 의미로 외박!”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반성이 왜 외박으로 연결되는지 모르겠다.
“딸, 친구 집 저녁에 갑자기 찾아가고 하면-”
“수민 언니 집 갈 건데? 비밀번호랑 다 가르쳐줬구, 말 안 하고 와도 된다고 했어.”
지현이가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물음을 눈에 담고 애 엄마를 바라봤다.
애 엄마는 아무 대답도 않았다.
게다가 입가에 띤 미소가 짙어진다.
이상하다.
뭔가, 뭔가 잘못되고 있어.
하지만 내 당황스러운 마음과는 상관없이 지현이는 벌써 신발까지 신고 나갈 준비를 다 끝마쳤다.
그리고 외친다.
“다녀오겠습니다! 내일 오후에 올 거야! 오후라고 분명히 말했다? 나 갈게!”
지현이가 문을 열고 나섰고, 문이 다시 닫혔다.
아까 폭풍 같은 싸움에서 왜 갑자기 가출 전개가 되는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하지만 지현이와 애 엄마는 확실하게 화해한 것 같으니 그건 잘 된 일이고.
그게 제일 중요한 거긴 한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왠지 모를 불안 속에서 내가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데 애 엄마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오빠.”
“응?”
“이수민이라는 사람.”
“왜? 걱정돼서 그래? 괜찮아. 당신이랑 나보다는 못해도 우리 지현이 많이 아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으응. 그건 지현이한테 이미 들었구.”
“그러면?”
뭐가 궁금한 거지?
전생에 관한 이야기도 다 했는데.
애 엄마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발랄하게 말했다.
“그 사람 있잖아······. 혹시 오빠랑도 친해?”
네? 이수민이랑 제가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친하긴. 당신도 들었잖아. 내가 걔랑 전생에 철천지원수였다니까? 안 친해. 하나도 안 친해.”
“으으응. 전생 말구. 지금 친하냐구.”
애 엄마 어조는 그대로인데 어째 말이 이어질수록 듣는 내 몸이 추워진다.
“내 남편이자 지현이 아빠인 유수현이 스물여섯 살 미혼 여성인 이수민 씨랑 친한가. 그걸 물어본 거지.”
나는 생각했다.
여기서 대답 잘못하면 좆된다고.
너무 과하게 부정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부정을 안 하는 것도 안 된다.
마치 자연의 이치와도 같이.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처럼 당연하게.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부정해야 한다.
“글쎄? 워낙 지현이 이뻐하니까 몇 번 얼굴 본 적은 있는데 딱히 친하진 않지? 걔 전생도 전생이고 난 좀 꺼려지더라구.”
“흐응······. 그래?”
애 엄마의 시선이 내 얼굴에 와닿는다.
흡사 벌거벗은 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지만 애 엄마한테 딱 하나 숨긴 게 있었다,
이수민 카드로 호텔 방 잡은 것.
도저히 그것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고······.
괜찮아. 아무 문제 없다.
내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절대로 밝혀질 리 없는 사실이다.
“······.”
마침내 애 엄마가 내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가볍게 말했다.
“내일 지현이 내가 데리러 갈게.”
“데리러?”
“응. 그 이수민 씨한테 고맙다고 인사도 할 겸 내가 가지 뭐.”
천군아······, 미안하다.
뭐가 미안한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미안하다.
속마음을 감추고 태연하게 답했다.
“그렇게 해. 지현이랑 맛있는 거라도 먹고 와.”
“알겠어. 그러면······. 나 먼저 씻고 올게?”
애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서 쇼파에서 일어섰다.
뭔가,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나온 것 같아서 되물었다.
“씻고 온다고?”
애 엄마가 웃으며 답했다.
“응, 씻고 와야지.”
“······왜?”
“그럼 안 씻어?”
애 엄마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애 엄마가 흐흥,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로 걸어간다.
그리고 욕실 문 앞에서 다시 한 번 말을 건넸다.
“나 씻는 동안 오빠는 그거 하고 있는 게 어때? 운기조식이라고 하나? 그런 거 있잖아.”
“······운기조식은 왜?”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 거다. 다른 뜻은 없다.
그러자 흐응, 하고 애 엄마가 콧소리를 냈다.
“글쎄?”
그리고 지긋이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필요할 것 같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애 엄마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욕실 문이 닫히고, 곧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기조식을 하기에 앞서 휴대전화를 켰다.
게시판에 글을 하나 남기고 싶었다.
제목은······.
그래. 이걸로 해야겠다.
<니들은 결혼 같은 거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