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44화 (44/130)

44. 말투 진짜 시끄럽네.

***

한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내 이야기가 끝났다.

때로는 놀라고, 때로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종종 웃음도 보이면서 애 엄마는 차분히 들어줬다.

그리고 처음 한 말이 이거였다.

“미안해.”

“뭐가?”

“그냥 전부 다. 오빠도 많이 노력했는데. 지현이 제대로 돌보지도 못한 내가 뭐한 게 있다고 괜히 화냈나 싶어서.”

이때 넙죽 알겠다고 접수해 버리면 안 된다.

한 번 정도 겸손의 미덕이 필요한 시점이다.

“말 안 한 건 내 잘못 맞잖아. 그리고 당신 집에 자주 없었던 건 누구 잘못도 아니고. 자책하지 말라고 내가 말했지?”

“응. 근데 있잖아. 오빠 얘기 듣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살짝 드는 감은 있어.”

드디어 왔다.

애 엄마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본론은 이거지.

긴장하고 물었다.

“무슨 생각?”

“그냥 처음부터 지현이한테 솔직하게 털어놓고, 일주일 정도 냉전상태로 지내다가 맛있는 거 시켜주고 화해했으면 이 지경까지 올 일이 없지 않았을까?”

애 엄마가 이해가 안 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현이 아무리 화나도 배달음식 세 개 동시에 시켜주면 화 풀리잖아. 왜 그거부터 안 해 본 거야?”

앗, 안 돼.

그건 말하면 안 되는 부분이라고.

내가 떠듬떠듬 변명했다.

“그거는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되나. 피치 못할 사정 같은 거라서. 억지력? 아무튼 그렇게 해 버리면 이야기가 시작이 안 된단 말야······.”

“무슨 말하는 거야, 진짜.”

애 엄마가 꺄르르 웃었다.

그래도, 그렇게 해서 되면 좋지만 잘 안 풀리면 큰일 나는 거니까.

그때 나에게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지현이 주위에 이상한 일 생기는 건 어쨌든 없애야 했고. 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불쌍한 척을 하니까 애 엄마가 내 어깨를 토닥여줬다.

“응, 오빠. 완전 애썼어. 멋있어, 최고야.”

“나 힘들었어, 진짜로······.”

나도 모르게 그동안 고생했던 것들을 애 엄마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다.

조금 전까지 팩트를 중심으로 서술한 역사서였다면 지금 넋두리는 그래. 이른바 야사 같은 거였다.

다행히 성실한 독자인 애 엄마는 내 푸념을 모두 받아줬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성화란 거 말야.”

“응.”

“그건 도대체 정체가 뭐야? 아무리 알기 힘들게 숨어 있었다고 쳐도, 어떻게 오빠도 모르고 나도 모를 수가······.”

“나도 잘 모르는데 아무튼 어마어마했다니까. 그래도 이제 없어졌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성화가 폭발해서 차원이동을 했는지 아니면 펑, 하고 터져버렸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

그 빌어먹을 불덩어리와 지현이 사이에 이제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이어지던 대화가 잠시 끊겼다.

내가 털어놓을 이야기는 끝났고 이제는 애 엄마 차례다.

나는 아무 말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내가 먼저 재촉하고 싶지는 않았다. 애 엄마 마음이 다칠지도 모르니까.

입술을 깨물고 잠시 망설이던 애 엄마가 손을 뻗었다.

내 손 위에 얹는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라고 갈구하는 듯한 눈빛이 마음 아팠다.

마침내 애 엄마가 입을 열었다.

“우선 보고해야 될 게 있어. 그쪽에는 특별한 일 없으면 더 안 가도 될 것 같아. 얻을 건 다 얻었거든.”

안도감이 들었다. 속마음 그대로 말했다.

“응. 정말로 잘 됐다.”

애 엄마가 무사히 돌아온 게 기뻤다.

“똘똘한 애들 몇이 자기들끼리 나라를 세우니 마니 하던데 적당히 알아서 하라고, 뭘하든 상관 안 한다고 말하고 왔어. 사실 오빠랑 나한테는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

“내가 정말로 차수희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지.”

나한텐 그게 제일 중요해.

애 엄마가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게 속삭였다.

***

수희와 나는 소꿉친구였다.

내가 한 살 많았다.

우리는 항상 함께 했다.

유치원도 손잡고 같이 가고, 수희가 초등학교 입학하고는 고작 한 살 차이인 주제에 학교를 안내해준다고 까불거렸다.

중학교 때 내가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수희는 학교 마치고 우리 집에 와서 내 공부를 봐줬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매일.

항상 전교 일등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고작 한 살 차이에 공부 담 쌓은 나 정도는 손쉽게 가르쳐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알고부터 언제나 함께였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수희는 나를 많이 좋아했다.

나도 수희를 많이 좋아했다.

전생을 깨닫고 나서도 수희에 대한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수희에게 그 말을 듣게 됐다.

‘오빠, 나 임신한 것 같은데······?’

나는 기뻤다.

현실적으로 난관이야 있겠지만 수희와 내 아이여서 기뻤다.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식도 올리고.

뒤늦게 철이 들어서 직장 잡으려고 노력도 했다.

우리 딸 지현이가 커가는 모습에 수희와 나는 울고, 웃고, 행복했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술김에 내가 진실을 털어놓기 전까지는 그랬다.

‘수희야.’

‘응?’

‘나 사실 고백할 게 하나 있는데-’

‘게임 샀어? 저번 달에 안 샀으니까 두 개까지는 괜찮아.’

‘응? 그게 아니고. 있잖아. 무림맹주라고, 무협지 같은 데서 나오는 사람 있는데. 혹시 알아?’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싶어서 장난스럽게 털어놓은 건데도 수희는 정말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오빠는 오빠인 거잖아. 그치?’

‘나야 당연히 나인데?’

‘응······. 알겠어.’

수희의 그런 표정은 삼십 년을 함께 하면서 처음 봤다.

그리고 며칠 후.

수희 입에서 나온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오빠. 나 사실은 차수희 아닐지도 몰라······.’

그 후에 털어놓은 이야기.

소설책에서 본 적이 있어서 이해는 쉽게 됐다.

빙의.

다른 영혼이 주인이 있는 육체에 들어오는 것.

‘나도 잘 몰라. 이 몸속으로 빛 같은 게 들어오는 꿈 꾼 건 스무 살 때였고, 그 후로 이상한 능력 같은 게 생겼어. 쓴 적은 거의 없지만.’

애 엄마가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가끔씩 이미지가 떠오를 때가 있어. 높이 솟은 신전 같은 곳에서 지루해하면서 하늘만 쳐다보던 기억 같은 거. 그러다가 하늘 구석에 구멍 같은 게 뚫린 걸 보고 거기로 나갔고······.’

그리고 그 누군가가 차수희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이었다.

‘처음 꿈 꿨다는 거는 정확히 언제야?’

‘나 스무 살 2월에.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현이 가졌을 때······.’

그때까지 내가 수희라고 알던 여성이 바닥에 무너져내렸다.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울었다.

‘나는, 나는 차수희 아닐지도 몰라. 오빠가 어릴 때부터 알던 차수희라는 사람은 이제 없을지도 몰라. 미안. 숨겨서 미안해, 오빠. 절대 아니라고, 그냥 잊고 살려고 했는데······.’

나는 수희를 달랬다. 그럴 리가 없지 않냐고.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짐작이 가는 것도 있었다.

수희는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항상 착하고, 밝고, 상냥한 애였다.

그러다가 지현이를 가진 시점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묘한 분위기 같은 게 느껴졌다.

말투도, 표정도, 몸짓도.

뭘 하든 빛나보였다.

어른 되고 엄마 되더니 철이 드나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반했다.

전보다도 많이 좋아하게 됐다.

한데 수희는 혼자 괴로워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게 오롯한 자기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어쩌면 자신이 차수희조차 아닐 거라는 생각 때문에.

나도 수희도 어떠한 해결책도 내놓지 못했다.

스무 살 전까지의 시간만을 세어도 나는 수희를 십수 년간 알았고, 사랑했다.

하지만 지현이 가지고부터의 세월도 마찬가지로 십수 년이었다.

설령 스무 살 이후의 수희가, 사실은 차수희라는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고 해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몰랐다.

무엇을 택할지.

택할 자격이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어렵게 털어놓은 후로 수희는 나를 피했다.

나도 어떤 말로 다가가야 할 지를 몰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가장 불안해 한 건 우리 두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 죄 없는 지현이였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최우선 원칙은 지현이가 불안해하지 않는 것.

다른 복잡한 것은 다 집어치우고, 우리가 함께 산 십수 년의 세월을 인정하는 것.

할 수 있다면 아무 일 없던 듯이 예전처럼 서로를 대할 것.

그리고 수희가 요구한 조건이 하나 있었다.

‘수희 말고, 그냥 다르게 불러줘. 왜, 당신이라든가 애 엄마라든가 그런 거 있잖아.’

‘왜?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자격지심이라고 해도 좋아. 정확하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내가 너무 미안해서. 십 년 넘게 입 다물고 살았잖아. 당연히 내가 잘못한 거잖아. 그냥 너무 미안해······.’

그렇게 원칙을 세우고 나서 우리는 원래대로 돌아간 듯 보였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예전을 연기하는 역할극 같은 거였을지도 모른다.

지현이도 모를 리가 없었다.

어느 날 나와 둘이서 밥을 먹다가 지현이가 물었다.

‘아빠.’

‘응?’

‘요즘 왜 엄마 이름 안 불러?’

그날은 많이 괴로웠다.

내가 부르는 법을 바꾼 것만으로도 지현이가 슬퍼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보다도 더 많이 슬퍼한 사람이 우리 집에 있었다.

그 사람은 어쩌면 차수희가 아닐 수도 있지만, 지현이의 엄마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열 달을 품고, 낳아서 십 년을 넘게 사랑으로 길렀다. 나와도 열렬하게 사랑했다.

더 이상 없을 만큼 나는 애 엄마를 사랑했다.

어느 날 애 엄마가 선언했다.

‘오빠. 내가 해결할게.’

‘······해결?’

‘괜찮아. 나 하나 정도는 다시 넘어갈 수 있어. 가서 밝혀내볼게. 내가 정말로 누구인지. 오빠,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떨어져 지내게 됐다는 것에 화는 났지만, 그렇다고 애 엄마를 탓할 수도 없었다.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괴로울 테니까.

그냥 다치지 말라고 했다.

애 엄마는 농담처럼 말했다.

‘내 몸 아닐지도 모르는데 다치면 안 되지.’

다치지 않았으면, 하고 내가 바랬던 건 서글프게 그런 농담을 하는 그 사람이라고 미처 말해주지 못했다.

그게 미안했다.

***

애 엄마가 검지손가락을 펴고 말했다.

“일 년. 일 년만 기다려줘.”

“일 년?”

“내가 거기다 뭘 해놓고 왔거든.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일 년 후에 내가 지금 그대로면 나는 차수희가 맞고, 만약에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오빠. 하루 사이에 왜 이렇게 늙었어?’ 라고 말하면······, 나는 차수희가 아니었던 거야.”

자조하듯이 애 엄마가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미리 말해두는데 무서워서 일부러 밍기적거리는 거 아냐. 정말로 일 년 정도는 기다려야 해.”

“나는 당연히 맞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만에 하나라도 두 번째라면······.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데?”

“나? 음······.”

애 엄마가 머쓱하게 얼버무렸다.

말해주기 싫은 것 같은데 이러면 캐물어도 소용이 없다.

“나는 잘 모르겠어. 오빠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전부 원래 있어야 할 자리 그대로 만들게.”

거기까지는 기운을 내서 말하더니, 갑자기 애 엄마가 급격히 풀이 죽었다.

그리고 겁먹은 듯이 말했다.

“근데 있잖아. 오빠. 나 이거 너무 자주 묻는 것 같긴 한데······, 한 번만 더 물어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뭘 물어볼 건지는 이미 안다.

애 엄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에 내가 차수희가 아니어도 그래도 있잖아. 지현이 엄마는······, 지현이 엄마는 나······. 나 맞지? 그치, 오빠? 오빠랑 지현이랑 십 년 넘게 같이 살았던 그 사람은 나 맞지?”

어떤 거리낌도 없이 긍정했다.

“맞아. 지현이랑 너랑 나랑 셋이 살았어. 우리 둘이서 열심히 지현이 키웠구. 우리 딸 맞아.”

“응, 고마워······.”

애 엄마의 입가에 살풋 미소가 담겼다.

오랜 여행에 지쳐 집에 돌아와 짓는 안심한 미소.

그런 순박함이었다.

“아무튼 거기 정리 다 끝났으니까 이제 나돌아다닐 일 없어. 진짜 복귀했어.”

“응, 응. 와서 좋다. 안 다쳐서 정말 다행이구.”

“일 년만 더 기다려줘. 미안해, 오빠······?”

품에 끌어안고 등을 쓸어내리니 애 엄마가 어리둥절한 말투를 했다.

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까는 쥐잡듯이 잡으려고 하더니.”

“그건 오빠가 변장해서 괜히 지현이 속상하게 해서- 그러고 보니 이 기집애 혼도 내줘야 하는데.”

애 엄마는 그제서야 우리 딸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생각이 났나 보다.

소설 집필에 빠져 학업소홀.

방학숙제는 방치되어 있고, 몰래 헌터 일까지 했다.

근데 책임소재 따지고 들어가면 나까지 올라오잖아.

일단은 지현이 선에서 끊어야 했다.

“음, 당신이 말할 것까지도 없어. 내가 따끔하게 혼을-”

“응? 당연히 오빠도 같이 들어야지.”

애 엄마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

바로 그 시간, 유지현은 멀찍이서 한강 공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겪은 일에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 곧바로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달래주려고 애를 쓰다가 도리어 유지현을 귀찮게 하고 만 이수민은 ‘혼자 있고 싶어요’ 라는 한 마디에 당황해 쓸쓸히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유지현은 생각했다.

‘아저씨, 잊지 않을게요. 행복하게 열심히 살게요.’

그렇게 다짐하고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유지현은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유지현이 자리를 떠나고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콰아아아!

저녁 밤을 어스름하게 밝히는 푸른 불꽃이 허공에 생겨났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그런 불꽃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갔다.

그리고.

불꽃에 입이 달린 것도 아닌데 그곳에서 신기하게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아왔다! 소교주님! 아니, 운혜야-! 우리가 왔다아아아!”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다.

대신에, 근처에서 조깅을 하던 누군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중국 놈들 말투 진짜 존나 시끄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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