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43화 (43/130)

43. 이거 완전 내조의 여왕 아닌가? (유료 시작입니다)

“아아아······! 안 돼······, 안 돼. 쌤, 스미스 쌤······.”

헌터 정예슬은 엎드린 채로 목놓아 울었다. 눈물이 흘러서 방울방울 떨어졌다.

조금 전.

스미스가 인사를 건네고 게이트를 향해 날아간 직후였다.

도무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밝은 빛이 온 천지에 퍼졌다.

빛이 꺼지자 평소처럼 맑은 여름 하늘이 드러났다.

그토록 거대했던 게이트가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게이트가 사라진 자리.

반드시 보여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정예슬은 그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다.

“쌤, 쌤 어디 간 거야. 쌤 힘 세잖아요. 게이트 같은 거 확 찢어버리고 다시 나와야지. 왜 안 나오는데. 왜. 스미스 쌤······.”

하염없이 울고 있는 정예슬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아무 말 않고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김유진이었다.

정예슬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김유진에게 안겼다.

“언니, 언니. 스미스 쌤 어떡해······.”

김유진이 정예슬의 등을 토닥였다.

달래듯이 말했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한동안 김유진의 품에 안겨 펑펑 울던 정예슬이 퉁퉁 부은 눈으로 다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다 까먹어도 나는 기억할 거야. 성격 더럽고 입 험하고, 그래도 은근히 잘 챙겨주는 그런 사람 있었다고. 일 년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챙길 거야······.”

흡사 제사상이라도 차리겠다는 말 같았다.

제사상에는 음식이 올라가야지.

김유진의 입에서 무심코 어떤 단어가 새어나왔다.

“자메이카 통닭.”

그 말에 반응한 정예슬이 물었다.

“······응? 언니 뭐라고 했어?”

“아냐, 아냐. 스미스 쌤이 그거 좋아하셨다고 들어서. 우리 예슬이 이제 그만 울어. 괜찮대도?”

“흐윽, 흑. 뭐가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우리만 살면 뭐해. 스미스 쌤······.”

누구도 볼 수 없는 각도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김유진이 생각했다.

‘진짜로 괜찮으니까 괜찮다는 건데.’

그리고 얼마 전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김유진 씨. 일 잘 풀리면 내가 집에 가서 뭐할 건지 알아요?’

‘······뭐하실 건데요?’

‘흐흐. 치킨 시켜먹을 겁니다. 자메이카로 두 마리.’

정예슬의 등을 쓸어내리며 김유진은 속으로만 사과했다.

‘예슬아, 미안해. 진짜로 미안······.’

하지만 어쩌겠는가.

‘스미스’는 없어졌어도 그의 흉악하기 짝이 없는 주먹은 여전히 건재한 것을.

김유진은 언젠가 배웠던 단어 하나를 속으로만 되뇌었다.

자그마한 깨달음이었다.

‘이게 유물론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

헌터 정철우는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직 그것만을 필사적으로 되뇌었다.

그러면서 땅을 치고 울었다.

“크흑. 흑, 흐윽······.”

문득 차갑고 청량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하게 됐군.”

정철우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옆을 쳐다봤다.

이를 악물고 답했다.

“당장 꺼져. 지금 네 얼굴 보면 죽여버리고 싶을 것 같으니까.”

원독에 가득찬 말이었는데도 상대는 언짢은 기색이 없었다,

다만 청량하던 목소리에 약간의 애수가 더해졌을 뿐이었다.

“그래. 우철, 내가 네 사부에게 빚을 졌다.”

“빚이란 건 갚을 수 있을 때야 빚인 거야. 네가 대체 뭘로 갚을 거지? 네 목숨? 그딴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까 그냥 꺼지라고······.”

“그래. 목숨은 목숨으로만 갚아야 하는 법이지.”

조금쯤 애수에 젖어 흐르는 듯하던 목소리는 이제 오연한 선언이 되었다.

“천마신교 6대 교주 진천군의 이름에 맹세컨대 너와 나의 은원을 여기서 잊겠다. 그리고 협검무제의 제자인 우철. 너는 내게 한 번의 목숨빚을 요구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

진천군. 아니, 이수민은 그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정철우는 이수민을 쳐다보지 않았다.

도로 엎드려 땅을 치고 울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참자, 참아. 지금 웃으면 좆되는 거야······.’

안 그래도 웃긴데 뜻밖의 이득을 얻어서 얼굴 근육이 몹시 당겼다. 뺨이 아팠다.

정철우는 간절하게 되뇌었다.

‘슬픈 생각······, 슬픈 생각······.’

***

이수민이 돌아온 자리에는 한 명의 소녀가 서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유지현.

머나먼 세월을 지나 마침내 진정으로 재회하게 된 이수민의 단 하나뿐인 제자였다.

그렇다면 기쁨이 얼굴에 묻어나야 함이 마땅할 텐데, 어째서인지 이수민도 유지현도 안색이 침울했다.

유지현이 나직이 물었다.

“사부님. 수민 언니.”

“그래. 지현이. 내 제자. 왜 그러니?”

“스미스 아저씨는······, 아저씨는 누구였죠?”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는 질문.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을 이수민은 깊이 고민했다.

헌터들의 교관 스미스.

협검무제 하무린.

천마신교의 제일대적.

이수민의 철천지원수.

그리고.

이제는 갚지 못할 빚을 안겨주고 떠난 자이며,

하나뿐인 제자의 운명을 바꿔준 은인.

결국 이수민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네······.”

“수민 언니.”

“응?”

“나 자세한 건 모르지만······, 스미스 아저씨가 나한테 뭔가를 해줬다는 걸 알아요.”

이수민은 하무린과 일찍이 상의한 바가 있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유지현에게 사태의 전말을 굳이 알리진 말자고.

하무린이 줄곧 이유로 댔던 건 그거였다. ‘너무 어리다’

이수민의 얼굴로 슬며시 웃음기가 스쳤다.

“그러네. 그 사람 왠지는 모르겠지만 지현이가 많이 마음에 들었나봐.”

“응. 나 아저씨가 한 말 기억해요. 내 소설 재밌게 읽었다고, 하고 싶은 거 찾고, 맛있는 거도 많이 먹고, 엄마아빠한테 효도하고 행복하게 살라고. 기억나. 아저씨랑도 더 친해지고 싶었는데······.”

결국 유지현은 푹 고개를 떨궜다.

이수민은 제자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그래. 억겁 같은 확률이라도 좋다. 혹시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어쩌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관계가 될 수도 있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인적 드문 골목길의 불빛을 조명삼아 주체할 수 없는 흥에 몸을 맡겼다.

양팔은 그대로 날아갈 것처럼 흐느적거렸고 두 다리는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여유롭게 스탭을 밟았다.

동네 사람들 다 들으라고 외치고 싶었다.

이런 시발! 난 천재야! 존나 개쩌는 천재라고!

심지어 운까지 좋단 말이다!

어떻게 이렇게 모든 일이 착착 맞아떨어질 수 있지?

지현이와 성화의 연결을 끊어내고 나서 솔직히 좀 쫄리긴 했다.

게이트에 얼굴 들이밀고 있던 그 괴수놈 세보였거든.

나도 워낙 기진맥진했던 터라 긴가민가했다.

그놈 다시 게이트 안으로 집어넣고, 선계 입구에서 예약 대기표 끊을 수준으로 무적신공 끌어올려서 게이트 닫고, 자폭해서 산화한 것처럼 꾸며서 헌터들의 교관 ‘스미스’는 사망.

이게 내 계획의 마지막 퍼즐이었다.

지현이만 안전해지고 나면 내가 왜 굳이 귀찮게 걔네 가르쳐야 하냐 이 말이야.

지금 원래 직장에서는 이상한 소문까지 돌고 있다.

내가 하도 외근이니 출장이니 명목으로 나돌아다니니까 어디 높으신 분한테 제대로 찍혔다느니, 애도 커가는데 마음대로 관두지도 못하고 불쌍하다느니 뒤에서 사람들이 막 수군거린단 말이다.

더 이상은 그런 수모를 참을 수 없었다.

아무튼 작전명 ‘굿바이 스미스 ~그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가 다 좋았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마지막에 살짝 힘에 부쳤단 말이지.

연극을 끝까지 마무리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힘을 끌어올리는데······, 이게 웬일이야.

내 눈앞에서 게이트가 자기 알아서 쾅! 하고 닫혔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불빛 내뿜어서 애들 시야 가린 다음 축지 써서 도망간 것. 그게 전부다.

아무래도 성화와 지현이의 연결이 끊긴 탓에 게이트를 유지하는 동력 자체가 약해져서 생긴 일이 아닐까 싶은데, 뭐가 됐든 좋은 일이다.

손 안 대고 날로 먹었다.

김유진에게 다짐한대로 오늘은 치킨을 먹어야겠다.

지현이는······, 조금 늦게 올지도 모르겠는데 잘 달래줘야 할 거고.

탭댄스를 추며 후텁지근한 골목길을 누비던 내 눈에 땅바닥의 돌멩이 하나가 발견됐다.

그대로 자세를 잡고 발로 찼다.

“유수현 선수 슛!”

“와아, 골인-!”

······어?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의 골목길.

한 여자가 조명을 받으며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골인’이라고 박수를 치며 이쪽으로 걸어온다.

솔직히 내가 바보도 아니고, 목소리가 들린 시점에서 바로 알았다.

내 기감 속이고 저 간격에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또 있겠어.

애 엄마밖에 없지.

애 엄마가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왔다.

한껏 반겨주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좀 늦었네? 일하다 왔어?”

솔직히 고민했다.

이미 다 들킨 것 같은데 이실직고부터 할지, 실낱같은 희망에 걸고 외나무다리를 건널지.

공포와 생존본능 사이에서 후자가 이겼다. 나는 말했다.

“응, 일하다 왔어. 언제 왔어?”

“나?”

애 엄마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더니 곧장 대답한다.

“아까 세 시쯤?”

세 시라니 이런 젠장.

이미 다 틀렸군. 잠자코 패배를 인정하게.

전장을 냉철하게 판단하는 늙은 군인처럼 내 이성이 말했다.

하지만 내 안의 작은 아이도 내게 속삭였다.

끝까지 포기하지 마. 살아날 기회는 반드시 있는 법이라구.

희망이라는 무기를 손에 쥔 작은 아이는 늙은 군인을 손쉽게 이겼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계속 집에 있었어?”

애 엄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집에 들렀는데 오빠랑 지현이 둘다 없어서 그냥 집 좀 치우고, 마트 가서 장도 좀 봐오고 그랬지.”

“그래?”

솔직히 여기서 잠시 안심했는데.

“그리고 오빠 일하는 거도 보고 오고! 재밌던데?”

앗, 아아······.

애 엄마가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빠 방금 슛해서 골인했잖아. 그거 혹시 어시스트는 누군지 알아?”

“······어시스트?”

골목길에 있는 돌 발로-

“-차는데 어시스트가 어딨어. 그냥 보이니까 찬 거지. 라고 생각하지 말구. 잘 생각해봐. 돌이 아무 이유도 없이 거기 있을 리는 없잖아? 바람이든, 누가 발로 찼든, 차에 튕겨져 나왔든 뭔가 원인이 있으니까 거기 놓여 있던 거지. 그치?”

“그, 그러네······.”

애 엄마 입가의 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흐응. 그런 의미로 보면 있잖아. 오늘 오빠한테 어시스트 해 준 사람은 나네?”

네? ······뭐요?

“왜애, 되게 비장한 연기 하면서 게이트로 날아가는데 나는 그냥 오빠 고생하는 거 싫어서. 내가 대신 닫아줬어. 오빠 나 잘했지? 이거 완전 내조의 여왕 같은 거 아닌가? 막 이래.”

아니, 그러니까 가스불 내가 잠갔다 정도의 늬앙스로 그렇게 말하면 무섭다니까······.

“맞다. 오빠 변장한 것도 잘생겼더라. 난 원래 얼굴이 더 좋긴 하지만.”

“가, 감사합니다······.”

나는 그제서야 주섬주섬 항복선언문을 작성해 나갔다.

“저기······. 그게 말입니다, 내무부 장관님. 제가 모쪼록 사후보고 형식이나마 장관님께 보고드릴 것이-”

“아냐. 괜찮아. 나 이미 다 아는데 뭘.”

“그래도 현장 책임자에게 실감나는 보고를 들으시는 게 아무래도-”

“괜찮대도? 다 알아.”

애 엄마가 내게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여름 향수 같은 청량한 향이 코에 스쳤다.

“다 알지. 지현이 고 기집애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소설 끄적이다가 댓글 단 사람 만난 거도 알고, 수학은 벌써부터 포기했고, 그리고 헌터······. 대한민국의 희망이라더라?”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나한테 보낸 살기는 아니다.

지현이로 기사 쓰고 헌터 하는 게 좋겠다고 부추긴 자들에 대한 분노.

근데 나도 무섭다고······.

“아무튼 오빠. 일단은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그래, 오빠 말대로 하나씩 들어봐야지. 지현이 두어 시간은 더 있어야 올 것 같은데 그 전에······, 우리 이야기도 마무리 지어야지.”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걷는 와중에도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우리 이야기?”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게 애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도 앞서서, 나도 모르게.

애 엄마가 엷게 웃었다.

“응, 어쩌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아.”

서글픈 표정을 어렵게 숨기며 애 엄마가 말을 이었다.

“내가 정말로 차수희가 맞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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