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내가 먼저 들어야겠네.
“진짜 크기는 오지게 크네요······.”
정예슬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주위에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다리 근처의 공원에 모인 사람들.
나들이 나온 건 당연히 아니고 모두 헌터들이다.
집에서 배 긁으면서 자고 있던 애들까지 모조리 불러모아서 거진 이백여 명.
대기 인원은 최소로만 남기고 시간에 맞출 수 있는 S랭크 헌터 전원.
나머지 역시도 A랭크 최상위 헌터들과 나한테 훈련받던 애들이다.
협회에서 연말에 상 준다고 불러모을 때 말고는 이렇게 모일 일도 없는데.
솔직히 지금은 이것도 부족해 보이긴 한다.
“나 진짜 아까 처음 봤을 때 하늘에 구멍 난 줄 알았잖아요.”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하지.
한강 상공에 떠 있는 게이트는 지름이 백 미터 가까이 돼 보였다.
게다가 지금도 꾸준히 커지고 있다. 최종적으로는 백 미터까지 찍을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기네스북 기록 경신 아닌가?
“전에 미국에서 이거 비슷한 거 막다가 재산피해가 몇 조라고 했더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하여튼 엄청 많았어요.”
“입금하라고 하세요.”
“네?”
내가 뜬금없이 말하니 정예슬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막아줄 거니까 몇 조 그거 나한테 입금하라고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얼굴을 찌푸렸다.
방금 중2병이라고 한 새끼 누구야. 목소리 기억해놨다.
정예슬이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멋있는 척하는 거 오글거리긴 한데 지금은 믿고 싶다. 스미스 쌤이 다 알아서 해주실 거야.”
“역시 스미스 님이십니다. 멋지십니다. 역발산기개세란 말은 분명 스미스 님을 위해 지금껏 존재해 왔을 겁니다.”
이건 우철이.
진심인 게 분명한데 왜 아첨으로 들리는 걸까.
분명 칭찬에 개연성이란 걸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
게다가 점점 더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우철이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구시렁거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수민 씨는 왜 안 올까요. 흐음.”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그냥 흉보는 거다.
왜 나한테 일러바치듯이 말하는 건데.
“저기 오네요.”
스포츠웨어 비슷한 디자인의 전투복을 맵시 있게 입은 이수민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옆에는 지현이도 같이 있었는데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이 더운 날 둘이 팔짱은 왜 끼고 있어.
우리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올수록 둘이 나누는 대화가 잘 들렸다.
지현이 표정이 왜 저러나 했더니,
‘수민 언니. 진짜 저 와도 돼요? 아빠 알면······.’
‘괜찮아. 언니가 다 알아서 할게. 지현이는 언니만 믿어. 아버님 절대 모르시게 할 테니까.’
그래서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거였구나.
보도통제는 되겠지만 혹시라도 뭔가 문제가 생겨서 나한테 들통나면 안 된다고, 이수민과 지현이는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누가 긴장이나 좀 풀려고 셀카를 찍고 있었는데 카메라에 실수로 지현이 모습이 담길 뻔했나 보다. 이수민이 거칠게 소리쳤다.
“찍지 마! 찍지 말라고! 성질이 뻗쳐서, 진짜.”
굳이 신경 쓸 것도 없이 알아서 잘하고 있구만.
내 앞에 다가선 이수민이 하는 둥 마는 둥 목례를 했다. 그와 동시에 전음이 날아왔다.
<데리고 왔어. 정말로 지현이는 안전한 거지?>
<이제 그만 좀 물어보는 게 어떠냐?>
<대답해.>
<그래, 안전하다. 안전해. 아무 일 없을 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지현이는 안전할 거다.
그래, 우리 딸만은 말이지.
올 사람들 전부 오고 포지션까지 잡고 십 분이 더 지났다.
누군가 말했다.
“목말라 죽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흘러나온 칠흑 같은 암막이 태양을 일순간 걷어냈다.
끄극거리는 소리.
무언가를 억지로 열어젖히는 듯한 그런 소름끼치는 소리가 흐르고,
잠시간 어렵사리 버티다가······.
콰아아-!
결국엔 터져버렸다.
게이트가 열렸다.
***
처음 쏟아져 나온 건 흔히 볼 수 있는 괴수들이었다.
B랭크 이하의 던전이나 게이트에서 나오는 것들.
이 자리에 모인 누구나 마음먹고 상대한다면 몇 마리 정도 어렵지 않게 격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십 마리라면?
혹은 수백, 천 마리에 가깝다면?
“방출계 일제사격! 아무튼 땅에 못 내려오게 해!”
“대열 흩트리지 마! 둘러싸이면 대가리 깨지는 거 한순간이야! 정신 똑바로 차려!”
하늘에서 중력가속도를 타고 괴수들이 떨어지기까지 고작 몇 초 남짓.
헌터들은 결코 당황하지 않았고 대응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해진 포지션대로, 방출할 수 있는 마나를 끌어모아 괴수들에게 먹여줬다.
밀집되어 있던 괴수무리는 3할 이상이 땅을 밟지도 못하고 폭사했다.
그러니까 그건, 비록 상처 입었을지언정 7할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놈들이 전부는 아닐 거다.
헌터들은 생각했다.
오늘 다 끝나고 나면 집에 처박혀 있던 검은 정장 꺼낼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딱 3초만 이어진 생각이었다.
콰아앙!
퍼억, 퍽!
폭발음과 둔탁한 소리.
그리고 눈부신 빛무리가 공원 전역을 감싸다시피 했다.
소음이 잦아든 후, 눈이 휘둥그레진 헌터 하나가 먼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거, 강물에 떠내려가는 저거 이수민 아냐?”
옆에 있던 다른 헌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떠내려가는 게 아니라······, 강물 밟고 뛰어다니는 거 같은데?”
***
새끼, 싸움 잘하네.
이수민의 눈부신 활약을 보는 내 소감이 딱 그랬다.
게이트가 열리는 것과 동시에 이수민의 육신에 걸린 금제를 풀어줬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내기를 정돈한 이수민의 온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새하얀 강기에 휩싸여 몸 주변이 투명하리만치 빛나는 이수민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국내 최고의 헌터 이수민과 천마 진천군이 지닌 강함은 질적으로 완벽하게 다른 수준이니까.
저번에 나랑 한 판 붙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저놈이 전생에 이룩한 경지는 아마 입신경의 완숙한 단계. 혹은 그 이상.
전생의 최절정기로 가정하면 놀고먹고 지낸 지금의 나와 비교해도 실질적인 무력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거다.
뭐, 저놈도 전생보다 못한 건 매한가지겠지만.
아무튼 이수민은 그간의 설움이라도 털어내듯이 정말로 미친놈처럼 괴수들을 소탕했다.
천마신공 십성.
자연지기를 몸 안의 내공과 완벽하게 같은 수준으로 수발할 수 있는 경지.
지금 보니 거의 십일성에 준한다.
게이트가 열렸고, 주변에 널린 게 헌터들과 괴수들이다.
이수민에게는 고급 뷔페라도 간 것 같은 환경일 거고, 그러한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강물 위에 오연하게 선 채로 이수민이 손을 한 번 떨쳤다.
허공으로 백여 개에 가까운 검고 하얀 구체가 생겨났다.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탄彈!”
구체들이 제각기 날아가 괴수들을 요격했다.
머리와 심장에 직격 당한 괴수들은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고, 몸통에 바람구멍이 뚫린 놈들은 주위의 헌터들에게 협공당해 쓰러졌다.
저게 원래 천마일맥이 쓰는 기술이긴 하지.
나도 백운상이가 쓰는 거 보고 훔쳐배운 거니까.
그리고 마치 기관총 쏘듯이 괴수들을 소탕하는 와중에도 이수민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하여튼 저 의심병자 새끼······.
그러한 과정이 몇 번 반복되고 대부분의 괴수들이 쓰러졌다.
콰앙!
강물을 박찬 이수민이 내 옆으로 멋지게 하강했다. 정확하게는 지현이 옆으로.
지현이가 선망에 가득한 눈으로 이수민을 올려다봤다.
“와, 사부님······.”
정체를 알고 난 다음에도 계속 언니라고 불렀는데, 지금이야 호칭이 바뀌어도 될 상황이긴 했다.
심령금제는 아직 풀어준 게 아니라 고통이 있을 텐데도 표정 하나 까딱하지 않은 이수민이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제 밥값은 했지? 저놈들은 알아서 해.”
응? 이 새끼 양심의 상태가······?
이번에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건 아까보다는 수가 훨씬 적었다.
이삼백 마리 정도.
하지만 아까 그놈들이 그냥 커피라면 지금 이놈들은······.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한강공원이 순식간에 쥐라기 공원이 돼버렸다.
날개 끝에서 끝까지 5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와이번떼.
산더미만한 덩치로 하강하는 전투형 코끼리와 공룡들. 말이 우습긴 한데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된다.
제 무게에 못 이겨 다리라도 부러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뭔가 수작을 부린 건지 탑승감 좋게 땅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인간형 괴수 둘.
하나는 천사처럼 생겼고, 하나는 악마처럼 생겼다.
척 봐도 중간보스의 포스가 느껴지는 놈들이었다.
우철이에게 말했다.
“정철우 씨?”
“네, 스- 아니, 아니지. 스미스 님.”
“애들 모아서 진형 잡고 지휘해서 땅에 있는 놈들 좀 묶어두세요. 나는 날아다니는 놈들 잡아올 테니까.”
“묶어둘 것도 없이 제 선에서 처리해도 됩니까?”
픽, 웃음이 나왔다.
“그러시던가.”
“존명.”
우철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거 자꾸 티 내지 말라니까 그러네.
여기가 무림도 아닌데 무슨 존명이야.
우철이 저놈 저거 암만 봐도 말실수가 아니라 계속 일부러 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수민에게 전음으로 일렀다.
<곧 다녀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다치지 말고. 너도, 옆에 유지현이도.>
<말 안 해도 내가 알아서 해.>
저 싸가지 없는 새끼.
나한테 그렇게 건방지게 굴 수 있는 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이놈아.
다치지 말라는 건 내 진심이었다.
불을 끄려면 마땅히 불을 끄는 데 쓸 재료가 필요한 법이니까.
자기 한 몸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재료가.
***
그리고 시간을 조금 되돌려서······,
한강에 게이트가 열렸던 그 시점.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서울 어느 동네 주택가 상공에 게이트와 같은 공간이 하나 더 생겨났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드나들 만한 작은 문.
그 문은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고,
곧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숨길 수 없는 기쁨을 얼굴에 한껏 머금고 여성이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나는 듯한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방학숙제도 하나도 안 했을 텐데 숙제도 봐주고, 혹시 학원 가고 싶다고 하면 알아봐주고. 요즘은 중학교부터 예습도 좀 해둬야지. 아, 같이 쇼핑도 해야지. 시간이 좀 촉박하긴 해도 바닷가라도 다녀올까? 오빠한테 이야기도 해야 하고······.’
긴장과 두근거림이 절반씩 섞인 마음으로 여성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익숙한 동작으로 대문을 열고, 잘 꾸며진 정원을 지나서, 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리릭.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성이 외쳤다.
“지현아! 오빠! 나 왔어!”
대답이 없었다.
집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여성은 생각했다.
‘둘이 같이 밥 먹으러 나갔나? 지현이 더운 거 싫어하는데. 어떻게든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올 걸.’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선 여성은 곧 이맛살을 찌푸렸다.
“진짜, 집 좀 치우고 살지······.”
한숨을 내쉬고 여성은 주변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정리했다.
‘그래도 설거지는 깔끔하게 해놨네.’
거실을 다 치운 여성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방에 사람은 없었고 귀여운 인형들이 여성을 맞이했다.
‘새로 하나 샀네? 인형도 이쁜 거 있으면 사줘야겠다.’
이불이 좀 흐트러진 것 외에 방 안은 깔끔했다.
한데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책상에 놓인 노트북.
‘노트북이 왜 이 방에 있지?’
사소한 의문과 함께 여성이 노트북 화면을 켰다.
웹소설 사이트에 로그인이 되어 있었다.
열려 있는 창은 개인 서재였다.
‘지현이가 요즘 소설 같은 거 보나?’
그리고 별 생각없이 뭘 보나 싶어 눈길을 준 곳에 보이는 제목.
‘······이게 뭐야. 칠대 천마의 전설?’
싸한 예감과 함께 여성이 서장부터 글을 클릭해 나갔다.
댓글도 함께 읽었다.
방학숙제를 도와줬던 기억으로 미루어 보건대 틀림없다.
이 조잡한 문체의 주인은 바로······.
‘지현이 이것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업로드 날짜를 보니 저번에 왔을 때도 이미 적고 있었는데 까맣게 숨기고 있었다니.
여성은 조금 화가 났지만 곧 마음을 다스렸다.
집을 비운 건 오롯이 자신의 책임이니까.
‘오빠랑 얘기할 게 하나 더 생겼네······.’
우선 연락이라도 해 봐야겠다 싶어 여성은 가지고 왔던 휴대전화를 충전해 전원을 켰다.
오래 작동하지 않아 전원이 켜지자마자 알림이 많이 떴다.
무심하게 손가락으로 알림을 없애고 전화를 걸었다.
둘 다 받지 않았다.
여성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집 정리나 좀 더 하고 있어야겠네. 이번 달 전기세는 얼마나 나왔으려나.’
집에 냉기가 살짝 도는 걸 보니 집에서 나가기 직전까지 에어컨이 켜져 있었던 것 같은데 전기세도 전기세거니와 각종 공과금 같은 건 제대로 내고 있나 싶었다.
그리고.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던 여러 가지 서류들을 정리하던 도중.
보여선 안 될 종이 한 장이 기어이 여성의 눈에 띄고야 말았다.
종이를 손에 든 여성이 적힌 문장들을 소리내어 읽었다.
“각성자······, 교육 커리큘럼? 유지현? 감응력 수치가······, 측정불가?”
여성의 손이 살짝 떨렸다.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다른 서류들도 찾아봤다.
“보호자 안내서, 등록필증. 합격통지서. 던전 진입 허가증······? 이게 다 뭐야.”
설마, 설마하면서도 여성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가장 빨리 아는 방법이 있었다.
인터넷을 키고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글자를 입력했다.
유지현.
검색 버튼을 누르며 여성은 생각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오빠랑 지현이가 나한테 그런 걸 숨길 리가-’
<최연소 S랭크 각성자 14세 유지현 양으로 밝혀져>
<헌터 이수민과 함께 S랭크 게이트 진압>
<유지현 양이······>
<유지현 양은······>
<대한민국의 미래와 희망, 헌터 유지현>
“꺄아아악!”
도무지 막을 수가 없는 비명소리였다.
스무 살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여성이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야기해야 할 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고.
‘아무래도······, 내가 먼저 들어야겠네?’
다시 눈을 뜬 여성의 눈동자는 시린 빛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