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단 한 사람의 희생.
하지만 같은 편을 먹었다뿐이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몇 개 더 있긴 했다.
대표적인 걸림돌이 바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나 해?”
이 꼴통 새끼다.
계획을 말해주자 예상대로 이수민이 노발대발하며 따졌다.
“그 어린애를 어떻게 한다고? 정파놈들 힘을 빌리려고 했던 내가 미쳤지. 이 위선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우철이가 말했다.
“사부님이 수고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제 선에서 저 말버릇을 고쳐놓겠습니다. 금제만 유지해 주십시오.”
금제가 알파이자 오메가잖아. 너는 그냥 거들 뿐이고.
호가호위하겠다는 말을 왜 이렇게 충성스럽게 하는 건데.
이수민에게 손짓했다.
“워, 워. 캄다운, 캄다운. 리슨. 리슨 케어풀리.”
“개소리하지 마! 난 절대 찬성 못해. 꼭 하겠다면 내 시체를 밟고 해.”
“내가 하라면 못할 것 같냐?”
잠깐 기세에 눌리다가 곧 신색을 회복한 이수민이 외쳤다.
“그래. 해 봐. 하지만 곱게 죽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아오, 이 꼴통 새끼가 진짜······.
일단 어르고 달래봐야겠다.
“천군아. 아니지, 우리 새 마음 새 뜻으로 다시 태어났으니까 수민이지. 수민아. 이수민 씨? 너는 진짜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하세요. 내가 말했지? 유지현이 걔 위험하게 할 일은 없다고.”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우철이가 한껏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이 보기 싫은지 이수민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우철이를 노려봤다.
꿀릴 게 없는 우철이가 시선을 맞받았다.
우철이는 내가 만에 하나라도 지현이 위험하게 만들 일은 없다는 걸 아니까.
내가 중재하듯이 말을 꺼냈다.
“눈싸움 그만하고. 수민아, 네가 지금 뭘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착각은 무슨. 지현이를 데려가서-”
“중요한 건 유지현 걔가 아니라니까? 성화가 문제지. 그러니까 네가 먼저 아는 거 다 말해봐. 너도 신녀였잖아.”
이수민이 입술을 깨물고 생각에 골몰했다.
결국 나온 말이라는 게 이런 거였다.
“방심시켜서 정보 빼낸 다음에······. 그런 수작이 아니란 걸 어떻게 믿지?”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다 넘어왔다는 신호 같은 거다.
이수민 같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슬슬 당근 하나 정도 혀에 닿게 해줘도 좋겠다 싶었다.
“몇 가지 약속할게. 우선 일 끝나고 나면 금제 풀어준다. 사부라고 밝히고 짝짜꿍해도 돼.”
“······!”
그래. 마음껏 해도 된다.
그때 가서는 금제 같은 건 아무 의미 없을 테니까.
너한테나, 나한테나.
“그리고 유지현이한테 해가 될 일은 없게 한다. 못 믿겠으면 내 스스로 심령금제라도 걸어주랴?”
“그건-”
“마지막으로 너는 귀찮은 일 안 시킨다. 유지현이 옆에서 내가 허튼 짓 안 하나 감시하고 있어. 이 정도면 믿을 수 있겠지?”
사실 마지막 조건은 오히려 내가 바라는 바다. 보디가드 하나 공짜로 부려먹는 격인데.
이수민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궁금한 거지?”
“말했잖아. 성화에 대해서 네가 아는 거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해봐.”
***
성화가 어디서 온 건지는 아무도 몰라.
신교의 조사께서 십만대산 깊숙이 터를 잡으실 때 이미 성화는 그 자리에 존재했다고 들었어.
당시 조사께서는 신화경에 발을 들이시고도 스스로의 의지로 인세에 남아계셨던, 고금을 통틀어 다시 없을 초인이셨다.
<듣자 듣자 하니 저거 날조가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거의 역사왜곡 수준->
<좀 가만히 들어봐라. 집중해, 집중.>
그런 조사께서도 성화의 진실한 정체를 알 수 없다고 하셨어.
다만 너무도 거대하고 신비로운 힘이라 그것의 폭주를 우려하셨다고 들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해서 대대로 천마일맥 중 자격 있는 여아를 신녀로 삼고,
성화와 신녀를 심령으로 연결하는 방법을 고안한 거야.
신교 내에서 신녀가 가지는 의미나 해야 할 일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생략하고.
아무튼 성화 근처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신녀였던 지현이가 제어에 실패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야.
그때 생겼던 일도, 방금 나한테 말해준 추측도.
“그러면 질문 하나 하자.”
“뭐지?”
다시 질의응답을 마치고 얼추 정리가 끝났다.
이제 우리 딸한테 물어볼 일이 남았다.
***
“아이고, 누추한 제 방에 어찌 이리 귀하신 몸이!”
“······.”
지현이가 쪼르르 달려와 내 팔을 부여잡았다.
“요즘 일이 너어무 바쁘셔서 하나밖에 없는 딸은 완전히 찬밥 신세 아니었나요? 오늘은 출근 안 하시는 것 같아 정말 다행이네요. 아이, 신나라!”
지현이가 입을 삐죽대며 말했다.
근데 별로 화 안 난 거 다 보이는데.
손 꼼지락거리는 거 보니까 괜히 삐친 척하는 거다.
건수 하나 잡아서 맛있는 거 시켜먹자고 조를 속셈이 틀림없었다.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딸, 오늘 고기 구워먹으러 나갈까?”
“고기? 좋긴 한데······, 근데 밖에 너무 더워.”
거봐라. 화난 거 아니잖아.
지현이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 이건 내 생각인데 지구는 이미 망해버린 게 아닐까? 에어컨 없이는 일 분도 못 있겠단 말야.”
“그러면 집에서 시켜먹어도 되고.”
“메뉴 내가 골라도 돼?”
아무 말 않고 배달앱이 켜진 휴대전화를 건네줬다.
음식의 종류와 가격에 제한이 없다는 암묵적인 신호다.
지현이가 팔짝 뛰며 기뻐했다.
“그럼 그냥 고민 안 하고 두 군데서 다 시킬래! 족발이랑 탕수육!”
흐뭇해라. 우리 딸은 발상의 전환도 훌륭하네.
그래도 꼭 하나 물어볼 게 있었다.
“딸. 탕수육 소스는······.”
“오늘 시키는 건 내가 총책임자니까 부어먹고 싶은데?”
“그럼 조금씩 덜어서 부으면······.”
하지만 지현이가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그러면 맛이 떨어진단 말야. 그리고 이 탕수육이란 게 원래부터가 부어먹는 음식이라서 소스가 따로 나오는 건 배달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고-”
이건 안 된다.
애 엄마가 있었다면 배려와 탕수육 매너에 대한 참교육을 제대로 해줬겠지만 나로서는 역부족이다.
“······알겠다. 딸 하고 싶은대로 해.”
“히히. 아빠 최고!”
족발과 소스를 부어버린 탕수육을 번갈아 먹으면서 지현이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했다.
나는 탕수육은 안 먹고 족발만 먹으면서 들었다.
슬슬 방학숙제를 시작해야겠다느니,
언제 하복에서 춘추복으로 갈아입느냐에 따라서 교내 트렌드세터로서의 입지가 결정된다느니.
그러다가 지현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근데 나 개학하기 좀 싫어. 힘을 숨긴 천마로 조용히 다니고 싶었는데······. 이거 참. 세상이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네.”
묘하게 거들먹거리는 말투였다.
싫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이제 연락은 많이 안 온다 그러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막상 학교 가면 모르는 애들도 말 걸 것 같아서 좀 싫어.”
“아빠가 나중에 담임 선생님이랑 통화 한 통 해서 신경 좀 써달라고 말해둘까?”
“안 돼. 중학생은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야.”
반 년 전까지 초등학교 교실에 있었는데 자라면 얼마나 자랐다고 저러는 건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딸 소설은 잘 돼 가? 요즘 많이 못 도와줬네.”
“엄청 순조로워. 역시 내가 중심을 가지고 쓰니까 독자분들이 알아봐주시는 것 같아.”
‘사실 나한테 아빠 도움 같은 건 필요없었던 게 아닐까?’ 라는 뜻으로 들리는 건 내 피해의식의 발로이겠지. 그럴 거야.
자랑스럽게 보여준 연재 사이트 앱에는 확실히 긍정적인 댓글이 많이 달려 있긴 했다.
대부분 환생자 애들이 달아놓은 것 같았지만 어쨌든 지현이가 좋아하면 그걸로 된 거지.
내가 물었다.
“나중에 전개는 어떻게 되는데? 아빠랑 오랜만에 소설 얘기도 좀 해 보자.”
“좋아. 내가 작가 입장에서 스포일러를 제대로 해줄게. 아빠 나중에 후회하면 안 된다?”
지현이가 반색하며 말해준 내용은 카페에서 이서준과 대화할 때 엿들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정파 무리에게 암습을 당했지만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칠대 천마가 성화의 폭주를 막고, 천하창생을 위하는 신교의 천마로서의 위엄을 보이고 사라진다.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은 정파인들이 일제히 사죄하고 천마신교는 마침내 오랜 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만약에 소설이 그렇게 끝나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데?”
“그 뒤? 음······. 언니오빠들이 나 대신 잘 해주지 않을까?”
언니오빠라고 하면 아마 호위대를 말하는 걸 거다.
지현이가 정파 놈들 합공 받을 때 최후까지 곁에서 우리 딸을 지켰다는 녀석들.
“아빠도 알지만 이게 내 자전적 소설이잖아? 솔직히 나는 호위대라고 생각 안 해. 사부님이 직접 가르치셨구 나는 사형제들이라고 생각하거든. 다들 엄청 똑똑하고 세니까 나 없어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지현이 얼굴이 왠지 열네 살 아이 얼굴로는 안 보였다.
좀 울컥해서 괜히 머리칼을 헝크러트렸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성화는? 아빠는 솔직히 말단이어서 성화가 뭔지 잘 모르거든.”
“앗······.”
새삼 전생에서의 신분의 차이를 깨닫고 지현이가 잠시 주춤했다.
괜히 미안한지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성화를 모시는 의식을 치르고 나면 파란색 불 같은 게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 같거든? 깨어 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나 항상. 그게 되게 따뜻하구 좋아서 나는 좋아했어. 사부님은 나한테 물려주실 때 걱정 많이 하셨지만.”
“그러면 지금도 성화가 마음속에서 느껴져?”
“지금? 으음······.”
지현이가 쉬이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가 말했다.
“모르겠어. 원래는 내가 심령의 연결을 끊고 계승의식 치르는 게 아니면 계속 있어야 하는 게 맞긴 한데······. 히히, 나 한 번 죽었잖아. 아마 지금은 없어진 거 아닐까?”
지현이는 가볍게 말했지만 나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
표정을 굳히고 엄하게 타일렀다.
“딸. 죽는다는 말 함부로 쓰는 거 아냐.”
“왜애. 이건 엄연한 사실에 입각한-”
“안 돼. 아무튼 안 돼.”
우리 딸은 커서 고등학교도 다니고, 대학교도 다니고, 직장도 가고.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도록 키울 거다.
빌어먹을 전생 따위가 그걸 방해하게 둘 순 없었다.
***
조금 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다시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우선 던전에 들어가서 심도 깊은 면담 시간을 가졌다.
퍽, 퍼억.
“아는 거 다 말해. 여기 어떻게 온 거야. 지구에 꿀이라도 발라놨냐?”
“이미 연결된 구멍을 넓히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아무튼 뭔 일이 생겨서 그 뒤로 오갈 수 있게 된 건 맞지?”
“그렇다······.”
“혹시 너 살던 곳에 언제 이상한 불덩어리 나타난 적 있냐? 시퍼런 거.”
“그런 건 들은 적 없다.”
등 뒤에 서 있던 우철이에게 말했다.
“얘는 꽝인 것 같지? 인간형인데도 별로 아는 게 없네.”
“그러네요. 아무래도 한 곳만 연결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시발. 지구가 무슨 맛집도 아니고.”
“다 끝났나?”
혼자 팔짱끼고 구경하던 이수민이 물었다.
나 대신 우철이가 대답했다.
“손 하나 까딱 안 한 것이······.”
“우철아, 잘린 팔 또 잘리면 많이 아플 텐데?”
그거 걱정스러워 하는 말투가 아닌 것 같은데
“또 왜 싸우냐. 나가자. 던전 클리어!”
훈련도 거의 매일이다시피 진행했다.
기존에 있던 헌터들만이 아니라, 이서준을 비롯해 환생자 모임 애들을 모조리 불렀다.
“쌤, 저분들은 다 뭐예요?”
“새로운 수강생들입니다. 다들 A랭크 이상 포텐셜이고요.”
“수상해. 다들 우리 또래로 보이는데 어떻게? 혹시 저 사람들 무슨 강화인간 같은 거 아녜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요. 오늘 기존 수강생들의 과제는 이겁니다. ‘신고식’”
“신고식이요?”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이런 각오로 하세요. 저 낙하산들을 흠씬 두들겨패란 말입니다.”
“쌤이 데리고 온 거면서 낙하산이라고 인정을 해요······?”
전생을 자각하려면 아무래도 실전 같은 훈련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패싸움과 실전 같은 훈련을 통해 정신적인 충격을 줬더니 확실히 기억을 각성하는 애들이 늘어났다.
로맨스에 취해 나에게 동료들을 낱낱이 팔아먹었던 신세기와 김신지는 전생에 아주 사이가 안 좋았던 앙숙으로 판명되었다.
사흘 지나니까 다시 찰떡처럼 붙어다니긴 했지만.
그리고······.
마침내 때가 왔다.
지현이 개학이 사흘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우우우웅.
요란한 진동이 울렸다.
각성자 알림앱.
S랭크 게이트 출현.
한강다리 부근의 상공.
한 시간 후 완전 개방으로 예측되며 예상규모는 역대 최고 수준.
김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다 불러모으세요. 그냥 싹 다. 지현이는 이수민 씨가 데려올 겁니다. 그러고 보니 김유진 씨는 자기 명의로 건물도 몇 개 있죠?”
수화기 너머에서 김유진이 긍정했다.
이 다이아 수저 녀석.
게다가 곧 미스릴 수저로 전직할 예정이었다.
“미리 축하합니다. 잘 되면 이 근처 땅값 한 열 배로 뛸 건데.”
오늘부로 우리 딸 주변에 괴수는 없을 거다.
별로 큰 희생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단 한 명.
오직 한 사람만 사라지면 된다.
그것으로 모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음, 나는 역시 나쁜 놈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