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백가 그놈입니까?
주먹을 휘두르던 와중에 생각했다.
뭔가 이상하다.
기시감 같은 게 느껴진다.
지현이 보고 천마라고 할 것 같길래 일단 저지하긴 했는데 이 자식 때리는 게 왜 이렇게 익숙한 거지?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목소리가 다르고, 지문이 다르듯이 타격감이라는 것도 개인이 가진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
나 정도 권위자가 되면 그런 것도 알게 되는 법이지.
한데 내 감이 지금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정철우를 알고 있다고.
그것도 아주 잘 안다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정철우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준 육체적인 고통과, 아마 전생을 자각한 것 같은데 그 때문에 받은 정신적인 충격이 뒤섞인 여파로 보였다.
이상해. 이상하단 말이지.
이야기 들어보니까 환생한 놈들은 다 성화 폭발할 때 그 주위에 있던 애들이라고 했다.
내가 그 세대 애들이랑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거든.
이 정도로 익숙하려면 적어도······.
그때 나와 정철우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갑자기 정철우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린다.
입을 조금 벌린다.
그래, 어디 한 번 말해봐.
천마의 ㅊ이라도 꺼내면 어떻게 되나 보자.
하지만 정철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조차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혹시 맹······, 아, 아니, 사ㅂ-”
끄아아아악! 우철아! 너였냐!
너는 바로 알아봤는데 나는 몰랐다니,
내가 미안하다아아아!
속으로 사과하며 전력으로 정철우에게 접근했다.
감격적인 상봉을 하려고 다가선 건 당연히 아니다.
“읍, 읍······!”
말 못하게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정철우가 버둥거렸다.
안 돼. 안 된다고.
우철아. 그래, 착하지······.
말 안 듣는 어린애를 달래듯이 정철우의 입을 빈틈없이 막았다.
숨은 코로도 쉴 수 있잖아.
이놈이 맹주니 사부님이니 말하고 그게 우리 딸 귀에 들어가면 지금껏 노력했던 모든 게 파탄이라고······.
내가 저지른 수많은 폭행, 공갈, 협박, 선동과 날조. 그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된다.
이런 젠장.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무슨 짓까지 하면서 온 건데.
절대로 그럴 순 없다.
여전히 몸의 자유를 되찾으려 안간힘을 쓰는 정철우를 더욱 세게 졸라맸다.
마치 서브미션 기술을 걸 듯이.
크흠, 이쪽도 옛날 그대로였다. 기술 접수가 찰지다.
그 상태로 전음을 보냈다.
<우철아. 우철아! 그래, 나다. 나야, 나! 내가 니 사부다! 하무린! 어? 내 말 들리냐?>
정철우가 찢어질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나도 가슴이 착잡했다.
몇십 년 만에 처음 사부와 제자로 만나는 순간인데 대체 이게 무슨 난장판이냐······.
홍길동전은 카타르시스와 감동이 있었고 스타워즈는 충격적이었잖아.
그런데 나는 왜······.
내 손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정철우의 눈물이 뜨끈했다.
이 혼돈의 카오스. 대환장파티 같은 상황조차 녀석의 감동을 꺼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는가.
뭐랄까. 굉장히 압도적으로 미안했다.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어라.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손을 타고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정철우가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제서야 안심이 들었다. 자기가 한 약속을 어길 애는 아니니까.
그렇게 합의가 끝나고 이제 자세를 풀어주려고 했는데, 어느새 헌터 애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서 있었다.
우물쭈물 서로 눈치를 본다.
정예슬이 소리쳤다.
“다들 뭐해요. 빨리 말려요!”
그제서야 모두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에헤이. 쌤 왜 이러세요, 진짜!”
“저러다 죽겠어요!”
“다 같이 끌어당기자. 자, 하나 둘 셋!”
힘없이 끌려나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헌터 애들의 긴장된 모습에 마음이 아파 왔다.
나는 지금껏 잘못된 길을 걸어왔던 건가······.
변명처럼 읊조렸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되려 내가 당할 것 같았습니다······.”
이런 걸로 해명이 되나 싶었는데 의외로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히려 정철우를 향해 감탄한 눈빛을 보낸다.
정작 그 정철우는 여전히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오늘 훈련은 이만 하죠. 모두 해산하세요.”
저기 멀찍이 이수민이 아까부터 지현이 눈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그제야 떼어낸다.
심각한 월권행위지만 지금만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우리 딸에게 보여주기엔 교육상 지나치게 좋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래도 사운드는 들렸을 거 아냐.
지현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보는 게 두려워 나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
한 시간 후 간단한 호구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럼 물어본다. 내가 혼자 술 마시면서 제일 욕 많이 한 사람은?”
“제갈경 군사입니다.”
“이유는?”
“누가 봐도 맞는 말을 누가 봐도 얄밉게 해서 그렇습니다.”
“집무실에 도자기 좋은 거 내가 홧김에 깨먹은 적이 있는데 그게 언제냐.”
“부맹주한테 여론조사 밀리셨을 때입니다.”
“그때 내가 어떻게 했지?”
“맹에서 삼십 리 정도 떨어진 뒷산에 벽력탄 묻어두고 사흘 후에 터뜨려서 위기감을 조성하셨습니다.”
그건 좋은 전략이었지.
덕분에 맹주직 한 번 더 해먹을 수 있었다.
“원로원에서 너 처음 데리고 왔을 때 내가 한 말은?”
“이 새끼 이거 간자 아냐? 나중에 잘못 걸리면 노친네들도 책임질 일 있을 테니 각오하고 있으쇼.”
대사는 똑같긴 한데, 내가 그렇게 험악하게 말했다고? 으음······.
“태산 쪽에 무슨 혈 뭐시기 비급 나돈다고 난리 났을 때 내가 너 데리고 가서 찾아냈지. 그때 비급 찢으면서 뭐라고 했냐.”
“꼬우면 덤벼보든가, 좆밥 새끼들아.”
참고로 세인들한테는 ‘피로 쌓아올린 무공이란 무용할 뿐이니 업보는 내가 감당하리다. 모두 돌아가시오.’ 라고 알려져 있다.
아무튼 완벽하다. 얘 우철이 맞네.
그래도 하나 정도 더 확인해 두고 싶었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게 마지막 질문인데.”
“네. 하문하십시오.”
“거 나 황산 가던 날 있잖냐. 그때 너랑 나랑 마지막으로 대화한 내용. 기억나냐?”
지금까지 막힘없이 대답하던 정철우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허공을 올려다보다가 어렵게 말을 꺼낸다.
“다시 뵙게 되면······, 그때는 사부님으로 불러도 되겠냐고······.”
팔을 벌리고 다가가 녀석을 한 번 안아줬다.
“그래. 사부 맞다. 내가 네 사부야.”
“네, 네. 사부님······.”
“어? 이 새끼 사내놈이 울긴 왜 우냐. 옷 젖는다니까? 너 나중에 맹에서도 한 자리 크게 해먹었을 거 아냐. 무슨 코찔찔이처럼 우냐, 울기는.”
정철우의 등을 툭툭 두들겨줬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던 짐 역시도 하나 정도는 씻겨내려가는 것 같았다.
내 제자로 행세해봐야 나 죽고 나면 좋을 거 하나도 없을 걸 나는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거리를 뒀고, 대하는 게 서툴러도 고칠 생각을 안 했지.
하지만 그건 전생이다. 여기서야 누가 건드리겠어.
그렇게 첫 제자를 얻었다.
***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옛날 이야기만한 술 안주가 흔치 않은데 심지어 그 이야기 보따리란 게 몇십 년치였다.
술병이 금방 테이블에 쌓였다.
“그래서 말입니다. 네? 제가 그랬죠. 이 미친놈들, 맹주님이 돌아가셔? 맹주를 새로 뽑는다고? 이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 너네 다 뒤지고 싶어? 이랬죠. 크으.”
이놈이 맨정신에 그렇게 쌍욕을 했다고? 그걸 못 봐서 아쉽네.
“근데 뒤진다는 건 어떤 의미냐?”
“알잖습니까. 저한테 뒤진다는 의미도 있고오, 또 사부님 돌아오시면······. 흐흐.”
내공은 하나도 안 쓰고 먹다 보니까 이놈 벌써 눈이 풀렸다.
평소에 몸가짐 바르다가 술 들어가면 비교적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애들이 있는데 우철이, 그러니까 정철우도 꼭 그런 케이스다.
“아무튼 저어는, 너어무 좋습니다. 크으. 취하네요.”
“지금이야 나 있으니까 옛날 얘기 해도 되는데 집 가면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마라. 그러다 머리 깨져.”
무적신공 운용해서 정기신을 잡아줬기에 망정이지 그거 아니었으면 얘 아까 응급실 실려갔을지도 모른다.
안정되기 전까지는 너무 전생에 대한 걸 많이 떠올려서 좋을 게 없다.
“그러네요. 지금도 좀 오락가락합니다. 정신 제대로 차리고 나면 복수도 해야 하는데······.”
왔다.
중요한 순간이다.
“우철아. 사실 그거 말인데-”
“사부님 그렇게 안 돌아오시고요. 저 진짜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루 두 시진 자고 칼만 휘둘렀습니다. 제가, 제가 제 손으로 복수하려고, 십만대산에 백년 동안 살아 있는 것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려고, 저 열심히 살았습니다······.”
아니. 이게 고맙긴 한데, 뭘 또 그렇게까지 하고 그러냐······.
위가 쓰리다. 초코우유가 필요해.
“그놈의 입신경. 입신경! 잡힐 것 같이 아른아른거리는데 정작 손에는 안 닿고. 허송세월만 보내다가 진천군 그 새끼 잡을 때 목은 제가 베고 싶어서 갔는데 오히려 제 팔만 뎅강 날아갔죠. 흐흐.”
“······.”
“그러다 정마대전 벌어지고 아주 난리통이었는데 몸도 좀 회복되고, 마교놈들 망하는 건 제 눈으로 봐야겠다 싶어 십만대산 땅은 밟았습니다.”
속이 한층 더 따끔거린다.
설마 전생에서 우리 딸이랑 칼 들고 싸운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혹시 그러면 거 칠대천마 걔랑 싸우기도 했냐?”
천만다행스럽게 고개를 젓는다.
“성화인가 뭔가 도깨비불 같은 게 터지는 건 봤는데 제대로 싸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지금에서야 복수할 수 있으니 다행이죠.”
“······어?”
“아까 그 유지현이라는 애 있잖습니까. 놀라지 마세요. 걔가 그 칠대의 환생입니다.”
뭔 대단한 비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한다.
응. 내가 제일 먼저 알았어.
그나저나 슬슬 손이 떨린다.
안 돼. 안 된다. 참아야 해.
“백운상이한테는 복수 못해도, 그래요. 칠대는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서도 제가 적어도 사죄는 시켜야겠습니다. 못하겠다고 하면 힘으로 제압해서라도요. 천하를 어지럽게 한 책임과 천마일맥이라는 원죄를 무릎꿇고 사죄하게- 으악!”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병에 담겨 있던 술이 흩날렸다.
아픈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충격에 휩싸인 정철우가 말한다.
“왜 그러십니까아.”
아니, 이게 좀 그렇잖아.
내가 일단은 하소연 다 듣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우리 딸을 힘으로 어쩌고 무릎 어쩌고는 좀 심한 거 아니냐······.
다짜고짜 말했다.
“우철아. 나 결혼했다.”
“정말이십니까? 아아, 사부님도 드디어······!”
“왜, 결혼할 수도 있지. 나 지금 서른네 살이거든.”
“저는 서른다섯······.”
그래서 뭐.
어쩌란 건데.
나이는 전생의 출생년도부터 카운트하자 이 말이야.
“아무튼 그리고 딸도 있어.”
“아아. 아······! 아가씨까지······! 오늘 정말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겨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크흡.”
왜 또 울고 그러냐.
좀 있다가 다른 일로 울고 싶을지도 모르는데.
정철우가 물었다.
“그러면 지금 유치원 들어가셨습니까?”
“열네 살인데? 올해 중학교 일학년.”
“앗······.”
보디블로를 맞은 듯이 일순간 충격으로 물들었던 정철우의 얼굴이 곧 긍정적인 기색으로 바뀌었다.
“그렇죠. 역시 사부님. 결단이 빠르십니다. 일찍 키워서 노후에 편하게 살면 그게 행복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많이 바쁘시겠군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번에 백화점 지나면서 보니까 요즘 가방 좋은 거 많이 나왔던데 선물로 드리는 것도-”
어떻게든 나를 좋게 보려고 하고, 내 딸한테 뭐라도 해주고 싶어 하는 저 노력이 눈물겹지만 말 꺼낸 거 마무리는 지어야겠다.
“사진 보여줄까?”
“네, 일생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사진첩에 들어가 사진 하나를 터치했다.
단독주택 마당에서 중학교 교복 입은 여자애 하나가 씩씩하게 웃고 있고, 바로 뒤에 남자 한 명이 서 있는 사진이다.
그러니까 지현이와 내 사진.
그걸 보여줌과 동시에 역용을 풀었다.
지금부터는 스미스가 아닌 유수현의 모습이다.
“깜빡 말 안 했는데 나 역용하고 있었다. 저기, 우철아? 들리냐? 우철아?”
대답이 없다.
정철우는 그냥 입만 떡 벌리고 사진과 나만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
“어, 어······? 이게······.”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입맛이 더 쓰구만.
우철이만 해도 이 정도인데 우리 딸이 알게 되면······.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설명을 이어가야 했다.
우철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모든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게 복잡하게 꼬였는데 설명하려면 좀 길거든. 유지현. 지현이. 걔가 내 딸이야.”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정철우가 겨우 말했다.
“그, 그러면······.”
“그래. 말해.”
“사모님은 혹시······, 백가 그놈입니까?”
조용히 오른손을 뻗어 소주병을 들었다.
퍼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