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37화 (37/130)

37. 정의란 마치 북극성과 같은 것.

“······.”

나라고 미안한 마음이 안 드는 건 아니다.

지현이 안전을 위해서라곤 해도, 이렇게 백기투항하는 애를 속여먹는다고 생각하니 양심이 좀 많이 찔렸다.

이수민 어깨를 툭툭 두들겨 자세를 바로 해주고는 말했다.

“용건 끝났으니까 이제 들어가도 돼. 밤늦게 불러서 미안했다.”

대답 안 듣고 그대로 이수민을 지나쳐 걸었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꼭 약속 지켜줘······. 꼭이야!”

그래. 그야 물론이지.

지키고말고.

모든 게 잘 풀리고 나면 우리 관계도 전보다는 나아지겠지.

***

훈련장에서 만난 남자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정철우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헌터 정철우.

나이는 서른다섯이고 각성자 등록을 한 지가 십 년이 넘은, 비교적 초기부터 활동해 온 헌터다.

이수민과 지현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마나 감응력 측정불가 판정이 뜬 남자.

지금껏 세운 업적 측면으로나 전투능력으로 보나 한국에서는 사실상 톱이라고 봐야 했다.

헌터 일하면서 전력으로 싸우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 이수민보다 평가가 높아서 대체 어느 정도인가 궁금했었는데······,

아무래도 허명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이놈 꽤 세다는 말이다.

강호무림의 기준으로 절정의 끝자락.

어떤 계기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입신경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 한 발을 끝내 못 내딛고 저세상 가는 케이스가 대부분이긴 하지.

당장 전생의 이수민만 해도 내 조언이 없었으면 입신경에 들어서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정철우 정도면 지금 상태로만 따져도 아주 준수한 편이다.

특히나 현대 기준으로 보면 더더욱.

게다가 이서준 말마따나 이놈 인상부터 선해보이는데······.

“이제서야 인연이 닿아 인사를 드리지만 스미스 님 이야기는 계속 듣고 있었습니다. 존경합니다.”

다짜고짜 고개를 숙인다.

왜 이래. 나 이런 거 부담스럽다고.

“지니신 힘이 강하다고 해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 건 경탄의 대상이 될 수는 있더라도 존경을 논할 문제는 아니니까요. 스미스 님이 보여주시고 계신 삶의 자세. 큰 힘을 가지고, 또 큰 책임을 짊어지시려 하는 그 자세가 존경스러웠습니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그만, 제발 그마안!

너 말하는 거······. 오글거린다고······.

대체 이놈 주위 사람들은 뭘 한 거지?

아무도 충고해주지 않았던 건가?

아니지. 지금 상태를 봐서는 충고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을 가능성이 더 크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정철우가 계속해서 말했다.

“분수에 안 맞게 이런저런 일을 하려다 보니 가끔 힘에 부치는 적이 더러 있었습니다. 요즘은 특히나 그랬죠. 그러다가 스미스 님 얘기를 듣고, 저도 많이 용기를 얻고는 했습니다. 가능성 있는 헌터들의 훈련이나 고레벨 던전들에 들어가길 자처하시고. 정말 대단하세요. 오늘 이걸로 스미스 님과 같이 훈련해 보고 싶었던 소원은 이뤘으니 다음에는 어떠신가요. 저랑 던전도 한 번 들어가 보시는 건. 하하하.”

후······. 역시 어느 시대에나 인재는 있는 법이구만.

이 새끼, 나랑 완벽하게 상극이다.

내가 이런 거에 좀 약하단 말이지.

솔직함으로 무장한 오글거리는 말투, 티끌 하나 없이 맑고 순수한 동경심. 뭐, 그런 것들.

덧붙여서 이놈 말도 겁나게 많았다. 투머치토커의 자격이 충분했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어서 황급히 말을 꺼냈다.

“저기 실례지만······,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 네. 다녀오시고 다시 이야기하시죠. 하하.”

미안한데 나는 싫다. 압도적으로 싫다.

공터 아래 쪽에 있는 화장실 쪽으로 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대단히 굴욕적인 기분이었다. 이런 궁색한 변명으로 자리를 피해야만 하다니.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정말로 오랜만에 맛보는 충격적인 경험이어서 달리 대처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처음이라고 하지 않는 건 전생에도 이런 놈이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그놈을 뭐라고 지칭해야 하나.

제자? 시동?

뭐라고 단정 짓기가 애매했다.

무적신공 가르쳐준 게 아니니 기명제자라고 하기엔 뭣하고, 그렇다고 시동으로만 보기도 좀 그랬던 사내 녀석이 하나 있었지.

자기 스스로도 저어되는 바가 있었는지 그놈이 나를 부르는 호칭도 항상 맹주님이었다.

자기도 가슴에 맺힌 게 있던지 언젠가 한 번 술이 떡이 돼서 횡설수설하던 적도 있었고.

무적신공 배우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던 걸 내가 모르는 건 아니었지.

하지만 그거 가르쳐줬으면 그놈 인생이 그 후로 순탄치가 않았을 거다.

지금 생각해도 안 가르쳐주길 잘했다.

그러고 보니 백운상이 보러 황산 가던 날에 ‘돌아오시면 사부님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라고 나한테 물었던 건 기억이 나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대답을 뭐라고 했더라?

어차피 다시 못 돌아갔으니 큰 의미야 없겠지만서도.

그놈한텐 미안한 감정도 있다.

나도 대하는 게 서툴러서 따뜻하게 대해준 적은 별로 없고, 무공 가르쳐 줄 때도 주로 실전 형식으로 가르쳐줬으니까.

다시 말해 많이 맞으면서 배웠다는 소리지.

그런데도 항상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녀석이었는데······. 나 없어지고 나서도 잘 살았으려나 모르겠네.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치고 다시 공터로 들어섰다.

담소를 나누는 중이던 헌터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중에서도 내 시선은 이수민과 지현이, 그리고 정철우에게 쏠려 있었다.

계획대로 셋이 근처에 있구만.

“자, 이제 훈련 시작합니다.”

***

헌터 정철우는 몹시 들뜬 기분이었다.

마음속으로 깊이 존경하던 스미스를 드디어 만났기 때문이다.

역시나 생각했던 그대로 인격적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정철우는 자신의 안목을 대단히 신뢰했으며, 짧은 시간 동안 나눈 대화만으로도 존경심은 더욱 커졌다.

사촌동생 이서준에게 들었던 유지현이라는 여자애와도 인사를 나눴는데,

이렇게 귀엽고 착한 여자애가 나쁜 놈들 대장이었다니 그건 아무래도 믿기지가 않았다.

‘나야 전생이니 뭐니 하는 건 잘 모르겠단 말이지.’

이따금 꿈을 꾼다.

모든 게 안개처럼 흐리기만 해서, 깨고 나면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스쳐가는 몇 가지 이미지들.

거기서 자신은 누군가를 한없이 동경했던 것 같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랐으며,

또 누군가를 미워했던 것 같다.

정철우에게 전생이란 그 정도의 일일 뿐이다.

한데도 이서준에게 힘을 실어준 이유는 단 하나.

실낱 같은 가능성이나마 괴수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면, 이라는 소망에서였다.

그걸 알려면 이 애와도 좀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겠지.

어쩌면 자신도 갑자기 각성해서, 그 기억 속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정철우는 적잖은 호의와 결의를 담아 유지현에게 말했다.

“지현아? 지현이라고 불러도 되나? 오늘은 잘 부탁한다.”

유지현이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네! 아, 그리고 아저씨······.”

“응?”

“이거 훈련 끝나고 나면요. 혹시 실례가 안 되면 사인 몇 장만 부탁 드릴 수 있을까요? 그게, 친구들 중에 아저씨 팬이 있어서요······.”

조금 부끄러운 듯이 유지현이 몸을 베베 꼬았다.

정철우는 웃었다.

“당연히 되지.”

“진짜요?”

“몇 장 필요한지 나중에 말해줄래?”

“네, 감사합니다!”

밝은 어조로 돌아오는 대답에 정철우는 생각했다.

‘정말 착하고 좋은 애야······.’

***

아무래도 흑막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잠정적으로 결론 내렸다.

정철우는 테스트를 완벽하게 통과하는 중이다.

우선 맨 처음 인사를 나눌 때 사람됨을 살폈다.

심성은 더할 나위 없이 선한 게 맞았다.

물론 그것만으로 안심을 할 수는 없다.

착한 놈도 핀트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결과적으로 못된 짓을 저지를 수도 있는 거니까.

이 경우에는 정철우가 사실은 전생을 기억하고 있으며 마교에 강력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우려한 건데, 이것도 문제 없어 보인다.

우리 딸과 마주쳤을 때 감정적으로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니 이수민과 내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세 번째 테스트다.

내가 말했다.

“정철우 씨, 이쪽으로 나와주시겠습니까.”

대련을 빙자한 마지막 확인.

무적신공을 운용해서 내면을 들여다 볼 거다.

이것까지 통과하면 더 의심할 것도 없다.

추후에 신사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

한데 몇 번의 공방을 나누고 거리를 벌린 직후, 갑자기 정철우의 표정이 격하게 일그러졌다.

머리를 감싸쥐고 거칠게 숨을 내뱉더니 얼떨떨한 얼굴로 한 손을 뻗는다.

저쪽 편에 이수민과 함께 서 있는 우리 딸을 향해서였다.

“너, 너! 처, 처······.”

뭐야. 저 새끼 갑자기 왜 저래.

정철우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아니, 외치려고 했다.

“천ㅁ-”

이런 미친.

더 볼 것도 없다.

전력을 다해 땅을 박찼다.

***

‘뭐지?’

정철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스미스와 대련을 시작해서 손발을 맞대고,

형언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운이 자신을 엿본다는 걸 느낀 직후였다.

무언가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꿈속에서 언제나 동경했던 무언가와 마침내 재회한 듯한 감각.

방대한 양의 대화들.

경험했던 일들과 감정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잠식했다.

‘이게 뭐냐고!’

엉망으로 뒤섞이던 장면들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마치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수없이 많은 퍼즐이 한 번에 맞춰지듯이 순식간에 조립된다.

‘그래. 내 이름은······.’

그리고 꿰맞춰진 퍼즐들이, 원래 알고 있던 사실 하나와 연결됐다.

정철우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조금 전까지 착하고 귀엽다고 생각하던 여자애. 유지현을 향해서.

‘네가, 네가······!’

마침내 소리내어 그 이름을 외치려 한 그 순간,

콰아앙!

어마어마한 충격이 정철우의 갈비뼈에 작렬했다.

***

정예슬은 생각했다.

‘이게 뭐야. 몰래카메라야?’

스미스 쌤과 정철우 씨가 대련하다가,

갑자기 정철우 씨가 뭘 말하려고 했는데,

스미스 쌤이 정철우를 때렸다.

조금 전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순수한 사실에만 입각해 설명하자면 그러했다.

그래.

방금 그건 때린 거다.

가격했다거나, 공격이라거나, 습격 같은 표현을 쓰기는 좀 그랬다.

그냥 때린 거다.

땅을 박차고, 가로로 날아서, 그대로 주먹으로 갈비뼈를 때린 거란 말이다.

‘무슨 아톰이냐고······.’

갑자기 얻어맞은 정철우는 십 미터도 넘게 나가떨어졌다.

지금도 자꾸만 뭔가를 외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스미스의 무자비한 타격 앞에 소리가 무력하게 뭉개졌다.

조금 망설이던 정예슬은 마음을 굳게 먹고 주위를 돌아봤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저거 그래도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좌중의 모두가 침묵했다.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물론,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정예슬은 알고 있었다.

정의로운 행동이란 마치 북극성 같은 것이어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정표가 되지만

너무 멀리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주먹은 언제나 그보다는 좀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미안, 미안해요······.’

마음속으로 사과한 후 정예슬도 다시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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