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34화 (34/130)

34. 아아, 이것은 부모의 격이라는 것이다.

근데 이 자식은 오늘 목소리가 왜 이래?

무슨 나쁜 짓 생각하다가 걸린 사람 같은데.

요 근래 격의 차이를 과시 당한 여파인가?

원래도 유력 용의자였지만 좀 더 격렬하게 용의선상에 두고 싶어졌다.

"네. 지현이 아빠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네, 네. 잘 지냈어요. 그런데 전화는 왜······.>

왜긴 왜야. 내가 너한테 전화할 용건이 지현이 일 말고 또 있겠냐.

"아, 지현이가 아직 집에 안 들어와서요. 혹시 이수민 씨가 지현이 봐주고 있나 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지현이 보호자로서 이놈과 나는 완벽히 상하관계에 있다.

순순히 실토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수민이 말하는 게 내 예상과는 달랐다.

<네? 지현이 아까 훈련 끝나고 못 봤는데······, 집에 없나요?>

"이수민 씨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네.>

"훈련 끝난 게 몇 시쯤이죠?"

<이제 세 시간 다 돼가요.>

세 시간. 세 시간이라.

그 정도 연락 안 되는 게 아주 있을 수 없는 일이냐고 하면, 물론 그건 아니다.

친구랑 이야기하다가 휴대전화 못 볼 수도 있는 거고 어디 영화 같은 걸 보고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뭔가 느낌이 안 좋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자 수화기 너머에서 이수민이 말을 걸어 왔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스미스라는 사람 기억하시나요? 그 사람이 데려갔을지도 몰라요!>

이건 또 뭔 개소리야. 그 스미스가 나라니까, 이 미친놈아.

내가 황당해하는 것도 모르고 이수민이 말을 쏟아냈다.

<맞아. 그놈이 분명해요. 제가 주의했어야 하는데. 이 나쁜 새끼, 지현이한테 손끝 하나라도 대봐. 내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버릴 거야······!>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말투가 격렬해진다. 마지막에는 숫제 저주에 가까웠다.

뒷목으로 싸한 기운이 감돈다.

이 새끼······. 역시 제정신이 아니야.

"일단 진정하시고, 전화 끊은 다음에 지현이한테 한 번 더 연락해보겠습니다. 아니면 오늘 훈련할 때 혹시 이상한 거 없었습니까?"

<이상한 거, 아뇨. 딱히 없었어요. 그냥 정철우 씨 추천으로 새로 두어 명 온 거 말고는······.>

"정철우 씨요? 헌터 정철우 씨 말하는 겁니까."

"네. 그 정철우 씨요."

정철우라고 하면 이수민이랑 함께 한국에서 한 손에 꼽히는 각성자다.

지현이 각성자 테스트 때 받았던 마나 감응력 측정불가 판정.

국내에서는 지현이까지 포함해 세 명밖에 없는데 그중 하나가 이수민, 나머지 한 명이 정철우다.

나이대는 나랑 큰 차이 안 날 거고 나름대로 평판도 좋은 걸로 안다.

근데 정철우가 갑자기?

<오늘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이번에 새로 각성자 된 사람들 있는데 정철우 씨 지인이라고 하더라고요. 신원보증도 확실하고 해서 참관식으로 하루 봤는데······.>

이 정도 알았으면 됐다.

"알겠습니다. 갑자기 전화 드려서 실례했습니다. 지현이랑 연락 되면 이수민 씨한테도 말씀 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는데 부아아아앙- 굉음이 울렸다.

이 새끼 화장실에 있었나? 소리 한 번 요란하네.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김유진에게 연락해서 새로 왔다는 놈들 번호를 얻어냈다.

연락이라도 해 보는 게 좋겠지 싶어 휴대전화를 드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나가봤다.

이수민이었다.

얼굴이 시뻘개져서 고개를 숙인다.

"너무 걱정이 돼서······."

그래. 비록 왜곡된 사랑일지언정 우리 딸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내가 인정해 주마.

근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이수민 씨 집에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아뇨, 차에서 막 내리려는데 전화 오셔서······."

"굉장히 빨리 오셨네요."

"밟으면 얼마 안 걸려요."

신호발도 잘 받았다면서 이유 모를 변명을 해댄다.

그나저나 아까 그건 엔진 소리였던 건가.

"아무튼 오셨는데 앉으세요."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신고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실종신고는 초기 대응이 중요하고요·."

완전히 낑낑대는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마침 잘 됐다 싶어 내가 말했다.

"휴대전화 한 번 들어보시죠."

"······?"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말은 또 잘 들었다.

"내가 말한 번호로 전화 한 번 걸어주시겠어요? 번호가 010에······."

이수민에게 알려준 번호는 조금 전에 김유진에게 받았던 연락처였다.

솔직히 큰 기대 없이 연락한 건데······.

"네, 네. 이수민입니다. 오늘 참관 어떠셨나 해서요.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아, 밖이시네요. 카페요? 나머지 한 분도 같이 계시다고요."

막상 전화하니까 나름 침착한 태도로 이수민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통화하고 있는 저 사람은 자기들이 유괴범 비스무리하게 취급되고 있는 걸 전혀 모르겠지.

지금 보니까 실제로도 아닌 것 같고 말이야.

그래도 뭐라고 말하나 들어보자 싶어 이수민 쪽으로 몸을 갖다댔다.

이수민이 슬쩍 거리를 벌린다.

뭐하냐. 같이 좀 듣자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이수민에게 일렀다.

"스피커폰 해주세요."

왠지는 모르겠는데 이수민이 당황한 얼굴로 스피커폰을 켰다.

그리고,

<어? 수민 언니랑 통화하는 거예요? 언니!>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지현이 목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틀린 게 없네.

지현이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오 분 걸리는 카페에 있었다.

휴대전화는 배터리가 다 돼서 카운터에 충전을 맡겨 뒀다고 했다.

이수민과 함께 카페에 도착해 보니 테이블 하나가 아주 화기애애했다.

지현이 있는 테이블. 지현이까지 포함해 네 명이었다.

남녀 두 사람은 오늘 참관한 헌터들이라고 하고, 나머지 한 명은······.

"어? 저 사람?"

"맞죠?"

저거 그 인간이잖아. 정파 에이스. 저 새끼가 왜 여깄어.

지현이가 이수민과 나를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었다.

"아빠 여기, 여기!"

***

자초지종은 이랬다.

"그러니까 이분이 지현이 소설에 댓글 다신 그분이라고?"

"응!"

마주 인사를 했다. 사실 초면은 아닌데.

결과적으로 잘 풀렸다고 해도 우리 딸 속상하게 만든 놈이라 마음이 편하진 않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이 새끼 열 손가락에 통깁스하면 제법 멋있을 것 같단 말이지. 좀 아쉽네.

"알고 보니까 이번에 각성자 되신 이분들이랑 친한 사이고?"

"응!"

호오, 그것 참 대단한 우연이군.

"이분들도 딸이 쓴 소설에 그······."

"응, 완전 애독자시래!"

이건 정말 믿을 수 없는 기적이고.

"집 근처까지 데려다 주신 다음에 같이 소설 얘기 했고?"

"응, 응."

지현이가 어깨를 으쓱한다. 굉장히 뿌듯해 보인다.

"그런 말도 있잖아.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법이라고. 역시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내가 쓴 걸 알아보나봐. 수민 언니도 그렇고!"

우리 딸이 똑똑하고 착하고 다 좋은데, 그놈의 소설 얘기만 나오면 대체 왜······.

지현이랑 같이 있던 세 놈 얼굴을 쳐다봤다.

피로감이 가득해 보인다.

그래.

정신적인 고문을 두 시간이나 받으면 피폐해질 만도 하지.

그리고 알았다.

애독자는 개뿔,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야.

멍청한 놈들이 어디 핑계 댈 게 없어서 우리 딸 소설을······.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일단 자리를 정리해야 됐다.

정중히 인사를 했다.

"우리 딸이 실례가 많았네요."

"아뇨, 아뇨. 재밌게 시간······, 보냈습니다."

악수를 했다.

조만간 다시 볼 일이 있을 거야.

그때는 내가 더 재밌게 해줄 건데 기대해도 좋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지현이에게 말했다.

"유지현. 여기 앉아."

지현이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어? 아빠?"

"어서 앉아."

"으응······."

"자세 바로 앉아. 아빠 이야기할 거니까."

"힝······."

지현이 표정이 흐려졌다.

오늘은 혼 좀 나겠구나 싶나 본데.

"연락 안 받으면 아빠가 걱정하는 거 알아, 몰라."

"알아. 근데, 근데 집 바로 근처였구 시간도-"

"딸, 아빠는 그걸 모르잖아. 그치?"

"응······."

"유진 언니도 걱정하고, 아빠도 엄청 걱정하고, 그리고 수민 언니도. 딸 연락 안 된다 그래서 엄청 걱정했어."

갑자기 자기 얘기가 나오니 멀뚱멀뚱 근처에 앉아 있던 이수민이 당황해 했다.

아까 그놈들 앞에서 우리 딸 혼낼 수야 없지만, 이수민 정도는······, 괜찮겠지.

우리 딸이랑 친하기도 하고, 이 새끼도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제자라도 무작정 싸고 돌면 안 된다는 걸.

"잘못했어요······."

지현이가 힘없이 말했다.

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 무작정 혼내는 느낌 주는 것도 애한테 안 좋겠지.

지현이 쪽으로 가서 이마에 손바닥을 얹었다.

"아빠 걱정 많이 했어. 딸도 아빠가 연락도 없이 안 들어오면 많이 속상하겠지?"

"응, 엄청 걱정되고 속상할 것 같아."

"아빠도 지현이 엄청 사랑하니까, 많이 걱정되고 속상하거든. 그래서 아빠도, 지현이도 둘 다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연락 꼬박꼬박 하기로 하자. 아빠랑 약속해 줄 수 있어?"

"응, 응. 미안해요, 아빠······."

그리고 마지막으로 밝게 말했다.

"고맙네, 딸이 그렇게 말해줘서. 그러면 우리 초밥이나 시켜먹을까?"

"응, 좋아!"

여전히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던 이수민이 중얼거렸다.

"저기, 여름에 회는 별로 안 좋지 않을까요······?"

"뭡니까. 그래서 안 먹고 그냥 갈 겁니까?"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뇨, 아뇨. 감사히 먹고 가겠습니다."

"뭘로 하시겠어요?"

"저는 그러면 기본 세트로······."

그래도 양심은 있군.

***

이수민은 깨닫고 말았다.

아아- 그런가.

저것이 바로 부모의 '격'이라는 것인가······.

이상적인 아빠와 딸이라고, 이수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패배감과 함께 초밥을 먹으며, 이수민은 유수현과 유지현의 화목한 모습을 가없이 바라봤다.

"아빠, 이거 먹어봐. 엄청 맛있어."

"딸 많이 먹어. 아빠는 배부른데?"

"나한테 다 줬는데 왜 배가 불러?"

"우리 딸 먹는 것만 봐도 좋아서 그러지."

"히히, 나도 아빠 먹는 게 더 좋은데."

부들부들, 손이 떨렸다.

그리고 이수민은 생각했다.

'나도, 나도 할 거야······!'

그렇게 하려면, 그러려면······.

***

다음날, 김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유진 씨. 저 사흘만 원래 부서 쪽 출장 처리 좀 해주십쇼. 뭐라고요? 너무 갑자기라고요? 거 우리가 한 배를 타도 보통 같이 탄 게 아닌데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어우, 좀 섭섭해지려고 하네."

"안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고요? 아니, 또 제가 언제 협박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아아,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는 말씀이시죠? 그쵸, 제가 또 김유진 씨 아니면 누굴 믿겠습니까.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아주 순조롭게, 아무런 잡음 없이 휴가를 얻어냈다.

사흘의 여유.

사냥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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