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33화 (33/130)

33.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이서준의 말에 모여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폼 안 잡고 말하면 안 되나?”

“진짜 대사 극혐이다······. 누가 보면 영화 주인공인 줄.”

“꼭 세상씩이나 바로잡아야 해요?”

“끝나고 맘스터치 먹으러 갈 사람.”

“나 갈래.”

이서준의 입에서 맥빠진 한숨이 나왔다.

정말로 이 나사빠진 놈들을 데리고 일을 도모해야 하는 건지, 회의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다들 능력은 꽤 되는 편이니까.

마음을 다잡고 이서준이 다시 이야기를 하려는 차에 누군가 손을 들었다.

“근데 오빠 질문 있는데요.”

“무슨 질문.”

“그래서 그 소설 쓴 중학생이요. 걔 정체가 뭔데요? 그걸 확실히 말해주셔야지.”

이서준은 분위기 잡는다고 애매하게 말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답했다.

“일단 최소치로 잡으면 마교의 후손.”

누군가 ‘최소치 특징) 사실 최대치임. 거기까지 절대 못 감’ 따위의 말을 구시렁거렸지만 이서준은 상관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마교도의 환생. 그러니까 나처럼.”

나름대로 마음먹고 꺼낸 정보였는데 어째 반응이 생각하던 것처럼 나오지가 않았다.

“젠장, 믿고 있었다구.”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이상한 흉내를 내거나.

“환생자 대 환생자. 이거는 월천각 낭낭하다.”

실없는 소리를 하거나.

“근데 환생이라는 거 나 솔직히 못 믿겠는데.”

“왜? 나야 환생 아닌 것 같으니까 그렇다 쳐도, 너는 어제도 꿈꿨다면서.”

“어, 그니까 꿈이잖아. 그냥 꿈. 내가 왜 전생에 중국 사람이야? 나는 싫은데?”

“근데 왜 일일 드라마처럼 맨날 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해도 몸은 솔직해서 좋다야.”

“중국몽, 우리 모두 함께 합시다.”

혹은 시큰둥하거나.

이서준은 절망스러웠다.

‘사부님. 제가 정말로 이런 놈들과 같이 대업을 이뤄야 합니까······.’

“근거는 몇 개 있어. 일단 자기가 전생에 천마라고 남긴 댓글.”

“그거 비추천 백 개 넘겼잖아요. 보다가 웃겨 죽는 줄.”

“추천은 이백 개 찍었던데? 아무튼 그 다음은요?”

“두 번째는 정보량. 내가 만나보니까 걔가 사실관계를 너무 잘 알아. 실제로 경험한 게 아니면 나오기 힘든 말이었고, 높은 확률로 마교 쪽 사람이었을 거야.”

“꼭 대장이라는 법은 없잖아. 고위층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어디 엑스트라7이었는데 얘기만 들은 걸 수도 있는데.”

나름대로 일리 있는 지적이었지만 이서준은 거기에 대해서도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려울 것도 없다. 한 마디 하는 걸로 충분했다.

“칠대 천마 작가 이름이 유지현이더라.”

“유지현. 유지현? 어디서 들어봤는데?”

“걔요? 최연소 S랭크 어쩌고 하던. 걔도 여자고 중학생이잖아.”

이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전생에 천마였다고 주장하고, 중학생인데 벌써 알아주는 각성자에, 걔가 소설이라고 써놓은 활자혼합물은······, 너네도 읽어봤지?”

“그건 인정. 완전히 정신승리 그 자체.”

“이 정도면 합리적으로 의심할 만하지 않을까?”

“흠, 일리가 있네요.”

“그럼 오빠 말이 전부 맞는다고 치면 우리가 어떡하면 되는데요?”

드디어 이야기가 올바른 흐름으로 돌아왔다.

약간의 흐뭇함과 함께 이서준이 말했다.

“걔한테 물어봐야지.”

“어떻게요?”

“데리고 와야지.”

“걔가 싫다고 하면요?”

“최선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강제로요? 중학생을?”

“······그래. 중학생을.”

‘인간 말종’ ‘경찰에 신고해야 될 것 같은데’ 따위의 지방방송은 모조리 무시했다.

이서준이 변명처럼 말했다.

“어쩔 수 없어. 이거 나 좋자고 하는 거 아니다. 농담이 아니라 무슨 게이트니 어쩌니 하는 게 다 걔랑 연관 있다니까?”

“소올직히 이건 음모론이다.”

“인정. 전생 같은 거 믿는다 쳐도, 몇백 년 전에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랑 지금 몬스터 나오는 거랑 무슨 상관이람?”

“이 자식들 진짜······.”

이서준이 한탄스럽게 내뱉었다.

이놈들은 모른다.

기억이 안 나거나, 혹은 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서준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강호무림과 그때 겪었던 일들을.

혈천무제 진천군을 제거하기 위해 일천 명의 고수가 동원됐다.

성 하나에 걸쳐서 펼쳐낸 천라지망은 오롯이 진천군을 위해 마련된 무덤이었다.

그건 진천군을 제거할 유일한 방법이었고,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실책이기도 했다.

한 명의 무인이 다수를 상대함에 있어 고금제일의 무공은 반론의 여지없이 천마신공이었고, 무제 진천군은 당대 천마신공의 계승자였으니까.

사흘간의 혈전 끝에 천하제일인 진천군이 죽었다.

그러나 정파무림의 고수는 자그마치 오백 명이 죽었다.

사백은 불구가 됐다.

오직 백 명만이 남았다.

그리고 당시 나이가 고작 이립, 서른 살에도 한참 모자랐던 천마신교의 어린 소교주 설운혜.

한 세대 제일조차 넘어 백운상과 하무린에 버금가는 무재라 불렸으며,

일찍이 진천군을 계승해 마교의 성화를 수호하던 당대의 신녀.

그녀가 교주 자리에 올랐고, 스승의 복수를 천명했다.

자연스럽게 정마대전이 벌어졌다.

이미 막대한 희생을 치른 정파무림이 설운혜를 막을 수는 없었다.

천마신공의 오묘한 공능은 무공으로 신을 엿보지 못하는 자들이 상대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고, 당시 정파무림에는 단 한 명도 입신경에 들어선 무인이 없었다.

황실이 개입하고서야 비로소 활로가 뚫렸다.

지리멸렬한 대치와 협상.

그리고 결렬.

많은 일들이 있은 후에, 당시 강호무림의 맹주였던 이서준은 십만대산 땅을 밟았다.

성화가 있는 제단 앞에서 수십 명의 고수가 설운혜를 포위했다.

설운혜 곁에는 몇 명의 호위대 밖에는 없었다.

사투가 벌어졌고, 제단에 올라가 있던 푸른 불이 태산처럼 커졌다.

설운혜가 잠시 싸움을 중단하자 말하고는 그걸 막았다.

그리고 불길이 원래의 크기로 줄어들 때쯤,

설운혜의 등에 칼이 꽂혔다.

암습을 한 자가 누구였는지 이서준은 지금도 모른다.

설운혜가 피를 토함과 동시에 사그라들던 불길이 미친 듯이 폭주했고,

그것이 이서준이 전생에서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확실히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서준은 이 모든 일들이 우연히 벌어졌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성화의 폭발.

십수 년 전 느닷없이 생겨난 게이트와 던전.

이서준이 알기로 환생을 경험한 자는 오직 그 자리에 이서준과 함께 있던 자들뿐.

어째서인지 그들 모두가 현생에서 이서준의 지인들이었다.

‘이걸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말이 안 되지.’

그러니까 중학교 일학년이며 올해 열네 살인 유지현이를 데려다 물어본다면 뭐가 됐든 이 모든 사태에 대한 활로가 나올 거라고, 이서준은 추측했다.

어쩌면 그때 일의 사죄에 대한 것까지도.

“이거 범죄 모의 아냐? 어휴, 난 아무리 봐도 좀 그렇다.”

“오빠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꿔봐요.”

“난 아닌 것 같다 싶으면 그냥 신고할래. 포상금은 제때 입금해주십쇼. 꺼어억.”

“그거 자수한다는 말이지? 우리 이미 공범된 거 같은데.”

“이 새끼들이······.”

다음날 한국 각성자 협회에 세 명의 각성자가 나란히 신규등록을 마쳤다.

그들 모두가 단번에 A랭크 자격을 얻었다.

***

오늘은 괴상하게도 운수가 좋았다.

아침부터 지현이와 완전무결하게 화해를 이뤘다.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싶어 눈을 비비적댔다.

한 번 더 했다.

그대로다.

이게 무슨······?

지현이가 앞치마를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다.

“딸?”

“아빠, 기다려봐. 좀 있으면 밥 다 되거든. 그리고 이거 계란프라이도 할 거야.”

우리 딸이 밥을 했다고?

계란프라이를 해?

나랑 같이 먹으려고?

지현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빠 왜 계속 눈 만져? 어디 안 좋아?”

“아니, 아니이. 그냥 하품이 나서 그래.”

그래, 하품 때문에 눈물이 난 거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내가 스물한 살에 지현이 태어나고부터 햇수로 십사 년.

우리 딸한테 처음 받아보는 밥상이지만, 날아갈 것처럼 행복하지만 결코 그것 때문에 운 게 아니다.

내가 왜 울어? 지현이가 앞으로도 밥도 해주고 자기 용돈 모아서 아빠 선물도 사주고, 편지도 써주고 다 할 건데. 지금 울면 안 되지.

“아빠 일단 씻고 와. 거실에 상 차려놓을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입에다 주먹을 쑤셔넣었다.

“큽, 크흐읍. 응. 아빠 씻고 올게.”

“아빠 이상해······.”

호다닥 세수하고 양치하고 머리까지 감고 돌아와보니 지현이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빠 이거······.”

딱 봐도 심각해 보이는데 일단 밥솥을 열었다.

이거 전기밥솥 뚜껑 쪽에 밥만 해도 사흘은 먹겠는데?

지현이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거 왜 이러지? 나 분명히 선에 맞게 넣었는데······.”

물 붓는 선이랑 쌀 넣는 선이랑 헷갈렸나 보네. 밥 양도 좀 많이 하고.

그래, 그럴 수 있지. 전기밥솥에 밥 안 해봤으면 그럴 수 있어.

계란프라이는 기름을 안 둘러서 노른자가 다 터지고 엉망으로 눌어붙어 있었다.

그럴 수 있지. 요리 안 해봤으면 모를 수 있어.

대참사가 일어난 밥을 고봉으로 담고, 계란프라이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지현이가 퍽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그거 먹을 수 있어? 이상하면 안 먹어도 되는데······.”

“응? 엄청 맛있는데? 딸 안 먹으면 아빠가 다 먹을래.”

“힝, 맛없는데······.”

지현이가 처음 해준 밥인데 설익었으면 어떻고 떡이 됐으면 어때.

오늘은 정말로 운수가 좋았다.

“그래서 있잖아, 이거 봐!”

지현이가 자랑스럽게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나 그 댓글 단 사람이랑 만났거든. 근데 막상 말해보니까 엄청 재밌었어. 글 얘기도 많이 하구, 만난 다음에는 그 아저씨가 이거 봐, 댓글도 엄청 좋게 달아주고.”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현이가 재차 말했다.

“아빠한테 진짜 엄청, 엄청 미안해. 괜히 아빠한테 화냈어.”

“괜찮아. 아빠가 딸한테 미안하지.”

“아빠는 나 생각해서 해준 말인데 화풀이나 하구. 그래서 사과하고 싶어서······. 근데, 근데 나 이거 저 아저씨가 좋게 댓글 달아서 기분 좋아서 사과하는 거 아냐.”

“응. 아빠도 알지.”

“진짜로 아빠한테 미안해서, 그래서 나 집에서 밥도 한 번 해본 적 없으니까. 미안해서 말 꺼내기 어려워서 오늘 돼서야 용기내서 말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천사다.

천사가 여기 있다.

“하아아품.”

인위적인 하품소리를 내면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우리 딸이 눈치 못 채게 눈물을 닦았다.

지현이가 잠시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말했다.

“아빠 다 먹구 그냥 가. 설거지도 내가 할게.”

“고마워, 딸.”

“아니면 있잖아······. 이제부터 내가 계속 밥할까?”

지현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양손을 내젓고 극구만류했다.

“으응, 전혀 안 그래도 돼. 아빠가 해도 되니까, 우리 딸은 오늘 한 번 했으니까 괜찮아.”

“진짜?”

“응.”

감동이란 게 계속 반복되면 무뎌지니까.

절대 지현이가 해준 밥이 맛없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그냥 감동 때문에.

아무튼 아침부터 정말 운수가 좋았다.

지난번에 던전 다녀오고부터는 모든 일이 결과적으로 술술 풀리는 것 같고 골치 아픈 일도 이제 안 생기고 있다.

그래. 그만큼 운수가 좋았는데······.

***

“네, 김유진 씨? 왜 전화했습니까. 이수민 씨가 제대로 못 가르쳐줘요? 왜, 내가 손 좀 봐줘?”

<네?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러면요?”

<혹시 지현이 지금 집에 있나요?>

“지현이 오늘 같이 있던 거 아닙니까? 훈련요.”

<네. 그랬었는데······, 잠깐 통화할 일이 있어서 전화 걸었는데 계속 전화를 안 받아서요.>

이게 뭔 소리야?

지현이 집에도 없는데.

“잠깐 기다려 보세요.”

전화를 끊고 지현이 휴대전화로 걸었다.

받지 않는다.

할 일 끝났으면 별 말 없이 집에 안 들어올 애가 아닌데.

이상한 일 생겼다 싶으면 대체로 이 새끼가 원인인 법이지.

한때는 내 골칫덩어리였으나 지금은 단순히 인간 샌드백이 된 불쌍한 중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걸리고 곧 전화기 너머로 차분한 척하지만 그다지 침착하지는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그······, 지현이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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