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위선과 기만의 아이콘.
호다닥 손가락을 놀려 이수민이 메시지를 전송했다.
<지현아 그 사람 아주 나쁜 사람이야>
<진짜로 진짜 세상에서 최고로 나쁜 놈>
<완전 쌩양아치에 입도 험하고 사람 막 때리고>
<지지야 지지 절대 가까이 가면 안 돼>
이수민이 온 마음을 담아서 연달아 보낸 메시지.
곧 1이 사라졌다.
하지만 답장이 안 왔다.
읽은 건 분명한데 5분이 지나도 답장이 안 온다.
하가놈이 사랑하는 제자와 만났다는 사실과,
제자가 하가놈에게 벌써 상당한 호의를 가졌다는 사실과,
제자가 메시지를 읽고 답장을 안 한다는 사실 그 자체까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폭풍처럼 밀려 왔다.
무력감에 빠진 이수민은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아빠 치킨 식어. 빨리 와!”
빨래 개서 옷장에 넣어두고 오니 지현이가 치킨 배달 온 거 세팅까지 다 끝내고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콜라 따라놓은 컵에 얼음까지 넣어뒀다.
아까 낮에 스미스로 역용해서 가르친 교육 때문인가?
반나절만에 이렇게 바뀔 줄은 몰랐는데. 감개가 무량하다.
역시 우리 딸은 하면 할 수 있는 애였어. 암, 그렇고말고.
내가 비열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지현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맞다. 수민 언니한테 답장 보내야 하는데.”
“답장?”
“치킨 받고 뭐한다고 깜빡했어.”
들고 있던 닭다리를 내려놓고 지현이가 휴대전화 쪽으로 손을 뻗는다.
고개를 내밀어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엿봤다.
얼씨구. 가관이구만.
이 새끼 패닉상태라서 자기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하는 말에 두서도 없고 근거도 없다.
그냥 무조건 ‘안 돼!’, 이것뿐이다.
우리 딸이 얼마나 사리분별이 잘 되고 줏대가 있는 앤데, 이런 게 먹힐 리가 없지.
게다가 이미 ‘겉은 차가워도 사실은 인정 많은 스미스 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
지현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다······. 그 아저씨 나한테는 엄청, 엄청 잘해줬는데.”
“왜? 수민 언니가 막 이간질하고 그래?”
“그런 건 아닌데······.”
아직 때가 무르익은 건 아닌가 보다.
그래도 사부님인데 ‘이간질’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꺼려지는 바가 있나 보군.
내가 슬쩍 말을 흘렸다.
“그분이 전생에서부터 그런 방면에서는 소질이 있으셨지······.”
“응? 사부님?”
“아니, 뭐, 아빠가 꼭 6대님을 나쁘게 말하려는 건 아니구, 그런 게 또 복잡한 세상사 살아가는 데는 필요한 거니까. 아빠는 이해하지. 음, 이해하고말고.”
지현이는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우선 대전제로, 아빠가 굳이 이런 걸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그리고 지현이 본인이 경험한 ‘친절한 스미스 씨’
한데 이수민은 그저 감정에 호소한 흑색선전만 하고 있는 상황.
그럼 자연히 이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지.
“사부님이 나를 엄청 예뻐하셨나봐······.”
좋아.
아주 좋다.
이게 말은 좋지만 결코 긍정적인 감상이 아니다.
내가 모르는 사부님의 일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느낌이다.
갑자기 너무 훅 들어가도 안 좋으니 오늘은 이만 할까.
“수민 언니한테 답장해줘야지?”
“응, 응.”
짧게 휴대전화 액정을 두드리고 다시 치킨다리를 든 지현이에게 물었다.
“근데 딸.”
“응?”
“그 스미스라는 사람. 또 만날 거야?”
치킨을 한 입 덥석 베어물어 우물거리는 입으로 지현이가 말했다.
“응. 나는 그러고 싶은데. 근데 그 아저씨도 막 틱틱대도 안 싫어하는 것 같았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맞지? 아빠는 걱정이 돼서.”
“응.”
지현이가 콜라를 꿀꺽꿀꺽 삼킨 다음 단체 채팅방 화면을 내게 보여줬다.
“봐봐. 언니들이랑은 자주 훈련도 하고 좋은 사람 맞아!”
맨날 궁시렁거리더니 그래도 없는 자리에서 욕을 하지는 않았나 보군. 기특한 녀석들.
그리고 이 다음 이어질 말이 내 본론이다.
“그러면······, 언니들한테 말해서 딸도 한 번 정식으로 찾아가 보면 되지 않을까? 수민 언니는 저렇게 싫어하는 거 보니까 말하지 말구.”
“음······.”
그래도 사부라고 있는 사람이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말 안 듣기는 좀 그런지 지현이가 고민했다.
“수민 언니는 그 스미스라는 사람이랑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딸이 가서 둘이 사이좋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건······, 응. 아빠 말이 맞는 거 같아. 그러면 되겠다!”
순진한 우리 딸은 사람을 너무 잘 믿는다.
나는 그저 행복회로에 시동만 걸어줬을 뿐인데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괜찮아. 아빠 말은 의심없이 믿어도 되지.
다 우리 딸 잘 돼라고 하는 말이니까.
이름 적으면 사람 죽는 노트가 나오는 만화를 한 번 생각해 보자.
L이 키라에게 진 이유가 무엇인가.
분명 L이 객관적으로는 키라보다 조금이나마 뛰어났는데도 왜 패배했을까.
그건 바로 정보의 차이 때문이다.
압도적인 정보의 차이를 극복하지는 못했던 거지.
하물며 이수민은 나보다 멍청하기까지 하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다.
처참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게 성좌물이라면 이수민의 성좌는 아마도 ‘패배의 신’ 같은 거겠지.
약속된 승리의 순간을 기대하며 콜라를 홀짝였다.
······생각보다 달았다.
상표를 확인해 보니 펩시콜라였다.
“씁······.”
***
이수민은 경악했다.
이제는 익숙한 훈련장소.
여느 때처럼 모인 서른 명 남짓한 헌터들.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세상 온갖 폼은 다 잡고 있는 하가놈.
여기까지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한데 왜, 왜······.
“지현이 왔네?”
“지-하! 아, 이거 지현이 하이라는 뜻임.”
“진짜 어디 가서 그런 거 쓰지 마라······. 지현이 안녕!”
“쟤가 유지현이야?”
“근데 중학생 치고 키는 좀 작네.”
“응. 싸우면 너 1초컷.”
“학교에서 인기 좀 많겠다.”
“쟤 개학하면 사람 몰려서 학교 다니기 좀 힘들 건데, 괜히 걱정되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왜, 대체 왜 여기서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받고 있는 거지?
청천벽력 같은 사태에 이수민의 동공이 사정 없이 흔들렸다.
제자와 눈이 마주친다.
들켰다, 정도의 의미를 담은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가슴이 무너진다.
안 돼.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떠나게 해야만······.
그때였다.
마치 선고하는 것 같은 하가놈의 말이 떨어졌다.
“다 왔으면 시작합시다. 근데 거기. 유지현이라고 했나? 견학하는 건 좋지만 훈련에 방해가 되면 안 된다.”
‘뭐야? 미리 합의까지 다 된 거야? 왜 나는 몰랐던 건데!’
“네!”
“방해되지 않게······,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고, 배울 건 배워가라. 알겠나?”
“네에! 감사합니다!”
‘저 새끼는 또 왜 친절한 척하는 거냐고!’
우선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야 했다.
이수민이 다급하게 전음을 보냈다.
‘지현아.’
‘네?’
‘다른 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우선 여기서는 언니한테 사부님 같은 말 쓰면 안 돼? 언니 말 꼭 지켜야 해!’
사부라는 표현을 쓰는 것만으로도 이수민은 몸에 부담이 오는 걸 느꼈다.
다행히 제자가 곧장 대답했다.
‘알겠어요, 언니!’
심호흡을 하고 이수민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천만 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제자의 정체가 발각된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거야······.’
하지만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날 하가놈은 너무나도 상냥했다.
“예를 들어 오우거를 상대할 때, 이 자세에서 대비해야 하는 공격은 목과 어깨를 중심으로 한 상단부와, 그리고 갈비뼈 쪽입니다. 방어 형태와 반격은 이렇게······. 좋아. 아주 좋습니다. 거기, 중학생?”
“네! 그냥 지현이라고 불러주셔도 돼요!”
“다들 보쇼. 저게 정석적이면서도 실전적인 자세입니다. 모두 지현이한테 박수.”
뜬금없는 박수갈채가 제자를 향했다.
제자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쑥스러워한다.
어째서, 어째서······.
‘왜 평소처럼 개차반으로 하지 않는 거지?’
이수민은 의문을 가졌지만 오직 이수민만의 생각이었다.
다른 헌터들은 모두 긍정적이었다.
“오늘 애 데리고 왔다고 엄청 차분하게 하시네.”
“누가 혼혈 아니랄까봐 할리우드 스타일인거봐. 어린애한테는 상냥한, 뭐 그런 거.”
다들 웃으며 즐거워한다.
“아무튼 좋다. 계속 이랬으면 좋겠네.”
“지현이 계속 왔으면 좋겠다······.”
안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우민들은 하나도 도움이 안 돼.
이수민은 정면을 바라봤다.
하가놈이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제자는 수줍어 하면서 좋아한다.
어느새 부르는 호칭에 성을 뗐다. ‘지현이’다. 감히, 감히 내 지현이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수민은 앞으로 나섰다.
“스미스 씨.”
“네, 이수민 씨. 말씀하시죠.”
왠지 젠틀해진 말투에 이수민은 입가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말했다.
“교육은 이 정도로 된 거 같고, 저랑 대련이나 하시죠. 실전 수준으로.”
하가놈과 이수민 자신, 그리고 유지현을 제외한 전원이 술렁였다.
“왜 저런대?”
“몰라. 맞다 보니까 중독됐나봐.”
“지현이는 못 보게 해야 하는 거 아냐?”
이수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못 보게 하다니, 그러면 안 되지.
하가놈의 폭력성과 이중인격을 까발릴 절호의 기회인데.
본래도 그러하긴 했지만, 오늘은 한층 더 격렬하게, 엉망진창으로 얻어맞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십 분 여의 대련 동안, 이수민이 기대했던 쿵, 쾅! 어억! 으악, 같은 소리는 결코 나오지 않았다.
툭.
터억.
슥.
맥빠진 소리만 흘러나왔다.
“잠깐 타임.”
삼 미터 정도 훌쩍 거리를 벌린 하가놈이 말했다.
“방금 다섯 번의 공격 교환에서 뭘 느꼈습니까. 아는 사람 답해보세요. 그래, 지현이가 말해볼래?”
“음, 스미스 아저씨가 언니 동작을 먼저 읽었어요. 그리고 다음 동작까지 유도하려고 했구, 근데 언니도 그걸 알아서 역으로 유도하려고 하고, 나머지 세 번 동안 그러다가 마지막에 스미스 아저씨가 한 번 더 봐서 기회를 잡았는데 그때 뒤로 갔어요.”
하가놈이 손뼉을 쳤다.
“아주 잘했어. 잘 봤군. 다른 사람들도 듣고 난 후에는 알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 향상될 여지가 있으니 다들 노력하세요. 그러면 대련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잠깐만! 아직 안 끝났-”
“아까 맞다 보니까 중독됐다는 거 진짜일 수도······.”
“수민 언니 아까부터 너무 안절부절 못하는 거 같지 않아?”
아군이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처음에는 이수민이 데려왔던 헌터들까지도 다만 오늘 애가 상태가 좀 안 좋구나, 하는 눈빛만을 보냈다.
제자와 눈이 마주쳤다.
의문스러워하는 눈빛이다.
아냐, 지현아. 이상한 건 저 하가놈이야. 너는 지금 속고 있어. 저 새끼가······.
그때 하가놈이 이수민을 스쳐 지나간다.
한 자락의 전음.
‘과연 무재가 좋은데.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아이야.’
그리고 돌아갔다.
마치 소년만화의 한 장면처럼.
동료들에게 ‘다녀왔어’라고 하는 것처럼.
‘어서 오세요.’
따뜻한 환대가 하가놈을 반긴다.
‘저······, 저 천하의 정파 같은 놈······!’
이수민이 소리없이 절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