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기한은 만 년으로 하겠소.
지금까지 살면서 일대일 기준으로 가장 격하게 싸운 건 그때다.
전생에서 스물네 살 여름이었나?
백운상이랑 세 번째로 싸웠던 날.
그건 뭐랄까.
처절하다 못해 좀 추했지.
시작할 때는 막 폼 잡으면서 싸우다가 나중에는 내력도 달리고 힘도 없어서 멱살 잡고 머리 뜯으면서 개처럼 싸웠다.
보는 사람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다.
만약에 소문이 났으면 백운상이가 교주되는 거나 내가 무림맹주직 해먹기까지의 시간이 일 년은 더 늦춰졌을 터.
아무튼 그만큼이나 격했던 싸움인데······,
“부탁드립니다!”
차라리 그걸 열 번을 더 하면 더 했지 지금 이 상황은 좀 아닌 것 같다.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갔다.
얼굴을 매만졌다.
혹시나 역용이 이상하게 되어 있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역용술은 아무 문제없다.
나는 지금 유수현이 아니라 스미스다, 스미스.
근데,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어떤 빌어먹을 자식 입에서 훈련에 관한 말이 흘러나간 거지?
우리 딸이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아왔냐는 말이다.
설마 이수민이 말했나?
곧바로 떠오른 건 이수민의 묘하게 건방진 낯짝이었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전혀 가능성이 없다.
걔는 도시락 싸들고 말리면 말렸지 먼저 말할 상황이 아니라고.
김유진?
그것도 아니겠지. 김유진이 그래도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는 제일 상식이란 게 있는 사람인데. 다른 인간들은 못 미더워도 내가 김유진은 믿는다고.
알 거 다 아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리가 없다.
그러면 누구냐.
정예슬? 최민호? 아니면 다른 S랭크 헌터들?
어떤 놈이 떠벌리고 다닌 거냐고.
충격과 공포에 잠겨 내가 멀뚱히 서 있자 지현이가 말했다.
“저기······, 말씀 안 드리고 와서 죄송해요. 방해될까봐 기다리고 있었는데······.”
“누구한테, 누구한테 들었지?”
우리 딸, 잘 말해야 돼.
왜냐면 그 새끼는 오늘부로 무림공적행이거든.
“그게 그러니까요. 제가 얼마 전에 단톡방에 초대됐는데 거기서 언니들이 말하는 거 보다가 저 혼자 알아서 왔는데······요.”
“크, 크흐. 혼자······. 혼자 왔다고······.”
이런 젠장!
우리 딸은 어쩜 이리도 똘똘할까!
단호하게 말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나보다 약한 자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 돌아가라.”
“어,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나 보다.
지현이가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딱 일 분이면 되는데,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돼요?”
“나는 바쁜 사람이야. 듣자 하니 아직 중학생이라던데, 여름방학 숙제는 다 하고 왔나?”
“네! 다 했어요! 대련해주세요!”
“거짓말 하지 마!”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아직 손도 안 댄 걸 내가 다 아는데 이 쬐끄만 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부렁을 쳐?
지현이는 정곡을 찔렸다는 듯이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
“어, 어떻게 아셨지······.”
“나 정도 되면 얼굴만 봐도 아는 법이다.”
“와아······.”
어? 이거 뭔가 타이밍이 온 것 같은데?
평소에 쉽게 할 수 없는 잔소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타이밍이.
“너는 아직 어리다. 헌터니 뭐니 하는 허황된 꿈에 젖어 지낼 시간이 있으면 열심히 학교 공부하고 성적 잘 받아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게 자라나는 청소년으로서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하지 않나?”
“······.”
“예를 들어서, 그래. 밖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아버지 어깨를 주물러 준다던가 말이야. 저녁밥을 차리고 설거지까지 도맡아 한다던지.”
그러자 가만 듣고 있던 지현이가 갑자기 팍 인상을 썼다.
“왜 갑자기 우리 엄마아빠 가지고 뭐라고 하세요?! 그리고 집안일 제가 다 하는데!”
아니, 내가 내 얘기 하는데 뭐가 어때서!
그리고 우리 딸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잖아······.
어제 불고기 해먹고 프라이팬도 내가 닦았다.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크흠, 그래. 그건 내가 실언했다. 아무튼 대련 같은 거 해 줄 생각 없으니 돌아가라.”
“으,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부탁 들어주실 거예요?”
“계속 방해할 셈이라면 힘으로라도 비키게 해주겠다.”
“그건 좋아요, 콜!”
아오, 진짜 미치겠네.
장난으로 꿀밤 먹이는 거 말고는 애 몸에 손대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애 엄마한테는 어차피 애가 꼼짝도 못하니까 회초리 같은 거 들 일도 없고.
근데 어떻게 내가 우리 딸이랑 드잡이질을 해.
그치만, 그치만 조금이라도 상대 안 해주면 그냥 물러날 것 같지가 않은걸.
어쩔 수 없다.
내가 입을 뗐다.
“그럼 좋다.”
“와, 대련해주시는 거예요?”
“아니. 안 해 줄 건데.”
들떠 있던 지현이 표정이 갑자기 확 사그라 들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진정한 강자는 싸우지 않아도 이긴다고들 하지. 대련이 아니라 교정을 해주겠다. 굳이 싸우지 않아도 힘의 차이를 알게 해주겠다는 말이지.”
그래. 이게 돌파구다.
직접 안 싸우고, 지현이 무공만 한 번 봐주고, 너와 나의 클래스 차이가 이 정도다, 라는 것도 알게 해주고.
지현이가 의뭉스럽게 말했다.
“교정이요? 그냥 싸우는 거면 몰라도 그건 으음······.”
이 건방진 녀석이?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겠네.
마나량이나 실질적인 전투력이야 자기가 좀 달린다 쳐도, 테크닉적으로 자기가 밀릴 리는 없다 싶은가.
지현이가 알기로 나는 그냥 현대 사람이고, 자기는 전생에서부터 마교 무공에 통달한 무인이니 그런 생각할 만도 한데,
그래도 그때 던전에서 내 수준을 대강은 봤을 텐데.
오늘 내가 하늘 밖에 또다른 하늘이 있음을 가르쳐주마.
“거기! 왼팔 왜 그렇게 내려갔어! 한 대 거하게 얻어맞고 얼굴 찐빵되기 딱 좋겠네!”
“저는 이렇게 알고 있는데······?”
“누가 그 따위로 가르쳤어? 얼굴 한 번 보고 싶네. 3센티 올려! 팔꿈치 제대로 세우고!”
제일 처음 지현이가 천마라고 밝히며 펼쳐 보였던 천마군림보의 기수식.
그때부터 눈에 밟혔는데 드디어 제대로 가르쳐줬다. 마음의 응어리 같은 게 싹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저기요, 아저씨. 이거 진짜 이렇게 하는 게 맞아요······? 아닌데······.”
지현이는 영 못 미더운가 보다.
“이리로 와 봐라. 마나는 쓰지 말고, 손에 힘 빼고 동작만 체크해 봐.”
그리고 몇 합을 나누고 나니 지현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와아······.”
“어때. 감이 좀 오나?”
“네. 아저씨 감사합니다!”
뿌듯하다.
이수민 그 새끼보다 내가 우리 딸의 스승으로서도 월등함을 증명해냈다.
“저기, 그런데요오. 이게 배웠으니까 실전으로 연습도······.”
“그건 안 돼!”
“힝, 네.”
크흠······.
딸 바보가 죄라면 내 징역의 기한은 만 년으로 하겠소······.
“그럼 십 초만. 십 초만 해 보고 끝내지.”
“감사합니다!”
지현이는 갓난아기 때 뒤집기 시작하고, 그 다음 걸어다닐 때부터 몸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
집안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고, 좀 더 커서는 나랑 파워레인저 놀이 같은 것도 했었지.
왠지 그때 생각이 났다.
“자, 십 초 끝.”
마지막 초식을 나누면서 지현이 머리에 손바닥을 대고 부드럽게 밀었다.
뒤로 반 발자국 밀려난 지현이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고마우면 집에 가서 2학기 공부랑 방학숙제 빼놓지 말고 해라.”
“그게 뭐예요, 히히.”
실실 미소를 흘리던 지현이가 내게 물었다.
“근데 있잖아요, 아직 한 번밖에 안 배웠는데······.”
“뭐.”
“또 뵐 수 있을까요?”
“······기회 되면. 대신 오늘처럼 갑자기 찾아오면 안 된다.”
“언니들이랑 같이 오는 건 안 돼요?”
아마 안 될걸.
일단 이수민이 절대 못 오게 말릴 테니까.
오늘 꽤 당황스럽긴 했지만,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괜찮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그날 저녁이었다.
“아빠, 아빠.”
“응?"
“근데, 우리 사부님 있잖아. 아빠 영호 삼촌도 본 적 있으면 우리 사부님도 봤겠네?”
“그렇지?”
지현이가 미간을 좁혔다.
“이게 호칭 같은 게 좀 이상해지긴 한데, 그러면 사부님한테 말 안 해도 되려나?”
며칠 동안 뭔가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걸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마침 잘 됐다.
“음······, 딸 있잖아.”
“응, 응.”
“딸한테는 수민 언니가 좋은 사부님이었어?”
“응, 엄청! 어릴 때는 맨날 같이 놀아주시고, 무공도 되게 상냥하게 가르쳐주시구. 완전 최고!”
“그래······.”
내가 말끝을 흐렸다.
고심하는 듯이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그런 내 모습에 지현이가 흠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사부님은 왜? 어, 왜······?”
“그게, 아빠가 기억하는 6대 교주님은······, 좀 달랐거든······. 그래? 그분이 그런 면도 있으셨구나······.”
지현이 얼굴이 금세 혼란으로 물들었다.
“어? 혹시 아빠는 그, 좀······.”
“딸한테 말하기는 그런데······.”
라고 망설이는 척하면서 미주알고주알 선동과 날조를 시작했다.
전직 무림맹주의 혼을 담은 정치질에 순진한 우리 딸은 홀린듯이 빠져들어갔다.
***
이수민은 자기 방에서 휴대전화를 부여잡고 있었다.
요즘 항상 유지현과 채팅방의 숫자 1이 다이렉트로 사라지는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시작부터 뭔가 이상하다.
답장이 늦다.
그리고 왠지 영혼이 없는 대답 같다.
이수민은 큰 충격에 빠졌다.
‘왜지? 바쁜 일 있나? 답장이 한 줄 밖에 안 와······.’
다시 용기를 내고 이수민은 조심스럽게 한 글자 한 글자 퇴고까지 마친 메시지를 보냈다.
<지현아, 그러면 오늘 오후에는 뭐했어?>
영겁 같은 십 분이 지난 후 답장이 왔다.
<수련했어요!>
수련? 혼자?
아니면 누구랑 같이? 내가 있는데?
이수민이 떨리는 손으로 곧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와! 언니도 같이 하면 좋았을걸! 지현이 그러면 앞으로도 훈련 같은 거 할 생각이야? 몸 다치지 않게 해야 해 시간 말해주면 언니가 맞춰서 같이 할 수도 있는데>
다시 답장이 왔다.
<응 알겠어요 오늘은 같이 한 사람 있어요>
<누구랑?>
<전에 던전에서 만난 사람이요 ㅎㅎ 막 괜히 차갑게 말하는데 엄청 친절하게 가르쳐줬어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던전? 그거 혹시······.>
<네, 언니들 훈련도 해주신다면서요 또 만나고 싶어요 ㅎㅎ>
“절대 안 돼!”
이수민은 그만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이수민의 머릿속으로 끔찍한 장면이 떠올랐다.
‘네가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마종의 싹을 몰래 숨기고 있었단 말이지······? 좋다. 스승과 제자 둘 다 사이좋게 저세상으로 보내주지. 거 장례 치르기는 편해서 좋겠구나. 참고로 본좌는 육개장을 좋아한다. 으하하핫!’
······천지가 세 번 개벽해도 일어날 리 없는 망상이었지만, 이수민은 그 일이 당장 눈앞에 닥쳐오기라도 한 듯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돼. 무조건 막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