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우리 사부님을 축하합니다!”
······지현이가 의미불명의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뭘 축하한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가사에 ‘사부님’이라는 단어가 계속 들어간다.
기분이 안 좋다.
“이제 초 불어. 아빠! 아빠도 같이.”
“딸, 아빠도?”
“응. 사부님······? 수민 언니······? 아무튼 셋이 같이!”
“큼······.”
꼬깔모자 써줬으면 된 거 아니냐.
왜 촛불까지······.
결국 셋이서 함께 촛불을 불었다.
팡, 파앙!
폭죽까지 터뜨리고 다시 불을 켰다.
“아빠 잠깐만? 이거 케익도 좀만 자르구.”
“그래······.”
지현이는 이수민과 손을 맞잡고 기어이 케익 커팅식까지 마쳤다.
그리고 나서야 말했다.
“이제 처음부터 말해줄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야······.”
지현이가 손짓발짓을 해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중간중간 뒷목을 잡긴 했는데 대강 초반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는 알겠다.
“그러니까 둘이 케이크 먹고 나오는데 갑자기 게이트가 터졌다?”
“응.”
“수민 언니가 딸은 피해 있으라고 하고 혼자 싸웠는데 괴수가 엄청 셌고?”
“응.”
이건 내 탓도 있다.
이수민 금제하면서 얘가 진신무공 제대로 발휘하기는 힘들게 해놨다.
무공이란 게 어느 한 곳 어그러지면 그 부분만 부족해지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얼추 S랭크 보스한테서 시간 벌 정도는 될 것 같았는데, 일이 이렇게 돼버렸단 말이지······.
“언니가 막 이상한 애들한테 둘러싸여서, 힘들어 보이고 다치고, 그래서 나도 뛰쳐나갔어. 아빠, 미안해.”
지현이가 갑자기 풀죽은 얼굴로 말했다.
이수민이 지현이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기 직전에 내가 먼저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네가 째려보면 뭘 어쩔 건데.
“아냐, 우리 딸. 잘했어.”
“응······. 그래서 언니랑 둘이 같이 싸웠거든? 근데, 근데.”
지현이가 팟, 하고 외쳤다.
"이게 진짜 되게 익숙한 느낌인 거야. 엄청 호흡도 잘 맞구, 언니 움직이는 것도 익숙하고, 그, 무공 쓰다 보면 무아지경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 빠져서 생각했거든? 아, 내가 이걸 어디서 겪었을까, 너무 그립다. 막 이런 생각하구.”
우리 딸은 그랬을지 몰라도 듣는 내 마음은 찢어진다.
마교 대장 할 때 기억이 그렇게 그리웠니······? 라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결국 언니랑 같이 나쁜놈들 다 끝내고, 언니가 음, 저어기 멀찍이쯤에서 나 있는 쪽을 딱 봤거든. 근데······.”
“······근데?”
지현이가 이수민 쪽을 본다.
이수민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왜 둘이 교감하는데. 왜.
“언니가 막 울려고 했어.”
금제 때문에 말은 못하고, 오랜만에 우리 딸이랑 같이 무공 펼치니까 감정이 북받쳤나 본데······, 이 풋내기 같은 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어? 부끄러움도 없나?
“그거 보면서 나도 괜히 슬퍼지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는 거야! 아, 사부님! 그래서 언니한테 달려가서 이렇게, 이렇게 손 붙잡고 내가 물어봤어. 근데 언니가 막 펑펑 울고 고개 도리도리하면서 대답은 안 해주고······.”
됐다. 더는 못 듣겠다.
“그러고 상황 정리되고 같이 집에 왔고?”
“응, 응. 근데 아빠 나 이제 어떡하지······. 지금 메시지 온 거만 한 몇백 개 돼······.”
지현이가 울상을 지었다.
크흠, 입맛이 쓰다.
우리 딸 이름이 드러난 정황도 알겠다.
주위에 사람 많았을 테니까 사진도 찍혔을 테고, 신상 밝혀지는 것도 금방이고 숨길 수가 없었겠지.
“엄마한테는 아빠가 잘 말해볼 테니까, 딸은 일단 너무 걱정하지 말구.”
“응······.”
“그리고 이수민 씨.”
“네?”
이수민이 뭐에 찔린 듯이 대답했다.
아까는 의기양양하더니 객관적으로 상황 듣고 보니까 사리분별이 좀 드는가, 얼굴에 죄책감 같은 게 서려 있다.
우리 딸이 하루만에 전국적으로 유명인이 됐는데······.
지현이한테 화낼 상황은 아니고, 일단은 이 새끼부터 추궁해야겠다.
“잠깐 나 좀 봅시다.”
집 대문을 나서면 가로등 옆에 벤치가 하나 있다. 거기 이수민과 나란히 앉았다.
둘다 아무 말 안 하고 있다가 이수민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떤 게 말입니까.”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라고 말하고 싶은데.
“지현이 아직 어린데 싸우게 해서······.”
그걸 아는 놈이······.
머리로는 이 자식도 우리 딸 지켜주려고 할 만큼 한 걸 알겠는데, 가슴으로 납득이 안 된다.
“후. 됐습니다. 우리 딸이 가만히 못 보고 같이 싸웠다는데 이걸 제가 뭐라고 합니까. 화는 많이 나는데, 화낼 상황이 아니니까 그 건은 이만 하겠습니다.”
“네······.”
“근데, 아까 지현이가 말한 거. 지현이한테 듣긴 했어요. 전생이었나? 그런 얘기. 솔직히 쉽게 믿기지는 않는데, 아주 안 믿을 수도 없더라고요.”
“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지현이가 말한 거 정말입니까?”
천만다행으로 우리 착한 딸이 족보 꼬일까봐 그랬는지, 내 전생 얘기는 안 했다.
그거면 충분하다. 역용한 상태에서도, 지현이 아빠라는 신분에서도 내 우위는 완벽하다.
이수민이 천천히 입을 뗐다.
“제가 뭐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지금 사실대로 말했으면 기맥 뒤틀려서 그대로 일반인행이었을 텐데.
가만 보니 이놈 지금 팔다리가 엉망이다.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가 하면 군데군데 핏줄이 터진 게 보였다.
금제 상태에서 우리 딸 보호한답시고 억지로 본령무공 꺼낸 탓도 있는 것 같고, 또 그것만이 아니다.
심령금제 원인도 있는 것 같다.
그게 금제 걸린 본인 정신에 작용하는 거니까.
적극적으로 부정 안 하거나, 우리 딸 앞에서 질질 짜는 것만 해도 부담이 강하게 올 테지.
그래도, 그만큼 힘들어도 차마 내가 사부 아니란 말은 도저히 못하겠다 그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짠한 마음이 안 드는 것도 아니고······, 가 아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한 거야.
내가 이놈을 동정할 뻔하다니.
이수민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지현이가 저를 잘 따라주면······, 저는, 지현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방금도 그렇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말을 하기만 해도 고통스러워 하는 낯빛이다.
“후······. 일단 이수민 씨는 집에 가시죠.”
“네······.”
꾸벅 인사를 하고 이수민이 멀어져 갔다.
집에 들어가니 쇼파에 있던 지현이가 물었다.
“언니는 갔어?”
“응. 딸도 오늘 피곤했을 텐데 빨리 자.”
“알겠어. 아, 맞다. 아빠!”
“딸 왜?”
지현이가 베시시 웃었다.
“언니한테 아빠 이야기는 아직 안 했어. 그, 뭐라고 해야 되지······.”
단어를 고르느라 고심하던 지현이가 말했다.
“맞아. 족보 꼬일까봐!”
“그래, 딸 고마워. 어서 들어가서 자.”
“응. 아빠도 급하게 와서 피곤할 텐데 빨리 자. 안녕히 주무세요!”
지현이를 재워놓고 생각했다.
일단 애 엄마는 먼저 연락 오기 전까지는 모를 거니까 당분간은 더 생각할 시간이 있다.
지현이도 당분간은 관심이 좀 쏠리긴 하겠지만 나이도 어리고, 당장 헌터할 것도 아니다.
아니, 절대 못하게 해야지.
좋아. 지금까지와 달라지는 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가 안 나는 건 아니니까.
그래. 정정당당하게 제대로 족친다.
***
“오늘은 이수민 씨와 제가 대련하는 걸로 교육 대신합니다. 세 시간 코스고, 마나량은 C랭크 이하로 억제할 거니까 움직임이나 테크닉 위주로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 시간 동안 쥐어팼다.
내공을 같은 정도로 억제하면 상황이 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천만의 말씀.
몸을 놀리는 수준 자체부터 이수민과 나는 한 급간 이상 차이가 있다.
구경하던 애들이 쑥덕거렸다.
“둘이 진짜 원수졌나?”
“원래도 데면데면하긴 했는데······.”
“살벌하다, 살벌해.”
월영보를 밟으며 이수민이 내게 접근했다.
가볍게 발을 박차서 거리를 잠깐 벌렸다.
이수민의 공격이 끝나는 공백에 맞춰 다시 재차 접근했다.
옷깃을 잡아 그대로 땅에 메쳐버리려고 했는데 마주 손을 뻗치며 맞섰다.
서로 복잡한 동작으로 손을 맞대던 중에 전음을 보냈다.
‘며칠 전에 한 따까리 했다며?’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크게 흐트러진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얼굴과 목, 명치에 세 번 정권을 찔러넣었다.
‘유지현이라는 애랑 친해? 무재가 좋다던데 제자로 생각하고 있냐?’
이번엔 발을 헛디딘다.
땅을 박차고 달려 어깨로 튕겨냈다.
이수민이 나가떨어졌다.
이제는 기진맥진해져서 일어서지도 못한다.
‘네가 누구랑 친하게 지내든 내가 알 바는 아닌데 진짜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마교 재건 같은 거 꿈꾸고 있으면 일찌감치 접어. 내가 있는 한 절대로 좋은 꼴 못 볼 거다.’
‘그런 생각 안 해······.’
“그래? 그럼 됐다.”
툭 던지고 공터 외곽 쪽으로 걸었다.
헌터 애들이 이수민을 불쌍하다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
나는 그냥 우리 딸 아무 탈 없게 지내게 해주고 싶은 건데, 왜 내가 악역 같냐······.
왠지 입맛이 쓰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가 세상에 못 이길 사람이 없다.
지현이나 애 엄마랑 다투는 일만 아니라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지켜낼 거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것이,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
“안녕하세요. 음······, 저랑 처음 보시는 거 아니죠? 혹시 기억하세요? 기억 못하시면 어쩌지······.”
어깨 아래로 찰랑대는 머리칼에, 귀엽지만 도전적인 눈매를 한 여자애다.
키는 150센티 정도 되는 것 같고, 아무튼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
여자애가 내게 말한다.
“전에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그게 뭐였더라······. ‘나보다 약한 자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 였나?”
그리고 양손바닥을 모으고 내게 정중하게 머리를 숙인다.
“저랑 대련 한 번 해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지현이와 집 구석에서 벌인 정마대전만 수백 번······.
그리고 오늘. 가장 격렬한 한 번이 추가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