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집안 꼴이 가관이구만.
헌터 한 명이 의문에 가득 차서 되받았다.
“말을 이쁘게 한다고······? 저게?”
내 얼굴,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방금 말한 너. 그건 무슨 의미로 한 말이냐.
“왜요? 쟤네 한 짓에 비하면 완전 천사 같은데······.”
정예슬이 웬일로 나를 옹호하는 어조로 말했다.
이게 맞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 용병처럼 써먹으려고 불렀다는데 맞아도 싼 거 아니겠어?
물론 저기 널브러진 지휘관 놈이 한 말이 진짜라는 가정하에서의 얘기다.
그러니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지.
“근데 있잖아. 지가 무슨 소환을 했다는 거야? 우리는 그냥 던전 생겨서 우리 발로 직접 들어온 거잖아.”
“던전을 통로로 두고 거기로 들어오는 애들 불러들였다는 말 같은데.”
“끈끈이지옥 같은 거 말하는 거 아냐?”
“그런가? 나는 아무리 봐도 좀 이상한데······.”
방 안이 조용해진 바람에 뒤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게 아주 잘 들린다.
나는 몇몇 사람이 의문을 제기한 것과 같은 생각을 했다.
확실히 이상하다.
지휘관 놈 하는 말이 하도 괘씸해서 쥐어패긴 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저놈 말하는 게, 아귀가 들어 맞지가 않는 듯한······, 그런 느낌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슬슬 내 쪽으로 다가오는 헌터 애들한테 물었다.
“다들 여기 처음 올 때 기억합니까?”
“네. 기억하죠.”
“우리가 처음 나타난 후에 갑자기 성벽 바깥으로 몬스터들 보이고, 그러고 또 조금 더 기다리고 나서야 이 새끼들 나왔죠?”
“듣고 보니 그러네요······? 꼭 게임에서 NPC 리젠되는 것처럼 나왔잖아.”
다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이거 다 그냥 던전 컨셉일 수도 있다고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하나 확실한 게 있긴 합니다.”
지휘관 새끼가 한 말에 따르면 자기 마력을 매개체로 삼아 우리를 소환했단다.
그것 때문에 지금 허약해진 상태고.
그러면 클리어 조건이 생각보다 간단할 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밖에 있는 새끼들 다 죽이라는 게 말이 안 됐지.”
지휘관 놈한테 다가갔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냥 너 꼴까닥하고 나면 우리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
“······."
대답이 없었다.
“묵비권은 동의인 걸로 알고, 혹시 여기 남아서 실전경험 좀 더 쌓고 싶다는 사람 있습니까?”
“아뇨, 집에 가고 싶습니다.”
모두 한 마음으로 말했다.
그래. 더 있고 싶어도 여기서 더 얻을 것도 없다.
알고 싶은 거 다 알았고.
이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지.
강기공을 끌어올려 그대로 숨통을 끊었다.
그와 동시에 다시 빛무리가 나와 헌터 애들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좀 허무하게까지 느껴지는 던전 클리어였다.
***
“그러니까 요약하면 이런 거네요. 아까 그 악마처럼 생긴 괴수가 말했던 소환이 어쩌고 하는 거. 그거 자체가 던전 설정이었다, 그런 말씀이죠?”
“아마도요.”
이중트릭 같은 거였다고 생각한다.
일단 성벽 밖의 몬스터들을 막아내고, 지휘관 놈과 대화하면서 단서를 얻어서, 그놈을 제거해 버리면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는 구조.
아마 몬스터 군단을 다 죽였어도 클리어가 되긴 했겠지만······, 귀찮게 그런 짓을 왜 하겠어.
이게 무슨 게임도 아닐 뿐더러 그런 건 고이고 썩은 물들이나 할 법한 플레이다.
내가 한 게 최단기간 공략 루트면서 정답이었지.
그때 김유진이 또렷한 목소리로 반론했다.
“하지만 우리가 방금 경험한 게 진짜일 수도 있잖아요?”
“무슨 말입니까.”
“단순히 던전 안의 설정이 아니라 방금 거기가 정말 실제로 존재하는 이세계 같은 거였다고 해도, 지휘관을 죽이면 돌아오는 조건이 성립되는 건 같으니까요.”
그것도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긴 한데.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쉽게 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 와서 고민해도 모르는 일이니 대충 신경 끕시다. 돌아가서 '이런 일이 있었다' 라고 보고만 하면 이런 거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알아서들 분석하겠죠.”
“네······.”
“근데 외부에 알려지면 음모론 믿는 사람들은 좋아서 팔짝 뛰겠다. 그렇잖아요?”
판타지 설정적인 이야기긴 했지.
균열이 어쩌고, 다른 세상과의 통로가 어쩌고.
나도 나름대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놈이 한 말이 맞다고 치자.
그러면 대체 균열이라는 건 왜 생겼는데?
왜 가만히 잘 살고 있는 사람 주변에서 자꾸 알짱거리는 거냐고.
지휘관 쥐어패면서 이런저런 키워드나 정보를 얻어낼 만큼 얻어내긴 했는데, 그걸 가지고 내가 마땅히 상의할 사람이 없는 게 문제였다.
“김이 팍 새긴 했는데 그래도 생각보다 클리어는 빨리 끝나서 다행이에요.”
“그러네? 여섯 시간밖에 안 지났네요.”
휴대전화 시계로 지금이 금요일 오후 6시였다.
던전 진입한 시각이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갈 때였으니까 정확히 여섯 시간.
“거의 역대 최단기간 아냐?”
“스미스 쌤만 고생하셨으니까.”
“쌤, 집 갈 때도 로테이션으로 안마해 드릴까요?”
정예슬이 살갑게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혼자 갈 겁니다.”
지현이랑 연락하고 알리바이도 맞추고 하려면 그쪽이 훨씬 편했다.
정예슬이 의뭉스러운 어조로 졸랐다.
“네? 왜요? 여기서 서울까지 가려면 한참 걸릴 텐데. 같이 가면 편하고 좋잖아요. 같이 가시지.”
“그냥 혼자 가고 싶으니까 냅둬요.”
정예슬이 고개를 휙 돌렸다.
“고독한 한 마리의 늑대인 척······, 차가운 도시의 남자인 척······.”
“이제는 아예 중얼거리는 척도 안 한다 이거지?”
고개만 돌리면 뭐하냐. 목소리가 크잖아, 목소리가.
과장된 몸짓으로 뒤로 숨는 정예슬을 보며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출구 보인다.”
“후아, 역대 최단 기간 클리어에 역대 최고 수준의 버스 탑승. 그래, 이게 던전이지.”
“나가자마자 여자친구한테 전화해야지. 그냥 내일 바로 웨딩촬영 할까? ”
“난 엄마한테 전화할 거야.”
“둘다 무사히 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야······.”
그리고 던전 대기실 출구를 나서고 바깥으로 돌아오자마자.
위이잉, 위잉.
휴대전화 진동이 미친 듯이 울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모두 다.
모두 어리둥절해져서 각자 휴대전화에 시선을 집중했다.
“뭔데, 뭔데?”
“단톡방이랑 알림 앱이랑 난리네.”
그리고 폭풍처럼 쏟아진 내용을 확인하고 모두가 경악했다.
***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이 있지.
이 경우는 말을 좀 고쳐야겠다.
던전에 들어갔다 나오니 세상이 바뀌었다.
“S랭크 게이트 서울에 출현?”
“요즘은 무슨 놈의 게이트랑 던전이 깜빡이도 안 키고 들어오냐······.”
여기까지는 그래도 납득할 만했다.
요즘은 드문 일까지도 아니고, 서울은 워낙에 방어체계가 잘 되어 있어서 초동대처만 잘하면 인명피해를 많이 발생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
“누가 클리어했대?”
“수민 언니.”
“아, 수민 언니 근처에 있었어? 그러면 뭐.”
“이제 괜찮대?”
“응. 아까 전에 클리어하고 이제 정상화됐다는데.”
천만다행으로 이수민이 있던 근처에 게이트가 터졌단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거 다행이 아니잖아.
뭔가 느낌이 쎄했다.
이수민이라고?
그 새끼는 분명히 지금······.
그리고 내가 불길함을 곱씹기도 전에 누군가 외쳤다.
“미친, 대박이다······.”
“왜?”
육신통의 감각이 말해줬다.
귀를 막으라고.
하지만 결국 듣고야 말았다.
“14세 유지현 양, 최연소 S랭크 헌터 확정적······?”
“응? 뭐야, 뭐야?”
“중학생이 수민 언니랑 게이트 같이 닫았다는데?”
“지현이? 뭐야, 지현이가 이렇게 공개돼?”
“그래서 유지현이 누군데? 누가 나 설명 좀 해줘.”
“아, 지현이······.”
“이거 말하고 다니지 말래서 진짜 입에 지퍼 채우느라 고생했는데. 그 있잖아. 몇 달 전에 마나 감응력 측정불가.”
“그 사람 이름이 유지현이에요? 근데 중학교 1학년?”
뭐냐.
이게 뭐냐고.
왜 우리 딸 이름이 이런 식으로 언급되는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의 메시지 앱을 열었다.
최상단에 고정해둔 지현이와의 대화방.
메시지가 10개가 넘게 떠 있다.
<아빠, 아빠!>
<전화>
<전화 받아봐 빨리빨리>
<아빠>
<게이트 생겨서 나 싸웠는데>
<이거 엄마가 알면 어쩌지? 이거 보면 바로 전화해줘>
<근데 이것도 중요한데>
<아빠 나 지금>
<수민 언니가>
<나 전생에 있잖아>
<우리 사부님인 거 같아!>
<아빠 이거 보면 바로 전화해!>
입 근처 근육이 떨리는 걸 억지로 손으로 가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느껴진다.
김유진이다.
거의 모든 정황을 알고 있는 나의 공범자.
안타까움으로 가득찬 시선을 담고 김유진이 나를 바라봤다.
말로 안 해도 알겠다.
시선으로 서로의 의사를 전달했다.
'아버님, 힘내세요······.'
'말씀은 정말 감사한데, 힘이 잘 안 나네요······.'
'네······. 충분히 그 마음 이해해요.'
다시 고개를 떨궜다.
***
바람처럼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 꼴이 가관이었다.
혈압이 오른다.
이수민과 지현이가 나란히 커플 파자마를 입고 있는 것만 해도 복장이 터지는데, 둘 다 알록달록한 꼬깔모자까지 쓰고 있다.
탁자 위에 놓인 3단 케이크의 위용이 눈부시다.
“아, 아빠 오셨어요!”
지현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겨줬다.
그 옆에 이수민이 당당한 자세로 서 있다.
“오셨군요. 흠, 수고하셨습니다.”
이수민 이놈 봐라······.
하루 사이에 뭔가 뻔뻔해졌다.
어제 집에서 나갈 때는 그래도 손톱만큼이나마 손님의 자세란 게 보였는데.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전방위적으로 건방져졌다.
뭐랄까, 마치 크나큰 신분의 상승을 이룬 듯한······.
“아빠, 이게 전화로 말하기에는 너무 길어서. 일단 앉아, 앉아! 아빠 올 때까지 아직 초도 안 불고 있었어.”
지현이가 고사리 손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힘없는 몸짓으로 이끌려 자리에 앉았다.
“딸? 뭐가 어떻게 된······.”
“일단 소개할게!”
지현이가 그보다 더 즐거울 수 없는 표정으로 이수민의 팔짱을 꼈다.
“우리 사부님! 괜히 인정 안 하시는데 진짜 무조건이야! 백퍼센트!”
이수민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
하지만 보인다.
웃음 참으려고 입가 움찔거리는 거 다 보인다고.
이런, 이런 엿같은 경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