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치키치키 차카차카 초코초코초!
목요일. 그러니까 오늘까지 꽤 바빴다.
김유진 통해서 알리바이 만들고,
지현이한테 워크샵 간다고 둘러대고,
오늘은 던전 들어갈 인원 선정하는 데 가서 끗발 좀 세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지현이와 이수민이 나란히 거실에서 티비 보면서 깔깔거리고 있었다.
몹시 심기가 불편했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파자마를 입은 지현이가 달려와서는 반갑게 맞아줬다.
이건 행복하다. 흐뭇하다. 내가 이 맛에 살지.
그리고,
“오셨네요······?”
그 옆에 멀뚱히 서 있던 이수민이 말했다.
뭐? 오셨‘네’요?
그냥 왜 왔냐고 묻지 그러냐.
일단 표정을 침착하게 유지하면서 지현이에게 말했다.
“딸, 언니 귀찮게 안 했어?”
“으응, 언니 이번에는 던전 안 들어가는 거 확정났대. 그 참에 오늘내일 그······, 뭐라고 하더라.”
“비번!”
“응, 비번! 쉬는 날이래. 아까 전화로 말했잖아. 언니 오늘 자고 갈 거다?”
“그래······? 아빠는 옷 갈아입고 바로 나가야 할 거 같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수민 이 새끼 던전 오지 말라고 한 게 나이긴 한데, 막상 겪으니 밀려오는 이 패배감은 도대체······.
그래도 지현이 옆에 보디가드 한 명은 필요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이수민이 그 역할로는 최적이고.
나한테 함부로 못 나대게 금제는 걸어뒀지만 지금 상태로도 이수민은 충분히 강하다.
지현이가 힘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안전장치는 충분하겠지.
나도 하루이틀 안에 끝내고 올 거니까.
사실은 내가 던전 안 가고 이수민을 보내는 게 가장 좋긴 했지만, S랭크 컨셉 던전이라면 직접 들어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인간형 괴수가 나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던전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당면한 제일 목적은 이거다.
말 통하는 새끼 잡아다가 ‘너네 혹시 서울에 꿀 발라놨냐?’ 라고 물어보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 딸 주변을 맴도는 듯한 이 불길한 기운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대체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
부디 던전에서 마주치는 보스가 매국노처럼 줏대 없는 새끼여서 비밀이란 비밀은 모두 불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지현아, 아빠 갔다올게.”
“다녀오세요!”
“흐흐, 잘 가세요오.”
이수민 저 새끼 말에서 느껴지는 저 늬앙스는 대체 뭐냐.
저걸 배웅이라고······.
등 뒤에서 신난 지현이 목소리가 들린다.
“언니 그럼 지금부터 내가 쓴 글에 대해서 토론하자! 백분토론!”
“지현이가 쓴 글······?”
“응!”
고것 참 쌤통이군.
요즘 들어 우리 딸 글에 보여주는 열의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던데.
부디 지옥같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
***
정예슬이 내 옆에 졸래졸래 따라붙으며 말을 걸었다.
“스미스 쌤. 근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해도 돼요?”
“못하게 하면 또 끙끙거릴 거 아닙니까? 그냥 하십쇼. 뭡니까.”
“그, 있잖아요. 결혼하셨다고 했는데 그러면 사모님은 한국분이세요?”
스읍, 하고 소리를 내니 정예슬이 움츠러들었다.
옆에서 김유진이 핀잔을 줬다.
“예슬아. 이거 놀러가는 거 아냐.”
“에이, 나도 알지. 그래도 분위기 너무 굳어도 효율 안 좋고, 그리고 진짜 궁금하단 말야.”
뒤를 쳐다보니 이 새끼들 하나같이 궁금한 표정이다.
내가 별 말 없이 다시 걷자 뒤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런 사람이 겉은 바삭해도 의외로 속은 촉촉하다니까? 자기 여자친구나 와이프한테는 오지게 로맨티스트일걸.”
“너는 스미스 쌤이 니 친구냐?”
······이수민을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군기 담당이 없어지니 이건 뭐, 아주 개판이었다.
그나마 S랭크 애들은 입 다물고 있긴 한데 이 새끼들도 귀 쫑긋 세우고 있는 건 마찬가지고.
한 달이 길진 않은데, 그렇다고 짧지도 않았나 보다. 제법 팀으로서의 유대감이 느껴졌다.
그 팀의 정체성이 당나라 군대인 게 문제지.
내가 말했다.
“앞으로 10분만 떠드세요. 그 후로는 몸상태 점검한 다음에 바로 돌입합니다.”
이번 S랭크 던전은 동해안 어디 사람 없는 구석진 해안가에 홀연히 나타났다.
완전히 정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던전의 발생 빈도라던지 랭크는 보통 인구밀도 따라가기 마련인데 굉장히 드문 케이스였다.
덕분에 여기까지 오는 데만 다섯 시간 넘게 걸렸고.
“나 이번 던전 갔다오고 나서 바로 웨딩사진 찍으러 간다?”
“저기, 이건 내 생각인데······. 그런 말 함부로 하다가는 오빠 못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 엄마 보고 싶다아.”
“진짜 누가 쟤 입 좀 막아봐.”
그리고 내가 말한 10분이 지나자, 거짓말같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 자식들, 제법 흐뭇한데.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살려서 집에 데려다주지.
나직하게 말했다.
“들어갑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세상이 우리를 맞이했다.
***
던전이라는 공간의 발생 메커니즘이나 정체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설이 분분하다.
게이트는 열리면 괴수가 튀어나온다는 심플한 구조이기라도 하지.
던전은 랭크나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하로 내려가 보스를 잡기만 하면 클리어되는 것도 있지만,
A랭크나 S랭크쯤 되면 컨셉 스테이지가 아니라 해도 미궁처럼 아주 복잡한 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도 있다.
컨셉 스테이지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들어가기 전에는 뭐가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도 있다.
던전, 특히 컨셉 스테이지 던전은 어쩌면 ‘테라포밍’의 일환이 아닐까 하는.
초월적인 존재?
다른 차원의 지성인?
그것도 아니면 외계인?
진실한 정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자신이 사는 환경을 소환해서, 지구에 가져다놓는 실험을 하고, 지구인들의 반응을 살피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설.
근데······, 지금 보니까 그거 맞을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공간이 넓다.
평야라고 해야 하나?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다.
하늘색은 미세먼지 아주나쁨 단계보다도 우중충했다.
여기까지가 자연경관 묘사.
그리고 나는 지금 성벽 위에 서 있다.
성벽에서 아래로 뻗은 허허벌판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 허허벌판이라고 하기는 조금 어폐가 있겠네.
“쌤, 스미스 쌤! 저게 다 뭐예요?”
“나한테 물어보지 마십쇼. 보면 모릅니까.”
“쟤네······, 이쪽으로 오는 거 맞죠?”
“그런 것 같네요.”
많다. 더럽게 많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일만은 넘을 것 같은 몬스터들이 나와 헌터 애들이 서 있는 성채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아무리 봐도 우리편은 아니다.
쟤네랑 싸워야 할 것 같다.
여기까지는 지금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묘사.
쿠워어어어-!
아니다. 묘사를 조금 더 추가해야겠다.
단순히 몬스터 군단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것도 있었다.
눈에 띄는 놈이 셋이었다.
신장이 십 미터는 넘어 보이는, 오우거를 닮은 괴물.
허공을 날면서 입이 찢어져라 불을 뿜어대는 익룡 같은 놈.
날개 달린 흰 말에 탄, 뼈로 된 갑옷을 입은 새끼까지.
하나하나가 S랭크 보스몹이거나 그 이상으로 보인다.
고개를 돌려 김유진에게 물었다.
“김유진 씨. 왜 던전 체계는 S랭크가 끝이죠? 소설 같은 거 보면 SSS랭크까지 있잖아요. 우리는 왜 그런 거 없습니까.”
“그건 왜 물으세요?”
눈짓으로 성벽 아래를 가리켰다.
“김유진 씨 눈에는 저게 그냥 S랭크라고 퉁쳐도 될 걸로 보입니까?”
“그건, 그러네요. 집 가면 아빠한테 말해봐야겠어요.”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으면요.’ 라고, 김유진이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지금 우리가 단단히 좆된 것 같은데.
적당히 일만으로 잡고, 우리가 스무 명이니까 두당 오백 마리다.
헌터 애들한테 물었다.
“0킬 500데스. 다들 가능합니까?”
“저희 스무 명밖에 없는데 오백 번이나 죽어야 되나요······? 으음, 각각 스물 다섯 번씩 죽으면······.”
“······대충 알아들으세요. 오백 마리 죽일 수 있냐는 말입니다.”
모두 낯빛이 사색이 돼서는 고개를 저었다.
클리어 조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래가지고는 될 것도 안 된다.
우선 나가서 보스 세 마리 중에 한 마리라도 목을 따와야겠다 싶었다.
내가 몸을 일으켜 성벽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차였다.
위잉. 윙.
이상한 효과음이 들리고, 빛무리가 성벽 곳곳에 나타났다.
그리고, 빛이 사라진 곳마다 뭔가 나타나고 있었다.
“와아아-!”
“다 처죽여!”
평야의 괴물 놈들에게 밀리지 않으려는 듯 거친 함성이 성벽을 뒤덮었다.
“계산 다시 합시다. 한 명당······, 다섯 마리씩 잡으면 되겠네요. 이건 가능합니까?”
지금 우리 옆에서 함성 질러대고 있는 이 뿔달린 새끼들도 썩 친해지고 싶지는 않지만, 일단 여기서는 우리 편이라는 설정 같다.
헌터 애들 얼굴에 점차 생기가 돌아온다.
그래, 이 정도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전의를 다지고 있는 차에, 갑자기 저편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키가 2미터 좀 넘어 보이는데 근육이랑 몸의 밸런스가 좋아서 거인 같은 느낌은 전혀 없었다.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머리에 뿔이 있고, 등 뒤에 날개까지 달고 있다.
꼭 악마 비슷한 비주얼이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싸움 좀 하게 생겼다.
그놈이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마라. 우리도 아무것도 안 물을 테니까.”
“······.”
“저기 아래 저놈들 까마귀밥으로 만들면 되는 거지?”
악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뭔가 보여줄 테니, 우리 애들 건드리지 말고 냅두고.”
그리고 헌터 애들한테 말했다.
“무기 칼인 사람 나 잠깐 빌립시다.”
칼을 건네받고 그대로 밖으로 집어던졌다.
그와 동시에 성벽을 박차고 뛰쳐나가, 허공을 날고 있는 칼 위에 올라탔다.
이게 어검비행 馭劍飛行 이긴 한데······, 지금만은 이렇게 부르고 싶다.
“날아라······, 슈퍼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