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거절하기엔 너무도 많은 돈이었다.
청문회가 열렸다.
장소는 우리 집 거실.
쇼파에 지현이가 앉아 있고, 나는 의자를 하나 갖고 와서 마주 앉았다.
지현이가 엄숙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지금부터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까?”
“맹세? 그래. 하지, 뭐······.”
본인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어떨까 싶기는 한데 일단 선선히 답했다.
“피고. 으음······. 피고 맞나? 증인? 참고인? 아무튼! 똑바로 서세요, 유수현 씨.”
“아빠 앉아 있을 건데?”
“이익, 아빠 나 지금 진지하단 말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지현이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미쳐버린 것인가, 세상이 미쳐버린 것인가.
요즘 내 주위 사람들 사고회로가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거냐······.
“그래, 딸 하고 싶은 말 계속 해.”
“아빠, 아, 지금은 피고지. 아무튼 피고는 출장 간다고 하고는 결혼반지를 빼고 갔죠?”
“그렇긴 한데.”
“어째서입니까.”
“밖에 돌아다니면서 흙 만지는 일이라 빼고 갔습니다. 재판장님, 이거 억울한데 맞고소해도 되는 부분입니까?”
“앗······.”
‘아, 그건 몰랐네’ 하는 표정이 웃긴데, 조금 귀여웠다.
잠깐 입을 우물거리던 지현이가 갑자기 가드 불가 기술을 걸었다.
“그래도, 그래도 엄마와 나는 엄연히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정신적인 피해?”
“집 안 치우고 산다고 엄마 오자마자 대청소했단 말야. 근데 서랍에서 반지 나와서······.”
흠, 그렇게 된 거였군.
“솔직히, 솔직히 이 정도면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도 있는 거 아냐······? 아빠 요즘 주말에 집에 잘 없구, 야근도 자주 하구, 근데 엄마 왔는데 반지는 빼고 외박······은 아니지만 출장이라고 갔다 오구······.”
의자에서 일어서서 지현이 옆에 앉았다.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우리 딸 많이 속상했나보네.”
“나는 엄마랑 아빠랑 빨리 화해했으면 좋겠는데······. 화해했다고 말해도 안 통해. 나도 알 거 다 안단 말야.”
“요 쬐끄만 게.”
지현이 머리카락이 요즘 꽤 자랐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어깨 근처에서 잘라서 뒤로 묶고 다녔는데 올해부터 머리를 길러서 지금은 거의 가슴께에 닿을락 말락 했다.
가을쯤 되면 미용실에 같이 다녀올까 싶었다. 여자애들은 머리 이쁘게 하려면 돈 많이 드는데 지현이 용돈으로는 택도 없지.
손으로 머리카락을 슥슥 빗어줬다.
“흐으, 거기 머리 안쪽에서 시작해줬으면 좋겠어.”
“오늘까지만 서비스고 다음부턴 돈 받을 거야.”
“그러면 오늘은 공짜로 받고 내일부턴 외상으로, 응."
구체적으로 주문까지 내리고 기분 좋다는 듯 눈가를 좁히던 지현이가,
갑자기 ‘핫!’ 하고 눈을 번쩍 떴다.
“근데 아빠!”
“응? 왜?”
“나 갑자기 생각났어.”
“뭘?”
“머리 만지니까 갑자기 생각났는데, 으음······.”
지현이는 꾸물거리기만 할 뿐 쉽게 말을 못 꺼냈다.
그러더니 결국 말끝을 흐렸다.
“아냐, 아무것도······.”
고개까지 도리도리 흔들었다.
또 이상한 생각을 한 게 분명해 보이긴 한데, 지현이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넘기려나 보다.
“우리 딸 앞으로도 아빠한테 속상하거나 섭섭한 거 있으면 바로 말해야 돼?”
“응. 알겠어요.”
결국 훈훈한 가족드라마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청문회인지 재판인지 다 끝났으면 이제 내 차례다.
“유지현.”
“응? 아빠 왜애?”
티없는 눈동자로 내 쪽을 쳐다보는 지현이에게 말했다.
“성적표 가져와.”
“아, 아빠. 방금 아빠가 속상하거나 섭섭한 거 있으면 바로 말하라 그랬지?! 나, 나 지금 속상해! 섭섭해!”
“됐고, 빨리 가져와.”
“응······.”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좁힌 지현이가 자기 방으로 쫄래쫄래 향했다.
그 뒤로 엉망진창으로 혼냈다.
***
휴식시간에 정예슬이 주위에 여러 명 모아두고 있는 힘껏 약을 팔고 있었다.
“와, 진짜로, A랭크 컨셉 던전 안 들어가보셨죠. 완전 미쳐 돌아가는데 해골바가지 마법이 어찌나 무서운지. 콰앙! 쾅! 난리가 났다니까요? 그래도 제가 누굽니까. 네? 제 이름이 뭡니까.”
“예슬아······?”
‘쟤 왜 저러나.’ 싶어서 부른 걸 텐데 정예슬은 그것도 모르는지, 모르는 척하는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정예슬. 미모와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헌터계의 초특급 유망주 정예슬 아니겠어요? 제가 또 거기서 단단히 한몫했죠. 후후······.”
최민호는 양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다.
입모양을 보니까 ‘허언증’이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다.
“그때 제가 해골 마법을 피해내고 스미스 쌤한테 배운 기술로 마나를 끌어모아서, 어? 콰앙! 마! 느이 던전엔 이런 기술 업제? 함 무바라! 이러면서 와, 진짜······.”
듣다 듣다 못 듣겠군.
성큼성큼 다가가서 말했다.
“리슨 리슨 아이 캔트 리슨. 내가 싸우는 기술 가르쳐줬지 언제 거짓말 잘하는 법 가르쳐줬습니까.”
“아, 쌤. 그, 들으셨어요? 하, 하하. 귀도 밝으시지. 아니이, 물론 약간의 MSG가 들어간 건 맞는데에, 그래도 저도 열심히 했는데······.”
정예슬이 간신배 같은 웃음을 흘렸다.
아랑곳않고 물었다
“그리고 여기서 랭크 정예슬 씨가 제일 낮잖아. 정예슬 씨 헌터 랭크가 어떻게 됩니까.”
“아니 그거느은, 제가 데뷔가 좀 늦어서 그렇지······.”
“다시 묻습니다. 유의 랭크. 몇입니까.”
“B랭크입니다······.”
“잘 말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하는 말 그대로 따라하세요. 리슨 앤 리핏. ‘B급따리 B급따.’”
정예슬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아니, 쌤. 진짜, 히잉······.”
“유 시, 팔로우 미. ‘B급따리 B급따.’”
마침내 치욕에 물든 정예슬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B급따리······, B급따······.”
의도한 건 아닌데 모여 있던 헌터들 중 몇 명의 얼굴도 같이 일그러졌다.
쟤네도 B랭크였나?
그러고 보니 김유진도 최근에 활동 안 해서 B랭크로 내려갔었지.
정예슬을 바라보는 ‘언제 철 들려고.’ 라는 안타까움과 그런 정예슬과 같은 랭크라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뒤섞인, 묘한 표정이다.
이쯤에서 채찍을 거두고 당근을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래도 여러분 실력이 단기간에 꽤 올라가긴 했습니다. 원래 랭크가 뭐였든 반 급 정도는 올라가셨다고 봐도 됩니다. 하지만 던전에 들어가서 방심은 금물입니다. 특히 정예슬 씨.”
“네······. B랭크 헌터 정예슬입니다. 부르셨나요······?”
“당신은 발전 가능성이 굉장히 크니까 자만하지 말고 노력하세요. 아시겠습니까?”
“이런 걸로 조련당하는 내가 싫다······.”
정예슬이 작게 중얼거렸다.
손뼉으로 박수를 짝 치고 내가 말했다.
“다들 알림으로 받으셨겠지만 바로 요 앞의 S랭크 게이트. 제가 누누이 말했듯이 이 한국이란 땅이 지금 정상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세 사람만 같이 갔지만 여기 모인 다른 분들도 앞으로 A랭크나 어쩌면 S랭크 던전이나 게이트 정리에도 투입이 될 겁니다.”
일제히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의미에서?”
“수강생 겸 여러분의 조교를 몇 명 초빙했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기 밑에서 열댓 명 정도 올라오고 있다.
고개를 쭉 빼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헌터들이 술렁거렸다.
차지유, 정상우, 백도진, 권준일, 정연희.
대한민국 땅을 주름잡는 S랭크 헌터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저 사람 이수민 아냐?”
“그런 것 같은데?”
전부 해서 S랭크 헌터들만 여섯이었다.
연락은 열 명 넘게 돌렸다고 했는데, 뭐 이 정도면 많이 왔지.
지난번에 같이 던전 들어갔던 차지유와 정상우.
나머지는 협회 쪽에 소속되어 있어서 김유진 통해서 끌어오거나 이수민이 그나마 안면 있다고 데리고 왔다.
솔직히 걸어오는 애들, 특히 S랭크 헌터들은 설레거나 기대감에 찬 건 아니다. 꼭 억지로 예비군 끌려온 사람들 같다.
이해는 한다. SNS 팔로워가 기본으로 백만 명 단위이고,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잘나가는 애들이니까.
일단은 인맥으로 데리고 온 거지.
얘네 여섯 명이 온 것만 해도 나름대로의 성과다.
곧 나한테 충성을 바치게 될 테니까.
이쪽으로 다가온 이수민이 내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한 손으로 받아주고 다시 말했다.
“서른 명 모였군요. 여러분이 1기입니다.”
“1기?”
“이미 듣고 오신 분들도 있을 거고, 나중에 에이전시나 협회 통해서 자세하게 설명이 가겠지만 팀이 구성될 겁니다.”
“쌤, 무슨 팀이요?”
“간단하게 말해서 제가 팀장, 여기 있는 이수민 씨가 바로 그 아래이고, 다른 S랭크 다섯 분은 나머지 분들을 담당할 겁니다.”
누가 발끈하려고 하는데 차지유와 정상우가 옆구리를 찌르면서 말렸다.
음, 현명한 선택이다.
“정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시행하는 프로젝트 팀이고 세간에서 알지는 못할 겁니다.”
이런 거 조직하고 있다는 거 알려져 봐.
종말론 같은 거 나돌고 집값이나 떨어지겠지.
“하지만 여러 검증을 거쳐서 여러분을 차출했으며, 우리는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S랭크, 혹은 A랭크 이상의 컨셉 던전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투입을 보장받습니다. 이해하시겠죠?”
얘네 모으려고 높으신 분들 데려다 힘 좀 썼다. 볼 만한 구경거리 하나 만들어줬지.
다들 알 만한 양반들이라 안 그래도 최근 비상사태에 대해 고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지 굉장히 빠른 일처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내 설명이 끝나자 누가 손을 번쩍 들었다.
헌터 같은 거랑은 전혀 인연 없을 것 같은, 서른 살쯤 돼 보이는 여자.
S랭크 헌터 차지유였다.
“그, 스미스 씨?”
“네. 말씀하시죠.”
“미리 듣고 온 것도 있고 하신 말씀도 알겠는데요. 음······, 굳이 이렇게 모으고 주기적으로 자리를 만드는 이유가 있나요?”
“좋은 지적이네요. 답은 간단합니다. 좀 더 강해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이수민 씨?”
이수민이 불만 많은 표정으로 다가와 내 옆에 섰다.
“S랭크 분들 정도 되시면 다들 전투에도 일가견이 있고, 감각도 좋습니다. 하지만 부족해요. 이렇게 모은 이상 대충 할 생각이 없다, 이 말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둘째치고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 한꺼번에 맞붙어도 이수민 씨를 못 이깁니다.”
“아니, 그게 무슨- 읍읍!”
지방방송은 옆에서 알아서 처리해줬다. 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수민 씨는 단순한 전투기술이 아니라, 동양 무술에 아주 조예가 깊습니다. 특히 중국 무술 쪽이 특기고요. 맞죠?”
이수민이 침묵으로 긍정했다.
전음을 날렸다. ‘대답 안 하냐?’
“······네. 맞습니다.”
“정 못 믿겠으면 이수민 씨가 직접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자신 있는 사람 열 명 뽑아서 이수민 씨랑 한 번 싸워보시던가요.”
상의를 마치고 나선 것은 백도진과 권준일.
전의에 불타는 백도진과 권준일은 호승심이나 호기심 때문에 와본 것 같고, 인상부터 선해 보이는 정연희는 이수민 따라 온 애라는데 얘는 안 끼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나머지 여덟 명은 오늘 처음 온 A랭크 헌터들로 총 열 명.
십 분 후에는 그중 아홉 명이 사이좋게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S랭크 헌터 권준일이 이수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발, 프리 티벳!”
퍼억!
둔탁한 타격음이 들리고 권준일마저 흙냄새를 직접 만끽할 수 있었다.
원통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타이완······, 남바완······.”
“야, 웃지 마.”
“그럼 웃긴데 어떡해.”
“근데 중국 무술 개쎄네······.”
내가 다시 박수를 쳐서 주위를 환기시켰다.
“이 팀이 언제까지 갈 지는 모르겠는데, 그래요. 프리랜서처럼 헌터하다가 반쯤 국가기관에 소속된다는 게 갑갑하거나 적성에 안 맞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깐 말을 멈춘 내가 김유진 쪽을 흘낏 바라봤다.
김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팀이 유지되는 동안은 여러분이 받던 기본급의 세 배에 던전 들어갈 때의 위험수당이나 클리어 수당도 세 배를 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은 이 자리에 계신 다이아 수저 김유진 헌터께서 수고해주셨습니다.”
김유진······. 알면 알수록 도라에몽 같은 여자······.
꼭 누군가 편하게 일처리하기 위해 탄생시킨 것 같은, 그런 여자······.
아무튼 자리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다.
그리고, 정예슬을 시작으로 무수한 박수세례가 김유진과 나를 향해 이어졌다.
거절하기엔······, 너무도 많은 돈이었으니까.
***
한 달 정도 시간이 흘렀다.
지현이는 방학을 하고 한창 집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슬슬 매니지먼트에서 컨택이 오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에 빠져 아침저녁으로 사이트 쪽지함을 열어보는 중인데, 올 리가 있겠나.
그리고.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금요일에 보죠.”
마침내 S랭크 컨셉 스테이지 던전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