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우리 딸이 달라졌어요.
잡아떼면 죽겠지.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도 죽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면 일단은 잡아떼야지. 좀 더 늦게 죽잖아.
이수민이 못 듣게 지풍을 날려 기절시키고 방문까지 닫았다.
창문 밖으로 널찍이 펼쳐진 도심을 바라보니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다.
“응? 나 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수화기 너머, 어느새 냉기가 뚝뚝 흐르는 애 엄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일······?>
“응. 아직 업무처리가 좀 덜 끝나서 한두 시간은 더 있어야 될 것 같은-”
<오빠.>
되는대로 주절거리고 있는 와중에 애 엄마가 말을 끊었다. 무섭다.
<나도 오빠 사회생활이라는 게 있으니까 괜히 부서에 전화해서 물어보고,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아. 그런 건 상대방을 못 믿는 사람이나 하는 행동이잖아?>
스스로 납득하듯이 애 엄마가 흐응, 하는 콧소리를 냈다.
굉장히 무섭다.
“그······, 렇지? 그러면 왜······.”
<그냥.>
이미 사지로 들어왔음을 직감했다.
‘그냥’. 애 엄마의 필살기 같은 표현이다.
<그냥 아는 거야, 그냥. 오빠가 오늘 출장 안 간 거랑, 지금 서울에 있을 거라는 거랑. 나는 그냥 알아. 맥주 같은 거 마시고 있었어? 친구집은······, 오빠 친구 많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도 다 결혼했으니까 친구 집은 아닐 거고. 어디야? 호텔이야?>
뭔데. 뭐냐고.
어떻게 알았는데.
“수희야, 그게 있잖아.”
<······수희?>
이건 악수였다. 패닉에 빠져서 무심코 이름으로 부르고 말았다.
바닥 밑에 지하실 있다더니 그 말이 꼭 맞네.
되묻는 애 엄마 목소리의 상태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미 충분히 싸늘했는데, 급기야 사태가 두 배로 악화됐다.
애 엄마가 짧게 한 마디씩 내뱉었다.
<오빠. 우리 약속한 거 있잖아. 지금은······, 아직 아냐.>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건 그렇고, 일단 하나씩 물어볼게. 오빠는 대답만 해주면 돼. 어때? 되게 쉽지 않아?>
아니, 하나도 안 쉽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나한테는 거부권이 없다.
“응. 그러면 물어볼래?”
<첫번째로 결혼반지. 왜 빼고 나갔어?>
이런 젠장.
첫판부터 최종보스였다.
던전 들어가는 것 때문에 서랍에 넣어두고 왔었는데 그걸 또 어떻게 봤지?
하는 수 없다. 진실을 말하되 몇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감춰야 한다.
그것 말고는 돌파구가 없다.
우물거리면서 답했다.
“그, 요즘 현장 일하거든. 그래서 불편해서 빼고 나왔긴 한데······.”
<흐응. 출장 안 간 거 알고 있는데 현장 일이라고?>
현장 일 맞지. 난 거짓말 안 했다.
그 일이라는 게 대체 뭐냐고 캐묻지만 않으면 무사히 넘어갈 거고, 애 엄마가 그렇게 세세하게 캐묻는 스타일은 아니다.
됐다. 내 설계는 완벽하다.
<그러면 오빠 혹시······, 지현이 몰래 헌터해?>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바로 아냐니까······.
<여기서 이어지는 게 두 번째 질문인데, 오빠.>
침을 꿀꺽 삼키고 답했다.
“응. 왜?”
대뜸 폭탄이 떨어졌다.
<혹시 나 피하는 건 아니지?>
나도 모르게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면서 답했다.
“응? 아냐, 그런 거 절대 아냐. 진짜로 우연.”
<그래? 되게 타이밍 좋게 나 왔을 때 집에 없길래 혹시나 했는데······. 응, 그건 믿을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헌터는 요즘 부업 삼아서 하고 있기는 한데 진짜 하나도 안 위험하니까 걱정 안 해도 괜찮아.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하고, 그리고 지현이한테는······.”
애 엄마가 선선히 답했다.
<응, 말 안 해. 당연하지. 우리 일은 우리끼리만 해결하자고 합의봤잖아. 그러면 세 번째 질문. 아, 정정해야겠네. 이건 질문이 아니라 추궁이야.>
“뭔데······?”
<오빠 나한테 분명히 말했지? 앞으로 어떻게 되더라도 지현이는 무조건 잘 돌보고 있을 거라고. 나도 그건 믿었고. 근데 오빠.>
“······네.”
<지현이 성적이 왜 그래?>
성적? 무슨 성적?
나는 아예 모르는 일이다.
가만히 침묵만 지키고 있으려니 애 엄마가 감탄하듯이 말했다.
<와, 오빠는 몰랐구나아. 오빠는 자식 성적이 어떤지 알지도 못하고, 지현이 얘는 아예 말도 안 했단 말이지?>
“응. 지현이가 말 안 했어. 난 모르는 일이야. 유지현 고 쬐끄만 게 벌써부터 성적표 숨기고 그러네? 혼 좀 내줘. 혼낼 때 지현이가 버릇없이 굴면 나한테 말하고. 화이팅!”
국어책 읽는 느낌으로 빠르게 답했다.
사랑하는 우리 딸을 거침없이 팔아먹었다.
양심에 거리낌 하나 없었다.
웹소설 쓰랴, 헌터 교육 이수하랴, 공부할 시간이 없었겠지.
하지만 그건 지현이 잘못일 뿐이다. 내 잘못 아냐.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애 엄마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싫어.>
“뭐? 왜?”
<우리 딸을 지금 얼마만에 보는 건데 혼을 왜 내. 잘 타일러야지. 우리 지현이 아직 어린데 왜 애 기를 죽이려고 그래? 이런 건 당연히 보호자 책임이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긴 내가 오빠 탓할 처지가 아니긴 하지만······.>
애 엄마가 말끝을 흐렸다.
수화기 저편에서 지현이가 애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지현이 다 씻었나봐. 나도 어차피 영화만 보고 다시 가야 되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극존칭을 쓰고 말았다.
사실 예전부터 가끔 썼기 때문에 별로 어색하지도 않다.
애 엄마가 홀가분한 말투로 말했다.
<괜찮아. 이쪽도 이제 얼추 끝나가거든.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조만간 어떻게든 결론이 날 것 같아. 마무리되면 오빠랑 얼굴 보면서 같이 얘기해. 오빠도 그 전까지는 복잡한 문제 있으면 정리하고 터놓고 대화하자. 그래줄 수 있지?>
그야 물론이다. 애 엄마만큼이나 나도 바라는 일이다.
마음을 담아서 다짐하듯 말했다.
“응. 그러자.”
<아니면 오빠. 다 해결되고, 그냥 오빠랑 나랑 지현이랑 같이 가면······. 아냐, 아냐. 미안. 방금은 내가 실언했어.>
“······아냐.”
이 이상의 대답을 해줄 수 없는 내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애 엄마가 다시 기운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그래. 오빠 그러면 또 연락할게. 내일은 집에 일찍 들어와야 돼? 나 끊는다?>
“······다치지 말고.”
<······.>
애 엄마가 잠깐 놀란 듯 숨을 삼켰다.
그리고는 농담처럼 말했다.
<그거 혹시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내가 응.’ 이라고 대답한 걸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유지현, 영화 보기 전에 성적표부터 가져와.’ 라고 애 엄마가 호통치는 소리가 멀찍이 들리다가 전화가 끊어졌다.
휴대전화를 근처 쇼파에 던져놓고, 침실로 다시 들어갔다.
찾던 걸 못 찾겠어서 이수민을 깨웠다.
“야.”
“······?”
이수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와 자기 몸을 번갈아봤다.
지금 이 새끼와 나와의 거리는 불과 30센티미터.
이수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가더니, 이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이 미친 새끼······! 본좌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쿠웅!
“아악!”
제법 아플 거다. 내공을 실어서 때린 꿀밤이었거든.
정수리를 감싸쥔 채 울상을 하고 있는 이수민에게 말했다.
“이 새끼는 진짜 무공을 춘화집으로 배웠나. 야, 닥치고 카드 내놔.”
“뭐라고······?”
“지갑 어딨냐고. 내 거 말고 니 거. 아니지, 니 건 내 거고 내 거도 내 건데. 하여튼 지갑 내놔.”
“저기 겉옷에······.”
“아, 거기 있었냐.”
이수민이 걸치고 온 겉옷을 뒤적거리는데 등 뒤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갑은 또 왜······.”
이수민의 지갑에서 카드를 빼들고 방문 쪽으로 걸었다.
“나는 다른 방 가서 잘 거니까 허튼 짓하지 말고 조용히 반성하고 있어라. 튈려고 하면 바로 알 수 있으니까 죽고 싶으면 해보던가.”
그리고 로비로 내려가서 방을 하나 더 예약하고 그날은 거기서 잤다.
아무 일 없을 거라도 그냥 좀 그랬다.
애 엄마가 슬퍼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들키면 큰일 날까봐 무서웠던 건 전혀 아니다······, 라고는 말 못하지만.
***
다음날 아침.
룸서비스로 시킨 아침을 테이블 사이에 두고 이수민과 대화를 나눴다.
“꼭꼭 씹어 먹어라. 속세에서 먹는 마지막 야채죽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 미친-”
“어허.”
“······어르신.”
“자, 말해봐. 어떻게 할 거야.”
내 조건은 크게 세 가지였다.
무적신공과 각종 술법을 통한 심령금제를 받아들일 것.
내가 부르면 재깍재깍 대답하고, 요청에 최대한 협조적일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조건.
“누구에게도 정체를 밝히지 말라고······?”
“그래. 너 이제 천마신교 교주 아니잖아.”
“신교의 교주에게 그게 무슨 개소······, 아니, 강아지의 말씀이십니까.”
저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는 언제 기회가 될 때 제대로 고쳐줘야겠다.
일단 기습적으로 말했다.
“야. 너 몇 살이야.”
“스물여섯 살이다만.”
“어디 살아.”
“그건 왜 묻지?”
갑자기 경계하듯이 몸을 움츠린다. 이 미친놈이······.
진지하게 이 새끼가 평소에 뭘 보고 다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 그건 됐고. 그럼 너 이름 뭐야. 뭐였더라?”
“이수민······, 앗!”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이수민의 표정이 확 굳었다. 그리고 뚫어져라 나를 노려본다.
“거봐라. 너 스물여섯 살이고, 서울 어딘지 모르겠지만 끝장나게 좋은 아파트 살고. 이름은 이수민이다. 천마신교 교주 해먹던 진천군 아니라고. 그때 니가 죽고 못 살던 교도들도 저승 간 지 오래라니까? 이해가 되냐?”
“······.”
“비록 우리가 재회한 순간이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오해도 풀렸고, 이제 서로 죽이니 마니 싸울 이유도 없다 이거야.”
“그래도······, 아무한테도 정체를 밝히지 말라는 건······.”
“호오. 왜? 뭐, 사이좋게 같이 환생한 사람이라도 있냐?”
빈틈을 찌르듯이 내가 물었다.
네놈이 망설이는 이유를 나는 알지.
우리 딸한테 정체 밝히고 짝짜꿍하고 싶다는 거 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걸 허락해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말을 안 하는 걸 보니까 뭐가 있긴 있나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대답해.”
이수민은 입을 꾹 다문 채 그저 나를 쳐다봤다.
무림맹주한테 제자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겠지. 이해한다.
그래, 이해만 한다.
“내가 묻노니, 너는 답하라. 네가 정체를 말해주고 싶은 사람이 누구지?”
강호무림에 떠도는 전설적인 경지 중 하나로 심어검心馭劍이라는 게 있다.
심검의 ㅅ도 구경 못해본 인간들이 떠드는 거라 솔직히 다 잡다한 낭설이고, 심어검이란 게 간단하게 말하면 기세다.
이치에 맞닿아, 인세의 법칙에까지 관여할 수 있게 된 자가 발하는 기세.
그건 차라리 언령이라고 해야 할 초능이며, 지금처럼 허약해진 이수민은 절대로, 죽어도 저항 못한다.
“빨리 말해. 그리고 아까 말한 세 가지 조건 다 지키면 살려준다. 단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거부하면 그 순간 죽인다.”
이수민의 입에서 핏기가 주륵 흘러내린다.
어제 중단전에 먹여줬던 것보다도 백 배는 고통스러울 텐데도 비명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를 꽉 깨물었는지 묘한 소리가 방 안에 흘렀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안심했다.
툭 내뱉었다.
“에휴. 새끼, 고집은. 그래, 상관없다. 그게 누구든 나한테 안 될 거니까. 하지만 조건 세 가지는 지켜라. 알겠냐?”
“알겠······.”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이수민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만약에 이 새끼가 우리 딸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했다면 곧장 죽여버렸을 거다.
그런 놈을 살려둘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 각오라면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믿어도 되겠지.
게이트와 던전. 그리고 괴수들.
어제 밤의 S랭크 게이트만 해도 석연찮은 점이 있다.
분명 경보에서 일대의 다른 게이트와 던전이 모두 소멸됐다고 했지.
그런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소설 좀 써보자면 ‘다른 곳의 마나를 당겨와서 게이트를 열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게 하필 우리 집 근처에 나타났다는 거. 이상하잖아. 저번에 괴수가 나타났던 일도 있고.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 딸을 자기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이 한 명 정도는 더 있어도 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지현이를 거실에 불러놓고 말했다.
“유지현, 성적 나온 거 왜 말 안 했어.”
오면서 확인해 보니까 연재하던 글을 3연참을 해놨더라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게다가 최신화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등장했다.
딱 봐도 그때 던전에서 역용한 나를 보고 만든 것 같은데······.
내가 마교 교주의 조력자 역할로 등장하다니.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묘했다.
게다가 우리 딸의 반응이 왠지 시큰둥하다.
“성적표는 왜?”
“아빠한테 왜 안 보여줬어?”
“······어제 엄마한테 벌써 혼 다 났단 말야.”
뭐지. 이게 반항기라는 건가?
가정에서 소외된 아버지가 된 듯한 이 느낌은 대체······.
“딸.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면 돼, 안 돼.”
지현이의 눈가가 떨린다.
울려는 건 아닌 것 같고, 감정이 북받친 것 같은 표정이다.
마침내 지현이가 소리쳤다.
“그러는 아빠는 가정에 왜 충실 안 하는데?!”
이건 또 무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