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22화 (22/130)

22. 역대 최단기 퇴물.

이수민은 눈을 떴다.

머리가 멍해서 생각이 원활하게 이어지질 않았다.

무심코 얼굴을 만지려다가 아래턱에 통증이 극심하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을 찌푸린 채 손바닥으로 턱을 살살 쓸어대는 이수민을 향해 누군가 물었다.

“죽 뭐 좋아하냐?”

‘······?’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이수민이 고개를 돌렸다.

“일주일은 죽만 먹어야 될 텐데 미리 메뉴 로테이션 생각해놓는 게 좋을걸?”

“하무······, 아야······.”

“방금 그거로 하루 더 추가.”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천마신교의 숙적. 신교 내에서는 ‘그 깡패 새끼’로 통칭되던 하무린이었다.

전생과는 얼굴이 완전히 달랐지만 저 재수없는 분위기만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그가 팔을 붕붕 돌리며 이수민 쪽으로 다가왔다.

“하긴 지금 대답 잘못하면 굳이 메뉴 고를 필요도 없겠네.”

“······주일 테면 주여라아······.”

이수민이 참새 눈물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일 테면 죽여라’ 라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발음도 엉망으로 새었다.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었다면 그까짓거 참아내고 호기롭게 외쳤을 터이나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일반적인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결국 입을 오물거리며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무린이 이죽거렸다.

“그래? 그러면 소원대로 죽여주긴 할 건데, 그 전에 궁금한 거 하나 물어나 보자.”

“뭐르 마이냐······.”

“대체 내가 왜 그렇게 싫냐? 고기 먹인 거. 그래. 내가 좀 심했다. 근데 솔직히 말해봐. 입신경 언저리에서 빌빌댈 때 내가 한 말 생각 안 났었냐?”

‘그걸 어떻게······?’

이수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천마 백운상이 귀천하기 얼마 전, 당시 소교주였던 이수민은 처음으로 입신경으로 들어가는 단초를 찾을 수 있었다.

몇 년째 절정지경의 막바지에서 헤매다 마침내 이뤄낸 일이었다.

정말로 안 해본 게 없었다.

칠주야를 폭포에서 냉수마찰만 하기도 했고, 때로는 단 한 걸음도 꼼짝 않고 하늘만 바라보기도 했다.

한 달간 곡기를 끊었을 때는 백운상이 허공섭물을 이용해 강제로 쌀알을 입에 집어넣기까지 했다.

그렇게 해도 해도 안 되어서 마침내 포기하려는 마음이 들었던 그때였다.

오래 전 하무린이 일렀던 전음이 스쳐 지나간 것은.

‘아서라. 고기 안 처먹는다고 인세의 고통을 짊어질 수 있다 생각하는 것부터가 네 오만이니까.’

찢어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운 말이었는데 한 번 생각나자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비우고 버리고,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사흘이나 지나 있었다.

사부인 백운상은 대견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한 번 툭 두드려줬었다.

‘한데 그걸 저놈이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냐? 백운상이한테 들었으니까 알지. 아니면 내가 어떻게 알아?”

“거지말 하지 마아······!”

“아오. 거 새끼 의심은 존나게 많네. 네 사부랑 나랑 어? 역용하고 같이 술도 몇 번 먹었다니까. 우리가 친했어요. 물론 백운상이가 술 취해서 정신 못 차렸으면 바로 멱따긴 했겠지만, 아무튼 친했어.”

이수민으로서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국회의원들 멱살 잡고 싸우다가도 밤 되면 같이 술마시고 논다잖아. 그냥 그런 거라고 생각해라. 느그 사부가 너 하는 짓이 못 미더워서 안 알려줬나 보지.”

‘그럴 리가······.’

이수민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직 하무린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황산에서 백운상이가 처음 나 보고 한 말이 고맙다는 거였는데. 그리고 아까는 네놈 하는 짓이 얄미워서 좀 구라를 쳤는데, 그날 사실 싸우지도 않았어.”

“술 한 병 마신 다음에 백운상이가 나보고 등선하자더라고. 같이 올라가서 선계 먹어버리자고. 그래서 둘이 비무하면서 선계로 올라가려다가 나는 마음 바꿔서 남았고, 그놈은 그대로 올라갔다. 믿기 싫으면 말던가.”

이 순간 지금껏 하무린을 증오해 왔던 이유의 절반이 사라졌다.

그게 등선이 됐건 죽음이 됐건 상관없다.

사부는 하무린을 만나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오래도록 증오했었는데······, 사실은 사부가 강력히 원했던 것이었다니.

물론 저 말을 다 믿을 순 없다.

하지만 내공도 육체적으로도 완벽하게 무력화된 이수민에게 구태여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게다가 직감적으로도, 이수민은 방금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증오의 절반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사실.

신교의 제일대적이었던 협검무제.

이수민 본인에게 안겨주었던 치욕.

그것만으로도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었다.

이수민은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하무린이 잠깐동안 그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어이가 없는지 낮은 목소리로 일렀다.

“나는 이미 두 번의 이유를 줬다. 목숨을 구걸해도 될 이유를. 아무리 백운상이 유언이라도 세 번은 없어.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 죽이려고 달려든 놈을 내가 왜 살려둬. 내가 호구냐?”

그리고는 손가락을 튕겨 지풍을 날렸다.

그제서야 이수민은 몸이 자유를 되찾는 걸 느꼈지만 내공의 금제는 아직 풀린 게 아니었다.

하무린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일 오후까지 시간 준다. 네가 살아야 할 이유와 그게 나한테 어떻게 도움이 될 건지 보고서 만들어라. 기절해 있을 때 네 단전에 내 꺼 내공 넣어놨거든. 내가 안 풀어주면 어차피 내일 밤 되기 전에 터지니까 잘 생각해서 결정해. 알겠냐?”

이수민이 당장 혀를 깨물어 자살하지 않은 건 오직 한 가지 이유였다.

현생에서 다시 만나게 된 제자.

그 아이를 보기 전까지는 지금은 죽을 수 없었다.

내일 어떻게 될 지는 모르지만, 이수민은 우선 치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수민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하자 하무린이 다가와 팔을 잡아챘다.

그대로 땅바닥에 질질 끌어서 던전의 출구 쪽으로 향했다.

“놔, 혼자서 가······.”

“좀 닥쳐. 데굴데굴 굴러가야 될 새끼가 무슨. 그나저나 너 돈 잘 버니까 카드 좋은 거 쓰지?”

“그건 왜 묻-”

“왜 묻겠냐? 당연히 네 카드 쓰려고 묻지.”

그리고 대기실에 들어가기 직전, 하무린이 갑자기 이수민을 둘러맸다.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헌터들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하무린이 헌터들에게 말했다.

“이 친구 정신 차렸습니다. 아까 보스 방에 보니까 뭐가 적혀 있던데 그것 때문인지 세뇌 같은 걸 당한 모양인데, 쥐어패니까 돌아오더라고요. 우리 많이 친해졌습니다. 하하.”

‘말 맞춰라. 이 자리에서 바로 뒤지기 싫으면.’

도저히 대답은 하기 싫어서 이수민은 그냥 눈을 내리깔았다.

그 치욕스러운 시선처리가 오히려 신뢰감을 주었던지, 헌터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해결돼서 다행이네요.”

“깜짝 놀랐어요, 정말.”

“대충 정리된 것 같은데 이제 나갑시다.”

대기실을 나서고, 환한 태양빛이 이수민을 맞이했다.

***

지금 시각은 오후 일곱 시.

벌써 열두 번도 넘게 고민했다.

이걸 죽여야 돼, 말아야 돼.

진천군 이 새끼 카드로 긁어서 서울에서 제일 좋은 호텔의 제일 좋은 방을 하나 빌렸다.

그러고 보니 현생에서는 이수민이네.

하여튼 그냥 풀어주기 싫어서 같이 끌고 왔는데, 이 새끼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온갖 지랄발광을 다 했다. 대가리에 마구니만 낀 이 음탕한 새끼······.

하도 난리를 치길래 ‘백운상이를 등선시킨 내 펀치를 받아라!’ 하면서 몇 대 쥐어패니까 분을 못 이기고 기절해버렸다.

지금은 혈도 짚고 수건으로 묶어서 방구석에 던져둔 상태다.

우선 이수민이를 죽일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 마교 수장을 지낸 위험한 종자다.

두 번째는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것.

그리고 죽여야 하나 고민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백운상이가 부탁했던 건데 이건 아까 기회 다 줬고.

두 번째는 죽이고 모른 체하면 그만이라지만 그래도 우리 딸이 그렇게 좋아하던 사부라는데.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장발장 형님도 마리우스 그 새끼를 존나게 마음에 안 들어 했지만 유산까지 물려줬잖아. 대충 그런 느낌이다.

마지막 세 번째가 이수민이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이 새끼 신분도 괜찮고, 재력도 괜찮고, 제법 여기저기 써먹을 데가 있어 보였다.

적당히 안전장치가 필요하겠지만 그 정도는 생각해 둔 게 있고.

아무튼 평안감사도 지가 싫으면 그만이다.

내일까지 내 앞에서 데굴데굴 구르지 않으면 타협은 없다.

죽고 싶다는데 내가 뭘 어쩔 거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맥주를 홀짝였다.

내일까지 들어간다고 했으니 오늘은 여기서 하루 자고 갈 계획이었다.

오늘 집에 가면······, 혹시라도 애 엄마가 있을지도 모르고.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야근을 한다는 말을 이해를 못했었는데 지금에서야 실감한다.

야근이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야 할 텐데, 이 괴수라는 놈들이 나타나는 원인은 여전히 감도 안 잡히고.

오늘 던전에서 해골 대가리는 생포해서 물어볼 생각도 했었는데 이수민 저 새끼가 순식간에 뼈다귀 분해를 시켜버렸다.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조용히 베개를 들어 이수민 쪽으로 집어던졌다.

이걸로 숨쉬기가 조금은 곤란해졌을 터.

아무튼 답답한 마음에 던전과 게이트 관련 커뮤니티를 뒤적이고 있었다.

갑자기 휴대전화가 버벅이더니 진동이 미친 듯이 울려댔다.

「긴급경보.

S랭크 게이트 생성 중.

해당 위치정보 반경 10KM 이내 모든 게이트와 던전 일제 소멸.」

위치가······.

“이런 미친!”

시발, 우리 집 근처였다.

일단 생각할 것도 없이 옷을 챙겨입었다.

여전히 꽁꽁 묶인 채 읍읍대고 있는 이수민에게 소리쳤다.

“딱 거기 박혀서 명상하고 있어라. 올 때 보고서!”

그리고 방문을 열고 뛰쳐나가려는 찰나.

우우웅-

진동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각성자 전용 앱이었다. 열어서 확인해봤다. 응?

“이건 또 뭐야.”

「경보해제.

S랭크 게이트 소멸.」

뭐냐고.

방금 생기던 게 갑자기 무슨 소멸이야.

“시발, 아주 미쳐 돌아가는구만.”

커뮤니티에서는 ‘역대 최단기 퇴물 게이트’라느니 ‘아포카리몬 게이트’라느니 아주 난리가 났다.

그래도 우리 집 근처라는데 안심할 수가 없다. 일단 나가긴 해야 할 터.

지현이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전화를 든 순간이었다.

마치 눈치라도 챈 것처럼 전화가 왔다.

침을 꿀꺽 삼키고, 받았다.

“여보세요?”

<응, 오빠. 방금 봤어?>

“뭘?”

<빨래 걷다가 밖에 보니까, 하늘에 구멍 뚫리길래 내가 막았는데. 그거 게이트였지?>

꼭 가스불 내가 잠갔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이러는 것 같다.

방금 그게 S랭크 게이트였다는데······.

“S랭크 게이트였다네. 다행이다.”

<그래? 어쩐지 좀 힘들더라.>

애 엄마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 지현이는 지금 물 받아서 목욕하고 있어. 나오면 같이 영화 보려고.>

“그래? 응. 그러면 재밌게 놀고.”

<응. 근데 오빠. 있잖아······.>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이지?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지만, 나온 건 그냥 평범한 말이었다.

<나 머리 좋은 거 알지.>

“응? 응. 알지.”

<오빠 중2 때 수학 포기한다 그랬을 때 내가 붙잡고 가르쳐줬잖아. 오빠 고3 때 내가 과외해주고, 지금 직장도 필기 시험 내가 알려준 데서 다 나왔잖아. 그때는 나도 엄청 기분 좋았는데.>

“응. 그치. 그거는 항상 고맙지.”

<흐응. 그렇게 생각해 주면 다행이구.>

애 엄마한테는 정말 많이 도움을 받았다.

사실상 애 엄마가 마련해준 인생길을 나는 걷기만 하면 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즐거운 웃음소리를 지우지 않은 채로, 애 엄마가 말했다.

<근데 있잖아. 오빠. 오빠는 왜, 힘들게 들어간 그 직장을······, 왜 이렇게 불성실하게 다녀?>

곧바로 깨달았다.

이건 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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