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20화 (20/130)

20. 한 번만 말해줄 수 있어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이수민은 팔짱을 낀 채 고심했다.

지하 1층에 진입하려던 순간 갑자기 오감이 외부와 단절되어 버렸다.

그리고 B3이라고 쓰여진, 던전의 지하 3층으로 추정되는 곳에 혼자 갇히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 다른 층으로 흩어졌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다.

무슨 컨셉으로 설계한 던전인지는 몰라도 진입한 헌터들을 분산시키는 것이 목적 같았다.

탈출을 시도해 보려고도 했다.

가만히 앉아서 저쪽이 하라는 대로 당해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던전이라는 게 외부와 유리된 공간이니까, 뚫어내려면 어지간해서는 무리야.’

정말로 간단한 일이 아니다.

수십 년을 강호무림의 독보적인 천하제일인으로 군림했던 무제 진천군에게도 불가능에 가까운 그런 일.

‘그리고 이거 한 번 까부수려다 재수없이 삼도천 건너면 그만큼 수지 안 맞는 장사가 어디 있겠어.’

어차피 시도할 능력도 부족하지만, 아무튼 이수민은 그렇게 결론내리고 마음을 편히 먹었다.

던전이란 건 공략과 전투가 대전제니까 기다리다 보면 뭐가 됐든 변화가 있을 터.

“아아, 지현이 보고 싶다.”

이수민은 공터 한쪽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가만 있어봐야 할 것도 없으니까 제자와의 감동적인 해후를 위한 큰 그림이나 생각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콰아아앙-!

입구와 반대편 벽이 갑자기 와장창 터져나갔다.

이수민은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흙먼지가 가라앉고 모습을 드러낸 건,

“······어?”

스미스라고 했던가. 누가 봐도 가명으로 둘러댄 듯한 이름의 각성자였다.

시퍼래진 안색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수민은 생각했다.

‘이 사람 뭐야?’

마주 다가서며 물었다.

“저기요. 다른 방에서 온 거······, 맞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이 돌아왔다.

“보면 모릅니까. 시간 없어요. 빨리 갑시다.”

“무슨 시간이 왜 없는데요. 뭔데. 설명을 해줘야지.”

“설명이고 뭐고 나 보스 방에 있었는데 거기 디스플레이 있고, 아오. 말하기도 열받네. 이 미친 던전······. 진짜 이 새끼들 이 세상의 컨셉이 아니니까, 우리 지금 시간 없다고요.”

이수민이 이런 쪽에서 둔한 편은 아니었다.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공략된다 이 말이에요? 단계별로?”

“눈치는 빠르네. 늦게 가면 1층 사람들 다 죽을 것 같으니까 빨리 갑시다.”

스미스가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뭘 하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그냥 양손으로 문을 잡았다.

이수민이 곁에 따라붙으며 말했다.

“문 안 열리던데 어떻게-”

“그쪽은 안 되지만 나는 되지. 최종보스라니까.”

재수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고는 스미스가 힘을 주었다.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수민은 이내 경악하고 말았다.

손에 집적한 마나의 밀도가 도저히 추정할 수도 없을 정도로 고밀도로 보였다.

강호무림에서 말하는 강기공? 그조차도 넘었다. 저건 단순한 에너지라고 보기에는······.

하나 더 놀라운 건 마나의 성질이다.

체내에서 생성한 것은 아무래도 고유의 색채를 띠기 마련인데 저 마나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외부의 마나와 차이를 느낄 수 없는, 마치 세상 그 자체와 동일시되는 듯한······,

‘설마 신화경?’

그녀가 살던 강호무림에서는 저러한 경이로움을 그렇게 일컬었다.

‘도대체 어떻게?’

믿기지가 않는다.

전생과 현생을 합쳐 이수민은 신화경에 한 발이라도 디딘 고수를 딱 두 명 봤다.

정확히 말하면 전생에서만 두 명.

그녀의 사부였던 천마 백운상과 나머지 하나는······.

‘그 사이코패스 쌩양아치 새끼.’

생각하니 갑자기 열이 받아 이수민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무슨 협이 어쩌고 하는 별호도 지가 스스로 지어내서 퍼뜨린 게 틀림없을, 천하의 깡패 자식.

사부의 원수이며 이수민 개인으로서도 불구대천의 원수.

지 성격만큼은 아니지만 그 새끼가 싸움을 정말 기가 막히게 잘했다.

덕분에 칼침 한 방 제대로 놓아주겠다는 전생의 목표는 결국 못 이뤘는데.

‘그만한 고수가 또 있다고? 이런 허섭스레기 같은 세상에?’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마침내 스미스가 양손을 모두 문에 꿰었다.

그대로 내동댕이치고는 혼란 속에서 멍하니 서 있는 이수민에게 말했다.

“뭐합니까. 지하 3층 중간보스.”

이수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스미스가 요상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비웃음도 아니고,

가소롭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견하다는 건 더욱 아닌 그런 웃음.

“왜요? 이런 거 처음 겪어보나?”

“······!”

이수민의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이 하나 스쳐지나갔다.

깡패 새끼와 처음으로 만났던 날.

백만 교도들의 슬픔을 논한 그녀에게 무참히 행했던 폭거.

분한 마음에 이를 악물던 그녀에게로 날아왔던 전음 한 자락.

‘이런 거 처음 먹어보냐? 맛있지?’

그 뒤로도 뭐라고 말을 했던 것 같다.

대저 인간세상의 고통이란 네 알량한 한 몸으로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하지만 이수민, 당시의 진천군은 생각했다.

‘내가 안 먹겠다는데 지가 왜 지랄이야, 왜!’

놀랍게도 그 당시의 하무린, 하가놈의 말투와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저 스가놈의 말투가 겹쳐 들리는 것 같았다.

압도적인 무력.

재수없는 성격.

때려주고 싶은 말투.

이게 우연이라고?

그래.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수민은 이미 전생을 경험해 봤고, 다시 태어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다.

“빨리 갑시다.”

조금 비틀거리면서도 스미스가 앞서 걸었다.

그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이수민이 생각했다.

아직은 참아야 한다. 던전을 클리어하는 게 먼저다.

하지만 이 생각이 정말로 맞는다면, 그 후에는······.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고 했지.’

오랜 원한을 되갚아 줄 시간이 올 것이다.

***

힘들어 죽겠네.

아까부터 계속 그 생각뿐이다.

내가 있던 곳에서 한 번.

지하 3층에서 앞뒤로 두 번.

올라가서 또 두 번.

도합 다섯 번이나 무적신공을 운용했다.

몸이 피곤한 건 물론이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이 압도적으로 심했다.

그래도 이제 마지막 한 번이다.

입구에 양손을 가져다 대는데 정예슬이 옆에서 조잘거렸다.

“스미스 쌤. 당신은 신인 것입니까······?”

“앞으로 내 말투 가지고 뭐라고 하면 어디 한 번 봅시다.”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정예슬은 간단히 격퇴됐다.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이수민이 내 뒤통수가 뚫어져라 쏘아보는 게 느껴진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힘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게 아니면 지하 1층에 있는 헌터들을 걱정하는 건가?

만약에 그거라면, 비록 이상성욕자이긴 해도 심성이 아주 글러먹은 녀석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콰아앙!

머리통이 깨질 것 같지만 그래도 마지막 문까지 뚫어냈다.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전군, 돌격······.”

어느새 표정을 굳힌 정예슬과 나머지 헌터들이 앞을 향해 달렸다.

조금 흐릿한 시야로 해골바가지가 지팡이를 들고 불 같은 걸 뿜어내는 광경이 보인다.

다행이네. 조금 다치긴 한 것 같지만 지하 1층에 있던 다섯 명 모두 아직은 무사했다.

응급처치로 간단하게 운기를 마친 다음에 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같잖은 짓거리를 한 괴수들아. 이제 형 왔다······.

그리고 내가 한 걸음을 떼는 그 순간, 마치 빛살처럼 이수민이 쏘아져나갔다.

***

헌터 정예슬은 어안이 벙벙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생각하며 한창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한 팔 거들려는 그때였다.

온몸을 붉은빛 마나로 휘감다시피 한 이수민이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괴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나에 휘감긴 왼팔.

아무런 기술도 없이 휘둘렀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단단한 근육질의 피부에 신장이 3미터도 넘어보이는 괴수는 너무도 쉽게 머리가 터져나갔다.

이수민의 오른손 다섯 손가락에서 마나가 발출되었다.

정예슬이 장기로 삼는 마나방출과 비슷한 계통이겠지만 위력은 천지차이였다.

날갯짓을 하던 악마의 커다란 날개가 꿰뚫렸다.

이수민이 오른손을 아래로 털었다.

마나에 꿰어 있던 악마가 그대로 추락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나가 그대로 폭발했고 악마까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한 번의 공격마다 한 마리의 괴수가 죽었다.

던전 내부에 헌터들만 남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0초 남짓.

정예슬을 비롯한 헌터들은 그저 경악해서 이수민을 쳐다봤다.

이수민이 강하다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한 손에 꼽히니 마니 하는 헌터니까.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상황을 정리한 이수민이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걷는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스미스를 향해서였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이수민이 뭐라고 입을 열었다.

“그쪽한테 할 말이 있어서 좀 빨리 끝냈어요.”

스미스가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뭡니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내 말 이상하게 듣지 말고, 그냥 하라는 대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래줄 수 있어요?”

“들어는 봅시다.”

‘이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영화 같은 데서는 보통 이러다가 갑자기 고백씬이 나온다.

‘그러면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아닌데. 쌤 결혼했다고 했는데.’

궁금증이 솟아 이어질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이수민의 입에서 고백도 뭣도 아닌, 너무도 뜬금없는 말이 나왔다.

“하무린 개새끼.”

“······네?”

“‘하무린 개새끼.’ 라고 한 번만 말해줄 수 있어요?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아는데 그냥 좀 해줘요. 말한다고 죽는 거 아니잖아. 한 번만 해줄 수 있어요?”

정예슬은 생각했다.

‘아직 던전 공략 안 끝난 건가?’

국내 최고의 헌터 이수민이 밑도 끝도 없이 저런 소리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이게 던전을 클리어하는 조건일지도 모르······, 아니, 그럴 리가 있겠냐고오.’

도저히 사태파악이 안 되어서 정예슬은 그냥 스미스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과연 그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

마침내 스미스가 입을 열었다.

“······개새끼.”

‘뭐야? 진짜로 해?’

잘 들리지 않았는지 이수민이 새된 목소리로 채근했다.

“잘 못 들었어요. 다시 한 번만.”

그리고 던전이 떠나가라 스미스가 외쳤다.

“느그 천마 개새끼라고 했다! 귓구멍 먹었냐!?”

‘응? 천마가 뭐?’

생각을 더 이어갈 틈도 없이, 곧이어 어마어마한 빛의 폭발이 일었다.

정예슬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진짜 저세상 던전이네······.’

***

“하무린, 속였구나! 하무린!”

속이긴 뭘 속여.

눈동자가 시뻘개져서 이수민이 내게로 달려든다.

아니지. 이수민이 아니지.

저 새끼가 진천군이었구나.

그래. 이제야 퍼즐이 맞아 떨어진다.

풀떼기 처먹고,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딸한테 집착하고, 팔다리 제법 놀릴 줄 알고.

십성에 달한 천마신공의 내기를 온몸으로 폭발시키며 이수민의 오른손이 내 심장을 노렸다.

“죽어엇-!”

이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

넌 오늘 죽었다.

“이 치코리타 같은 새끼가 어른을 몰라보고!”

콰아아앙!

손과 손이 맞닿고, 폭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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