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다시는 무협을 무시하지 마라.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리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애 엄마가 어떻게 왔지?
지난번에 통화했을 때는 다음달은 돼야 시간이 날 것 같다고 했는데.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도 일단 말을 받았다.
“응, 나. 지현이랑 같이 있어?”
서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응. 딸이 통화 한 번 하라고 해서. 그나저나 출장? 오빠가 출장도 가?>
출장? 출장 맞지.
그리고 나는 지금 부산에 와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답했다.
이렇게 안 하면 바로 들킨단 말이다.
“응, 요즘 보직이 좀 바뀌어서. 앞으로도 가끔 있을 거야.”
<흐응······, 그래?>
저 콧소리. 그야말로 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기분이다.
그래도 겉으로는 쿨하게 답했다.
“그렇게 됐어. 그런데 어떻게 시간이 좀 났나 보네? 많이 바쁠 텐데.”
<아아, 응. 잠깐 여유가 생겨서. 마무리 좀 하고 지현이한테 연락했더니 오빠 오늘 일한다더라? 아쉽다.>
“······나도 그러네.”
<정말?>
“응.”
후우, 하는 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렸다.
안도의 한숨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은 아닐 거다.
<그러면 다행이구.>
“응, 아무튼 오늘 그러면 지현이 잘 좀 부탁해.”
<알겠어. 오빠도 일 열심히 하고, 나 혹시 내일까지 여기 있으면 밥이나 같이 먹자. 이러다 얼굴 까먹겠어.>
“······.”
내가 대답을 않고 있자 애 엄마가 장난기가 조금 서린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아, 방금 건 농담이야. 진짜 까먹는다는 건 아니구. 내가 오빠 얼굴을 왜 까먹어.>
수화기 너머로 애 엄마가 엷게 웃었다.
말투 하나와 표정, 몸짓 하나까지, 애 엄마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처음 만날 때는 마냥 사랑스러운 느낌만 들었는데.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되면······, 그래. 밥이라도 먹자.”
애 엄마 옆에서 지현이가 난리를 부리는 것 같다. 박수 소리도 들리고 온갖 추임새가 다 나왔다. ‘아빠, 일찍 와!’라고 말하는 것도 들렸다.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나 이제 들어가봐야 돼서, 끊을게.”
<응. 아, 오빠.>
“으응?”
<······보고 싶다.>
대답할 틈도 없이 전화가 뚝 끊겼다.
다시 걸어볼까 하다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
“이봐요, 표정이 안 좋네요?”
눈앞에 손바닥이 왔다갔다 거리길래 뭔가 싶어서 보니 이수민이었다.
“별 일 아닙니다.”
“그래도 이번엔 한 팀이고, 그쪽 실력도 궁금하니까 멍하게 있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는데요.”
이건 배려인가, 시비인가.
아무래도 후자 같다.
“근데 진짜 혼혈 맞아요?”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거 보니까 아닌가봐?”
옆에 들러붙어서는 이수민이 도발하듯이 재잘거렸다.
지현이 앞에서는 그렇게 생글대고,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때는 말 걸지 말라는 분위기를 온몸으로 내고 다니고, 또 나한테는 왜 이러냐.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
그래도 왜 이러는지 이유는 대충 알겠다. 정확하게 말하면 투기였다. 나랑 한 판 붙어보고 싶다는 거다.
당신 마음은 알겠는데 지금은 좀 참지 그래.
원하는 대로 하면 우리 인원 다시 뽑아야 될 텐데.
나도 마주 물었다.
“나도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요?”
“이 일, 그러니까 헌터 일 하는 목적이나 목표 같은 게 있습니까? 아니면 살면서 이루고 싶은 거라던지.”
뭔가 있는 게 틀림없는, 수상한 여자.
게다가 우리 지현이에게 집착한다.
대놓고 ‘당신 정체가 뭐야?’라고 물을 순 없으니 에둘러 한 질문이었다.
한데 이수민은 의외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목표? 특별히 그런 건 없고······, 나는 그냥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고 싶어요. 지금도 내 생각에는 그렇긴 한데 지금보다도 훨씬 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지켜줄 수 있을 만큼. 전에는 그렇지가 못했어서······.”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튕기며, 하지만 표정은 진지하게 이수민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두 번째 질문까지 답하면, 이번에는 그 소중한 사람을 지켜주고 싶은 게 내가 살아가면서 이루고 싶은 건데요? 둘이 같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 더 좋고요.”
“······그렇습니까.”
어처구니가 없구만.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망언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스토커 새끼가 어디서 아련한 척 포장질이야.
보아하니 그 소중한 사람이 지현이 같은데, 그건 내가 해도 충분하다. 당신 자리는 없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곧 진입한다는데 각자 자리 가죠.”
내 위치로 돌아오니 정예슬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뭡니까. 눈을 왜 그렇게 떠요.”
“진짜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차별대우 오진······, 읍읍. 아, 언니 왜 그래! 이 사람 우리 앞에서만 막 이상한 컨셉 잡고 그러잖아. 다른 사람들한테는 세상 쿨하고 시크한 척은 혼자 다······, 읍읍!”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최민호와 김유진이 알아서 처리해줬다.
근데 어째 입 막는 속도가 좀 느린 것 같다.
꼭 정예슬이 할 말을 거의 다 끝내고 난 뒤에야 움직이는 듯한······.
“됐으니까 장비 챙기고 준비하세요.”
그리고 마침내 열 명의 헌터가 던전에 입장해, 대기실을 지나 지하로 돌입했다.
***
입장하자마자 느꼈다.
뭔가 이상하다.
훅, 하고 시야가 꺼졌다.
기감을 잡으려고 해도 읽히지가 않았다.
다시 불이 켜졌다.
“어?”
주위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다. 방금 전까지 있던, 나를 제외한 아홉 명의 헌터들 모두 사라졌다.
나 혼자만 이곳에 있다.
반경 수백 미터는 될 듯한 넓은 공간에.
내가 있는 쪽은 계단이 높게 쌓여서 마치 왕이나 황제가 내려다보는 듯한 형태였다.
출입구로 보이는 커다란 문은 저 멀리, 정반대편.
그리고 나는 계단의 끝, 가장 높은 곳의 옥좌에 앉아 있었다.
“이게 뭐야.”
컨셉 스테이지 중에 이런 것도 있었나?
우선 옥좌에서 일어서서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구석 쪽에는 석벽 같은 게 세워져 있었다.
그 아래로 무슨 글자 같은 게······, H, B1, B2, B3, B4?
하나씩 눌러봤다.
가장 먼저 H.
석벽의 왼쪽 상단이 빛났다.
빔프로젝트나 홀로그램 같은 것처럼.
곧 화면이 비친다.
우리가 처음 들어왔던 대기실이 보였다.
그 다음은 B1.
응? 뭐야.
쟤네는 왜 저기 있어.
내가 있는 이곳보다는 훨씬 좁아보이지만 그래도 꽤나 넓은 공터에 대여섯 명이 서성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김유진과 최민호, 그리고 나머지 A랭크 헌터 셋까지 총 다섯 명.
이번에 눌러본 건 B2.
여기는 세 명이다.
정예슬과 S랭크 헌터인 차지유, 정상우.
이제 B3.
예상대로 이수민 혼자 멀뚱하니 팔짱을 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B4를 눌렀다.
가장 큰 화면이었고, 눈에 익은 곳이다.
구구절절 설명할 것도 없는, 내가 있는 이 장소.
대기실과 지하 1층부터 4층까지의 던전.
진입한 열 명의 헌터가 각각 떨어져서 배치되어 있다.
느낌이 온다, 느낌이 와.
시발. 시발, 이건······.
곧 붉은빛이 번쩍이며 경보음 같은 게 들렸다.
아무도 없던 대기실에 갑자기 무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오우거를 닮은 근육질의 괴수.
등에 검은 날개가 달린, 악마를 형상화한 것 같은 괴수.
해골 하나는 지팡이를 들고 멋들어진 로브까지 입고 있다.
도합해서 스무 마리도 넘는 괴수들이 H라고 쓰여져 있는 대기실에 나타났고, 대열을 갖춰 전진하기 시작했다.
지하 1층으로 가는 길을 향해.
이거 미치겠네.
컨셉 스테이지, 컨셉 스테이지 말만 들었지 이런 극한의 컨셉질을 할 줄이야.
그러니까 지금 이 새끼들이······.
“역할을 바꿔놨네?”
나를 포함한 열 명의 헌터들이 공략되는 괴수 역할.
저 새끼들이 던전의 침입자다.
난이도도 자기들이 알아서 측정해서 배치해두고 나름대로 꼼꼼히 신경 쓴 것 같은데······, 그래서 더 헛웃음이 나왔다.
더 두고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궁신탄영의 수법으로 땅을 박차고 곧장 반대편의 문으로 다가갔다.
밀었다.
안 열린다.
내공을 끌어올려서 밀어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그건가. 마왕은 처음부터 용사와 맞서지는 않는다는 그 클리셰.
괴수 새끼들이 천천히 걸어온다고 해도 애들 있는 지하 1층까지는 5분도 안 걸린다.
빌어처먹을. 내가 지금 시간이 없다고.
어쩔 수가 없네.
고작 A랭크에서 이런 뻘짓을 할 줄은 몰랐는데······.
백년내 무공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협검무제 하무린에게는 또다른 별호가 몇 가지 존재한다.
그가 강호무림을 종횡하며 벌인 행적이 너무도 놀라워 고작 하나의 별호로는 도무지 그 경이로움을 다 나타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만상무신.
세상의 모든 무를 통달한 무공의 신이라는 뜻이다.
······라고 객잔에서 이야기 팔아서 술 얻어먹는 노인네들을 몇 번 보긴 했는데, 굳이 딱 하나를 고르라면 나한테도 전공이 있긴 하다.
우리 사부가 말하기를 12성 넘기면 그대로 저세상 가니까 조심해서 쓰라던 내공심법.
이름도 안 알려줘서 적당히 무적신공이라고 붙여뒀던 그것.
그러고 보니 사부가 그 뒤에 말을 덧붙였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일백 년을 고련해도 내 자질로는 12성까지 못 익힐 테니까 그냥 마음껏 쓰라고 했던가. 망할 영감탱이가 꼭 말을 해도.
지나고 보니 맞는 말이어서 더 열이 받는다.
백 년까지 수련한 건 아니지만 아직 11성이니까.
아무튼 오늘 쓴다. 무적신공.
저번에 게이트 강제로 닫을 때 이후로 처음이구만.
구결을 따라 내공을 휘돌린다.
전신의 세맥과 팔과 다리, 정수리의 백회에 이르기까지, 마치 온몸이 내공의 순환로 그 자체가 된 것처럼.
순수하게 내공의 결집체가 된 내 육신이 바깥과 맞닿았다.
문득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온 세상이 속삭인다.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어. 이걸 원하지 않아?’ 라고.
신을 엿보는 걸 넘어서, 신 그 자체가 되어서 우리와 함께 하자고 유혹하듯이.
시발, 좆까세요.
우리 딸이 여기 있는데 내가 가긴 어딜 가.
그딴 건 필요없고 나는 당장 이 문 좀 뜯어내야 되겠다.
이제 내 손에서 빛나는 건 단순한 내공이나 마나가 아니다.
세상과 맞닿아, 어쩌면 어떠한 현상에까지 개입할 수 있는, 마치 법칙 같은 힘이었다.
그대로 오른손을 찔러넣었다.
비가 와서 단단해진 흙바닥을 힘겹게 파내듯이 손이 움푹 들어갔다.
머리 어지러워 죽겠네. 빨리 끝내야겠다.
왼손도 마찬가지로 집어넣었다.
그대로 벌렸다.
펑-!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뭔지는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고, 일단 열렸다.
이곳과는 단절돼 있던 외부의 공간이 보였다.
위로 올라가는 어두컴컴한 복도다.
그 너머에서 다시 문을 하나 더 박살내면 이수민이 있는 B3층이겠지.
거친 동작으로 손에 꿴 문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계단을 올랐다.
어디서 건방진 자식들이 말이야.
강호무림을 대표해 내가 똑똑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다시는 무협을 무시하지 마라, 현대 판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