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전화찬스!
구질구질함의 극치를 달리는 메시지 전문을 보고 있자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그리고 이것만은 확실하다.
이 새끼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우리 딸의 귀여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만 미쳐버리고 만 것인가······.
이수민 개인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글쎄, 구제하기는 이미 틀린 것 같다.
왜 있잖은가. 변이를 끝마쳐서 인간으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그런 거.
나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쓰레기봉투를 준비해야겠어. 아주 커다란 걸로.”
“아빠? 갑자기 봉투는 왜?”
“아, 분리수거 해야 될 게 갑자기 생각나서.”
괜찮다. 우리 딸은 몰라도 그만이고, 알 필요도 없는 그런 일이니까.
지현이는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들을 권리가 있다.
저런 이상성욕(추정)의 화신 같은 놈이 더 접근하게 둘 순 없지.
예의범절과 에티켓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딸은 혹시 던전 들어가고 싶어?”
그래도 우선은 지현이 의견을 듣는 것도 중요하니 물어는 봤다.
끝까지 설득할 준비 역시 마친 상태지만.
내 질문에 지현이가 섣불리 대답을 못하고 고민에 잠겼다.
으음, 흠, 이런저런 추임새를 넣다가 입을 뗐다.
“A랭크에 컨셉 스테이지면 저번만큼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해. 재밌을 것 같아서 들어가 보고 싶기도 하구. 근데 그래도 울 아빠 걱정시키는 거잖아.”
지현이가 해사하게 웃었다.
“나 괜찮아. 그냥 안 들어갈래요.”
신이시여······, 어찌 이 천사 같은 아이를 애 엄마와 저 같은 사람들 품에 보내셨습니까.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사랑스러움이었다.
감격스러운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지현이 머리에다 손을 올렸다.
슥슥 쓸어내리니 지현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히히, 뭐야? 요즘 막 ‘제가 어찌 신교의 천마께 감히.’ 이러면서 안 해주더니.”
지현이가 툴툴거리면서 자기도 마주 머리를 움직였다.
어릴 때부터 나나 애엄마가 머리 쓸어주는 걸 좋아했지.
스윽스윽 하는 감촉이 좋다나 뭐라나.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던 탓인지 살짝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러면 수민 언니한테 이렇게 보내자.”
“뭐라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싶어요.’ 이러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근데 언니 실망하면 어쩌지······?”
“다음에 이거보다 훨씬 덜 위험한 던전 있으면 그때 가자고, 그러면 되지. 아빠도 나중에 말해놓을게.”
“응. 알겠어! 그러면 아빠 나 잔다?”
지현이를 자기 방에 돌려보내고 생각했다.
이번 던전은 들어가야겠다고.
이것저것 해야 할 게 많아보였다.
***
이수민은 돌아온 답장을 실눈을 뜨고 조심스레 열었다.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까였다. 마치 축구공처럼 까였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격렬한 후회와 한탄에 몸을 맡긴 채 침대를 주먹으로 쾅쾅 쳤다.
푸욱!
“아······.”
이수민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생각했다.
‘매트리스 새로 사야겠네······.’
***
주차장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이쯤에 김유진와 최민호, 정예슬까지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걸어오는 나를 발견한 모양이다.
정예슬이 크게 손을 들어 흔들고, 김유진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최민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볼을 손으로 감싸며 그 뒤를 따랐다.
김유진이 말했다.
“안 늦게 오셨네요.”
“쌤, 근데 진짜 저희가 들어갈 수 있어요? 이거 잘못하면 S랭크만큼 빡셀지도 모르는데?”
“······오셨습니까.”
앞의 둘은 내버려두고 최민호에게 물었다.
“미스터 최.”
“네?”
“치과는 갔다 왔습니까. 유어 투쓰. 임플란트.”
최민호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뇨. 아직 못 갔습니다. 오늘이 예약해둔 날이긴 한데······, 만약에 못 뽑히면 내일이나 가야죠······.”
다소의 죄책감을 느낀다.
몇 번 지내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친구인 것 같은데.
첫 만남 때는 미안한 일을 해버렸다.
무림맹 일타 강사로 스파르타식 무공교습을 했던 그때의 열정이 끓어올라서 그만.
“임플란트 비용은 내게 청구하십시오. 어폴로자이즈. 사과의 표시입니다. 유노와라민?”
“언니, 진짜 컨셉도 저 정도면 민호 오빠랑 같이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정예슬이 김유진에게 내 흉을 보았다. 주먹을 들었다.
“나는 보았다. 종합병원. 유도 함께 가는 미래를.”
“저요? 저는 또 왜······.”
“유의 발걸음. 힘겨웠다.”
“히잉, 무섭게 왜 그래요 진짜.”
정예슬이 놀라서 김유진 뒤로 숨었다.
“아무튼 들어갑시다. 김유진 씨, 세팅은 다 됐습니까?”
“아, 네. 미리 어르신들한테 말씀도 드렸고요. 되게 기대하고 계세요. 직접 뵙는 건 처음이니까.”
처음부터 그랬다,
단순히 가르치는 헌터 애들이랑 접촉한 게 아니라, 윗선에 나이 지긋한 높으신 분들이 골라서 보낸 게 얘네들이었으니까.
그들에게 나는 서른 살 정도로 추정되는 혼혈의 각성자.
S랭크의 괴수를 단번에 때려잡은 어둠의 수호자.
국내 유수의 후기지수들······, 이 아니라 싹수 있는 젊은 헌터들의 스승.
아무튼 그랬다.
그리고 지금 이 장소는 ‘던전 입찰’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번에 발생한 A랭크 컨셉 스테이지 던전에 투입될 헌터들을 선정하는 곳이었다.
내 의사는 미리 알려뒀으니, 아마 큰일이 없으면 내 생각대로 되겠지.
“다들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이번에 발생한 던전은 A랭크입니다. 마나 파장으로 볼 때 중급 이상이며 입장 가능한 최대 인원은 열 명. 그리고 오늘 차지유 헌터와 정상우 헌터가 확인을 마쳤습니다. 불규칙한 파장으로 미루어 볼 때, ‘컨셉 스테이지’ 던전임이 거의 확실시됩니다.”
빙 둘러모인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각자 깊이 생각에 잠겼다.
컨셉 스테이지라는 게 설명하자면 그거다.
일반 던전이 그냥 쭉 뻗은 트랙을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경기라고 치자.
그럼 컨셉 스테이지 던전은 장애물 달리기 같은 거다.
그것도 매번 함정이나 장애물이 바뀌면서 난이도도 높은.
당연히 동일한 랭크의 던전보다는 무조건 어렵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한 단계 위 던전에 준하는 난이도를 가질 수도 있다.
누군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정확히 어떤 유형의 던전인지는 밝혀졌습니까?”
“아뇨. 아시다시피 첫 입장은 인원이 모두 충족돼야 해서 거기까지는······.”
다시 말해 까봐야 안다는 소리다.
먼저 탐색한답시고 대충 인원 채워서 들어갔다간 인원 교대도 제대로 못해보고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가 있다.
처음부터 편성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인원으로 들어가서 확인해 보는 게 그나마 낫다는 결론을 몇 번이나 개고생을 하고서야 얻어냈지.
“A랭크 던전 기준으로, 최대한 보수적으로 인원을 편성해 초동 인원이 투입됩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대기하고 있던 S랭크 헌터분들이 교대로 투입될 계획입니다.”
여기까지는 기본 매뉴얼이다. 정론 중의 정론.
본론은 이 다음이다.
“그러면 인원 편성은 어떻게······.”
“S랭크를 둘에서 셋, 나머지는 A랭크 헌터들로 투입합니다.”
그때 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 구석에서 고고한 늑대처럼 다리를 꼬고 지켜보던 이수민이었다.
“저 들어갈게요.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비록 우리 딸에게 검은 마수를 뻗치려 하는 변태성욕자이지만 이수민은 국내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탑클래스 헌터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샌드백들이 후기지수 정도 된다면 쟤는 거 뭐냐, 이미 나이대를 초월해 장강의 앞물결을 저만치 밀어내는······, 대충 그런 수준이겠네.
“어차피 이번에 저희 회사 쿼터도 있고 사장님도 좋을 대로 하라고 하셨어요.”
S랭크 헌터라는 게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니다 보니까 헌터 업계에서 대기업 포지션 정도 되는 회사들은 사이좋게 두어 명씩 나눠서 데리고 있다.
그리고 이수민은 국내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헌터 에이전시의 간판급 헌터다.
앞에서 회의를 진행하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수민 헌터. 그리고 미리 내정됐던 차지유 헌터와 정상우 헌터까지 S랭크 헌터분들 편성은 결론짓겠습니다. 이의 있으신 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S랭크 헌터를 누구를 보낼 거냐 하는 정도는 회의 전에 이미 서로 합의를 보고 들어오니까. 던전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닌데 필요 이상으로 투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문제는 나머지 A랭크 헌터들이다.
지금부터는 눈치 싸움이다.
남은 일곱 자리.
이 자리에 모인 A랭크 헌터들만 서른 명.
듣기로는 도떼기시장처럼 서로 어필하면서 거하게 시끄러워진다고 하는데······,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명은 빼주시죠.”
일제히 시선이 내게 쏠렸다.
단상에 선 남자가 말했다.
“네. 그······, 스미스 헌터?”
역용을 펼친 게 다행이다. 내 얼굴이 붉어진 걸 아무도 모를 테니.
호칭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김유진과 상의했었다. 한국 이름을 쓰긴 좀 그렇고 흔한 영어식 이름으로 해두면 되겠다 싶었는데······, 막상 불리고 보니 압도적으로 부끄럽다.
차마 번역기 말투는 못 쓰겠어서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말했다.
“미리 의사를 전달해 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와 최민호, 정예슬, 김유진 헌터 네 명으로 들어가고 싶군요.”
여전히 모두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
저 사람들 입장에서야 내 이야기는 도시전설 같은 걸 테니.
자리가 자리인지라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 안 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최민호, 정예슬, 김유진 헌터는 재능이 있습니다. 보고를 이미 받으셨겠지만 훈련에 따른 전투기술 습득속도 역시 빠릅니다.”
모여 있는 헌터들과 마주 보고 앉은, 의장격인 어르신들 몇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맞아요, 보고는 이미 받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단기간에 실전에서 능률이 많이 올라갔다고요.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확신을 갖기 힘든 것이 사실이니 그 점도 감안을 해줬으면 싶어요.”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정체도 안 밝힌다. 그냥 애들 지도만 해준단다.
그리고 대뜸 던전에도 들어가겠단다.
신원 확인도 안 된 사람인데 나 같으면 ‘당신을 뭘 믿고?’ 라는 말이 나올 법도 했다.
목소리에 내공을 조금 실어 말했다.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그저 던전과 게이트라는 게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할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수상한 사람일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손에 내공을 모았다.
푸르고, 다시 푸른 광채가 넓은 회의장 전체를 태울 듯이 밝혔다.
“나는 그런 속임수 따위가 필요없는 사람입니다.”
“으음······.”
저 어르신들이 나이가 좀 많긴 해도 머리가 굳어버린 사람들은 아니다.
이게 솔직히 사명감 없이는 못해먹는 업계니까.
곧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겠지 싶을 때쯤, 어디선가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저 사람이 뭐하는 사람이든, 어떻게 허튼 수작을 부리든 그런 거 아무 상관없어요.”
그리고 손을 들었다.
나와 같은 동작이었고, 광채가 붉었다.
“저 있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들이세요.”
도발적인 미소를 머금고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시선을 향한 건 바로 이수민이었다.
이 새끼······. 마나 집적 수준을 보니까 제법 하긴 하는 모양인데.
던전 들어가서 여유 좀 있을 때 손발로 대화나 좀 해보자고.
결국 결정이 났다.
S랭크 헌터는 이수민, 차지유, 정상우.
나와 최민호, 정예슬, 김유진. 그리고 A랭크 헌터 셋까지 총원 열 명.
회의는 오후가 되기 전에 끝났다.
투입예정 시간은 오후 한 시.
조금 시간이 남았길래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들어가서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딸, 아빠 부산 도착했어.’
주말 출장이라고 말해놓긴 했는데,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교대로 빠져야 했다.
A랭크 컨셉 스테이지는 잘못 걸리면 일주일은 잡아야 한다지만 그동안 던전 안에 계속 있는 건 도저히 무리다.
그나마 오늘이 토요일이라 살았지.
쓸 수 있는 휴가는 벌써 예전에 다 썼다.
조만간에 김유진이나, 아니면 그 윗선 한두 명이랑 접촉해서라도 시간적인 여유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곧 지현이에게서 답장이 왔다.
‘아빠, 지금 잠깐 전화돼?’
뭐지?
우리 딸이 아빠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러나?
뿌듯한 마음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통화음이 울리고 지현이가 전화를 받았다.
<아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굉장히 들뜬 목소리였다.
웃으면서 대답했다.
“응, 아빠. 우리 딸 왜? 아빠 보고 싶어서?”
하지만 대답은 않고 지현이가 대뜸 말했다.
<전화찬스!>
“응?”
전화찬스가 뭐야?
그리고 내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잠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시원스럽게 귓가에 닿는, 서늘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렀다.
<······오빠?>
오······, 뭐요?
갑자기 닥쳐온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도 머릿속 한구석이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다.
바로 애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