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17화 (17/130)

17. 인간이 가장 센치해지는 시간, 새벽 1시 17분.

내 이름은 유수현. 34세.

눈에 넣으면 당연히 아프긴 하겠지만 그 고통조차 기꺼이 참아낼 만큼 사랑스러운 중학생 딸이 하나 있고, 흔히 마나 기상청이라고 불리는 기관에 근무 중이다.

최근에는 부업으로 젊은 헌터들의 지도를 시작했다.

현생의 모토는 ‘할 말은 한다.’

전생의 좌우명은 ‘팰 놈은 팬다.’

그래서 현재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

“언니 지현이가 링크 보내준 거 읽어봤다?”

“정말요? 그러면 이런 거 물어보면 좀 창피하긴 한데요. 그거 어땠-”

“엄청 재밌던데? 등장인물들도 완전 멋있구, 필력도 완전 최고! 중학생이 썼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걸? 언니 거기 사이트 가입해서 첫화부터 최신화까지 추천이랑 댓글이랑 다 눌렀어.”

“그러면 언니 닉네임이······.”

“응. ‘채식의왕자베지터!’ 추천글도 쓰려구 했는데 가입하자마자 바로 쓰면 괜히 글이 욕먹는다더라구.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참았어.”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쓸게요!”

“응. 그나저나 지현이 전투씬 묘사가 진짜, 언니 읽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

이수민이 손짓발짓을 해가며 우리 딸이 쓴 소설을 계속 극찬한다.

······이 여자 리액션이 좀 이상한데?

우리 딸 소설이 그 정도는 아니지.

그리고 전투씬은 거의 다 내가 썼다.

그나저나 우리 딸이랑 언제부터 저렇게 가까워진 거냐.

뜬금없이 명함 주고 갈 때부터 이상하다 싶더라니.

병문안 왔던 것도 듣긴 했지만 사적으로 약속 잡을 정도로 친해진 건 몰랐다.

이상해.

의심스럽다.

무수한 호감의 메시지를 잘근잘근 씹고 다니게 생긴 여자가 지금은 온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우리 지현이가 그만큼 귀엽고 사랑스럽긴 하지만 저 반응은 정상이 아니다.

나조차 견뎌내지 못한 우리 딸의 글을 극찬하는 것만 봐도 저 새끼의 비정상성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감시하려고 따라오긴 했는데 이제는 아주 길거리에 멈춰서서 우리 딸 소설에 대한 격정적인 토론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밥은 언제 먹을 거냐, 밥은.

“이수민 씨?”

“네?”

“혹시 식당 미리 예약해 두신 건가요?”

“내 정신 좀 봐. 예약은 해뒀어요. 제가 잘 가는 곳 있거든요. 저기 신호등 건너면 금방이에요.”

그러면서 지현이에게 말을 붙였다.

“글 이야기는 음식 먹으면서 제대로 하자? 언니는 특히 그 주인공의 스승 캐릭터가 엄청 마음에 들더라.”

진천군 그놈이 멋있다니. 재주도 용하네. 나오는 말마다 내 점수를 까먹고 있다.

김유진과는 정반대의 행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데려간 레스토랑은 꽤 근사해 보이긴 했다.

“지현이는 어떤 거 먹을래?”

“저는 스테이크요!”

“고기? 그래, 응. 지현이가 좋아하는 거 다 시켜. 지현이 아버님은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저도 지현이랑 같은 걸로 하겠습니다.”

방금 저 여자 눈에서 시퍼런 빛이 나온 것 같은데. 아마 내 착각이겠지.

그리고 이수민이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했다.

“이거 두 개 주시고요. 미디움 웰던이요. 그리고 저는 샐러드 파스타로 주세요.”

음식이 나오고도 어딘가 이상했다.

우리 딸한테 풀떼기를 권하고 싶은 눈치였다.

포크에 샐러드를 찍은 손이 지현이 쪽으로 움찔거린단 말이지.

그리고 자꾸 우리 딸 신상명세를 캐물었다.

“그럼 지현이는 꿈이 뭐야?”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지금 쓰고 있는 거 웹소설 작가도 해 보고 싶고 헌터 하는 것도 보람 있을 것 같아요.”

“응. 지현이 하고 싶은 거 다해!”

저 맹목적인 열정이 몹시 수상했다.

나한테도 일단 깍듯하긴 한데······.

“아빠, 언니.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지현이가 자리를 떠나자 묘한 적막이 감돌았다.

이 어색한 공기.

셋이 있을 때만 대화하고 둘만 남으면 대화가 없어지는 친구 사이.

혹은 서로가 서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소개팅 자리와도 같았다. 그런 소개팅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아무튼.

십 초 정도 침묵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이수민이 말을 걸었다.

“좋으시겠어요. 저렇게 착한 딸이 있으셔서.”

“네. 해준 것도 별로 없는데 잘 자라주고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지현이가 커서 헌터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저도 도울 수 있는 건 돕고 싶은데. 제가 다니는 회사는 재능 있는 친구들 견습으로 가계약도 하거든요. 제가 꼭 추천장이라도 써주고 싶어요.”

왜 당신이 우리 딸의 장래에 대해 열정적으로 논하는 거냐.

아주 인생설계까지 다 해줄 기세였다.

“장래 문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려고는 하는데, 아무튼 우리 딸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하네요.”

“하기야 그 말씀이 맞아요. 다른 진로도 썩히긴 아깝잖아요. 소설만 해도 놀랐거든요. 전개도 그렇고 특히 전투하는 장면이 갑자기 확 좋아져서요.”

오호라.

이건 악수惡手로구만, 헌터 녀석.

마침 지현이도 없고 하니 약간의 가르침을 내려줄 수 있겠다.

“갑자기요?”

“네, 네. 정말로 이런 게 재능인가 싶더라고요.”

“혹시 몇 화부터 그렇게 느끼셨어요?”

“15화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 전에도 재밌었지만 확 세련되게 변했다고 해야 하나.”

걸려들었다.

이미 무대는 마련되었다.

“사실은 거기부터 제가 감수봐주고, 아무튼 저랑 같이 쓰고 있습니다.”

“······!”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건가.

이수민의 포크에 돌돌 말려 있던 파스타 한 가닥이 힘없이 떨어져내렸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우아한 손길로 나이프를 움직였다.

고기 맛이 좋았다.

이수민이 떠듬거리며 애써 수습을 했다.

“아버님이 도움을, 아, 그 전에도 당연히 좋았긴 한데······. 그러면 20화의 그 장면이랑 25화에 거기도······?”

“아마 맞을 겁니다.”

“······.”

우물쭈물하던 이수민이 마침내 패배선언처럼 말했다.

“부녀가 참 사이가 좋으신 것 같아요······.”

“네.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기는 한데 알아주시니 제가 감사합니다.”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내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우리 딸한테 당신 같은 언니는 필요없다 이거야.

이수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갈 곳 잃은 눈동자가 헤매다 테이블에 놓인 접시로 향했다.

“집에서 요리도 아버님이 다 하신다고······. 지현이가 혹시 채소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하나요?”

“네. 애가 어릴 땐 안 그랬는데 요즘은 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집에서도 항상 고기반찬만 찾네요. 편식이 좀 심해진 건 걱정입니다. 하하.”

“지현이가 먼저······. 아, 네······.”

지현이가 고기 입에 넣을 때마다 미묘하게 표정이 흐트러지는 것 같더라니.

왜 우리 딸 식습관에 시무룩해 하는지 모르겠는데, 울상인 얼굴을 보니 묘하게 동정심이 들었다. 비록 부드러운 고기와 함께 곧 녹는 듯이 사라져버린 동정심이긴 했지만.

그리고 다시 테이블이 조용해질 때쯤 지현이가 돌아왔다.

“응? 둘 다 왜 안 먹고 있었어요?”

아빠가 방금 작은 승리를 하나 거둔 것 같은데 우리 딸이 굳이 알 필요는 없겠네.

내 선에서 충분히 커트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다.

이수민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현이는 좋겠다. 이렇게 좋은 아버지도 있구.”

“히히, 우리 아빠가 좀 그렇긴 해요.”

티없는 미소가 이수민을 한 번 더 격침시켰다.

대체 나한테 왜 경쟁의식을 느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이쯤에서 사태를 중재하며 대화의 주도권을 쥐려고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우우웅!

강렬한 진동이 이수민과 나, 지현이의 휴대전화에서 동시에 울렸다.

각성자 전용 앱의 비상알림이었다.

휴대전화를 켜보니 알림의 내용은 짤막했다.

A랭크 던전 서울 근교 출현. 그리고 ‘컨셉 스테이지’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어깨가 축 처져 있던 이수민이 말했다.

“너무 미안한데 언니 지금 급하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아버님, 죄송해서 어쩌죠?”

“아뇨. 괜찮습니다. 알림 온 것 때문이죠?”

“네. S랭크 헌터는 이 경보 오면 일단 소집의무가 있어서.”

“응, 괜찮아요.”

“지현아. 미안해. 천천히 먹고 가고, 언니가 또 연락할게.”

아쉬운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이수민은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레스토랑을 나섰다.

그래도 공과 사를 구분할 줄은 아는가.

나도 머리가 좀 복잡했다.

A랭크에 컨셉 스테이지면 평범한 A랭크랑은 차원이 다르니까.

조금 빠르긴 해도 예행연습 삼아 가르치고 있는 애들이랑 들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뭐, 이건 지금 당장 고민해봐야 별 수 없는 일이고 우리 딸과 오붓하게 식사나 마저 하기로 했다.

“그런데 딸.”

“왜?”

“저 사람이랑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되게 친해 보이던데.”

“응. 수민 언니가 맨날 톡하는데? 그리고 나도 저 언니 엄청 마음에 들어. 멋있고, 성격도 완전 좋고. 꼭 친언니 있는 것 같아.”

“······그래?”

수상해. 수상하다.

첫 만남부터 명백하게 우리 딸을 노리고 한 접근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육신통보다도 강렬한 내 육감이 말해주고 있다. 느낌이 안 좋다.

뭔가 있는 게 분명한데 그게 대체 뭘까······.

부드럽고 소화 잘 되는 고기를 씹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

이수민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육체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정신이 피로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이번에 등장한 A랭크 던전은 ‘컨셉 스테이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러면 공략하는 데 하루이틀로 안 끝날 수도 있다.

일반적인 던전이 동네 뒷산 오르는 수준이라면 컨셉 스테이지인 A랭크 던전은, 히말라야 정도는 아니라도 한라산 정도는 될 거다.

‘만약에 들어가면 그동안은 지현이랑도 제대로 연락 못하겠네······.’

피로감이 드는 가장 큰 이유였다.

게다가 오늘 있었던 일.

현생에서의 경력을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제자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과시하고 싶었는데 무참히 져버리고 말았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드러누운 이수민은 양손에 조각상을 하나씩 들고 만지작거렸다.

하나는 전생의 자신을 조각한 피규어.

다른 하나는 이번에 새로 수작업으로 도색까지 마무리한 유지현의 조각상.

“내가, 너의 사부란다.”

“사부니임-! 흑흑,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이제는 떨어지지 말자. 이 사부랑 또 같이 살래?”

“네에, 좋아요! 그런 아빠가 있는 집구석은 예전부터 나와버리고 싶었어요!”

귀여운 하이톤과 위엄 넘치는 음성을 번갈아 연기하던 이수민이 조용히 피규어를 내려놓았다.

심한 자괴감에 휩싸여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내가 심마에 들었나.’

제자가 보고 싶다. 하지만 빠르면 내일, 늦으면 이틀 안에는 던전에 들어갈 확률이 높았다.

이수민의 정신이 점점 궁지에 몰렸다.

유지현을 꽤 오래 볼 수 없다는 사실.

오늘 식사자리에서 현생의 제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버지 유수현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고 만 충격.

게다가 정체를 털어놓는 것도 갑자기 겁이 났다.

전생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났다.

분명 큰일이 벌어졌겠지.

아직 어렸던 제자가 감당하기는 버거웠을 일이.

그 후로 어떻게 됐을까.

제자는 무사히 천수를 누릴 수 있었을까.

전생을 자각한 이후 이수민은 이러한 부채의식을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지금까지는 제자를 만났다는 기쁨에 애써 의식 한구석으로 밀어두고 있었지만,

혹시나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면?

그걸 확인하는 일이 두려웠고, 겨우 하는 거라곤 이런 부끄러운 짓이다.

이수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 번 부정적인 생각이 드니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차라리 행동하는 게 낫다.

‘뭐라도 해야 해.’

때마침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인간이 가장 감성적으로 변한다는 새벽 1시 17분.

심마에 빠져 자폭한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채 충동에 몸을 맡긴 이수민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자니?’

***

“아빠!”

슬슬 잠에 들려고 하는데 지현이가 방문을 두드렸다.

침대를 빠져나와 문을 열었다.

“우리 딸, 왜 그래? 악몽 꿨어?”

“아니, 아니이! 이거 봐, 이거!”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지현이가 내민 건 휴대전화였다. 메신저 앱이 켜져 있고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

발신인은 ‘수민 언니’

첫 번째 메시지는 ‘자니’였다.

여기부터 벌써 느낌이 안 좋았다.

두 번째 메시지는 ‘갑자기 이런 말해서 정말 놀라겠지만-’ 으로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조금 더 강해졌다.

게다가 두 번째 메시지는 내용이 너무 길어서 전체보기를 눌러야 했다.

많이도 적었네.

슥슥 넘겨봤다. 응?

나도 모르게 한 마디 말이 새어나왔다.

“······이게 뭐야.”

“언니가 나도 던전 들어갈 수 있다는데?”

‘지현이만 괜찮으면 언니랑 같이 던전 들어갈래?’

‘당연히 거절해도 괜찮은데.’

‘언니가 우리 지현이가 동생 같아서.’

‘언니 믿지?’

‘손끝 하나 안 다치게 해줄게.’

이게 뭐야.

멘트가 이상한 건 둘째 치고.

하는 말이 완전히 모순이잖아.

논리가 이상하다.

동생 같은 애를 왜 A랭크 던전에 데리고 들어가.

그러면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고 생각이 있다는 뜻일 텐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게다가 이 새끼······.

이걸 카톡으로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