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내 현생의 아버지와 전생의 스승이 완전 수라장.
6월 17일. 맑다. 샌드백들이 훈련방법에 불만을 토로하였다. 소란을 일으킨 자들을 추려 각각 곤장 열 대씩을 때렸다. 지도를 마치고 화살 열 순을 쏘았다.
······ 같은 느낌으로 요즘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원활하다는 건 아니다.
무공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상승검법을 주입식으로 때려박는다고 그게 머리에 들어오기나 하겠어? 뜬구름 잡는 소리로나 들리겠지.
그런 것보다는 실전에서 어떻게 하면 내 칼 잘 쓰고 남의 칼 잘 피하는 지 요령 가르쳐주는 게 최고다. 단기속성 과정이라면 특히 그렇다.
그리고 강호무림의 무공 같은 걸 함부로 전수했다가 나중에 우리 딸이 알아보면 어떻게 해.
팔짱을 끼고 샌드백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한 사람씩 지적을 했다.
“유, 그리고 거기 유. 그래가지고 어디 날아오는 파리 한 마리나 베겠습니까. 팔 각도 더 좁히세요.”
“······날아오는 파리 베는 거 엄청 어렵지 않나?”
“그리고 그 말투 그만하시면 안 돼요? 진짜 어색하고 아무도 안 속는데.”
오늘도 가장 생기 넘치는 정예슬이 툴툴거렸다.
이 친구들은 원래부터 친목모임으로 모였다고 한다.
최민호가 리더격에 김유진이 총무.
정예슬 같은 경우는 나이도 어린 편이라 분위기 메이커 역할이었다고.
하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첫 대면 이후 최민호는 그다지 앞에 나서지 않았다.
새로 임플란트를 해야 해서 치과 예약을 해뒀다고 들었다. 그것 때문에 다른 데 신경 돌릴 여유가 없는 걸까? 안타까운 일이다.
김유진이야 원래 나대는 성격이 아니고.
그러다 보니 훈련 중에 가장 적게 맞고 성격도 활발한 정예슬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게 되었다.
“잠시 휴식하도록 합니다. 쉬는 도중에도 계속 마나 순환하세요.”
지친 얼굴로 여기저기 주저앉는 샌드백들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느새 정예슬이 비비적거리며 다가왔다.
“쌤.”
“쌤?”
“아니면 오빠라고 불러야 하나? 서른 살쯤 되셨죠?”
“‘티처’ 추천합니다.”
갑자기 정예슬이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괴롭게 중얼거렸다.
“아으, 나 진짜 이런 거 오글거려서 잘 못 듣는다고요오······.”
“······그냥 알아서 부르세요.”
나도 몇 시간 동안 이상한 말투 쓰려니까 좀 힘들긴 했다.
정예슬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에. 아무튼 이거 훈련 효과 완전 좋은 거 같거든요? 어제 B랭크 던전 한 번 다녀왔는데 예전보다 괴수들 떨궈내기도 쉬워졌고 마나 방출도 편해졌고요. 가르쳐주신 요령대로 마나 움직이니까 그게 지름길 뚫린 듯이 편하더라고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래서 말인데 저희 그러면 던전 같이 들어간다고 하신 거요. 그건 언제쯤인지 여쭤보려고요. 혹시 A랭크 들어가나요?”
정예슬이 기대에 찬 얼굴을 했다.
얘는 실적이 좀 달려서 아직 A랭크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러면 A랭크 던전 맘대로 못 들어간다.
원칙적으로는 자기 헌터 랭크와 동급 이하의 던전만 들어갈 수 있다.
아무튼 그래서 기대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이다.
“아뇨. S랭크 들어갈 건데?”
“S랭크요!?”
정예슬이 입을 떡 벌렸다.
“A랭크 던전은 지금이라도 준비 잘하고 들어가면 얼추 가능할 겁니다. 그럴 거면 내가 왜 비싼 밥 먹고 시간 내서 당신들 다마고치 키우듯이 키우겠습니까. 당연히 S랭크 들어가려고 하는 거지.”
“근데 S랭크 던전은 한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고 경쟁도 엄청 세고, 아예 그 아래 던전들이랑은 차원이 다르다던데요. 괜찮을까요? 그런데 다마고치 아실 정도면 옛날부터 한국 사셨나 보네요······.”
불안해 하는 마음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시키는 거만 잘 따라하면 문제없을 겁니다. 얼빠진 짓해서 다치는 것까지야 못 막아줘도 보스몹 같은 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그리고 다마고치는 실제로 해 보진 못하고 인터넷에서 봤습니다.”
사실 지금도 내 방 책상 서랍에 고이 잠들어 있다.
아무튼 헌터들 훈련시키는 목표 중 하나가 그거다.
던전 데리고 들어가서 뒤치다꺼리 시키기.
S랭크 던전은 입찰 경쟁이 심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무력이 이미 알려져 있는데다, 김유진 통해서 협회 쪽이랑 연결해서 잘 풀면 크게 문제는 없을 거다.
그래. S랭크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
어쩌면 그곳에서 ‘인간형 괴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S랭크 던전 중에서도 드물게 등장한다고 하는 인간형 괴수.
일신의 강함으로만 따져도 일반적인 S랭크 보스몹보다 강하며 지능 역시 인간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던전 내부에서 인간형 괴수를 마주친 헌터들은 대화까지 나눠봤다고 했다.
그래봐야 ‘죽어라, 괴수!’ ‘인간 주제에······!’ 같은 중2병 대화였지만.
하지만 나라면 그놈들과 조금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어떻게?
생포해서.
기껏해야 격퇴시키는 정도밖에 못했던 기존의 헌터들과는 다르다.
잡아서 던전 밖으로 데리고 나올 테다.
그리고 물어볼 거다.
너희 대체 뭐하는 놈들이냐고.
할 짓이 없기로서니 왜 남의 땅에 자꾸 나타나냐고.
우리 딸을 노린 이유는 뭐냐고.
그놈들을 찾아서, 물어볼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시키는 거 잘 하고 잘 먹고 잘 자고 하세요. 빠르면 다음 S랭크 던전 소식 들어오면 가볼 수도 있습니다.”
“네에.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근데, 제가 쌤한테 사적인 질문도 하나 있거든요. 혹시 해도 되나요?”
“대답하기 싫으면 대답 안 하겠습니다.”
“아이, 일단 들어봐요. 그러니까 쌤, 여자친구는 있으세요?”
여자친구? 당연히 없지.
나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여자친구 없습니다.”
정예슬의 얼굴이 꽃처럼 화사해진다.
“정말요? 그러면 혹시 저-”
“여자친구는 없고 집에 가면 결혼반지는 있습니다.”
“결혼······이요?”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는데 그거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훈련할 때야 끼고 있으면 불편하니까 빼고 옵니다만.”
보통 때는 안 끼고 있으면 지현이가 질색팔색을 하니까.
“아, 네. 결혼, 결혼이요······. 알겠습니다······.”
정예슬이 시무룩해져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훈련 후반부에는 안 맞을 것도 한 대 맞고, 한 대 맞을 건 두 대 세 대를 맞았다.
원래는 두 대 맞을 거 한 대 맞고, 한 대 맞을 거 안 맞는 여자였는데.
어쩔 수 없다. 난 거짓말 안 했다.
***
헌터 이수민은 즐거운 웃음기를 입가에 담고는 휴대전화 액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유지현이 수줍게 가르쳐준 비밀.
‘언니. 제가 사실 있잖아요. 소설 같은 거를 쓰거든요?’
‘정말? 혹시 언니한테 보여줄 수 있어?’
‘그게, 연재도 하고 있어요. 괜찮으면 링크 보내드릴까요?’
‘응. 당연하지.’
‘그러면은 선호작이랑 추천이랑 코멘트 꼭 달아주셔야 해요!’
그리고 유지현과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메신저 앱으로 링크가 도착했다.
글의 제목은 칠대 천마의 전설.
그 웅장한 제목을 듣자마자 느낌이 왔다. 강렬한 대작의 울림을 느낀 것이다.
게다가 천마라니. 그것도 칠대라니.
떨리는 손으로 찬찬히 읽어봤다.
틀림없었다. 이 아이가 전생의 제자 설운혜가 맞았다.
집에 돌아온 이수민은 홀로 자기 방 침대에서 누워 벽을 치며 동서남북으로 울부짖었다. 주먹을 입에 넣고는 꺼이꺼이 울었다.
이 아이가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어떻게 살아왔을까. 못난 스승과 지냈던 나날은 어떻게 기억할런지.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차마 쉽사리 첫 화를 열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글을 읽자마자 이수민은 정신없이 몰입해 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천의무봉한 필력이었다.
어찌나 실감나고, 세밀하고, 신교의 고결함을 잘 담아냈는지.
제자가 귀엽고, 착하고, 예쁘고, 무공에 소질이 좋던 건 익히 알았지만 설마하니 작가로서의 재능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이렇게나 많은 가능성이 있었던 아이인데 전생에서는 그만 너무 큰 업을 지우게 만들었다.
다른 선택지는 하나 남김없이 모두 없애버리고 말았다. 오직 신교의 천마 설운혜로만 살게 했다.
이수민은 그것도 미안했다.
‘이제부터 잘해줄 거야······.’
전생보다야 훨씬 평화로운 시대다.
제자가 얼마 전에 이상한 일에 휘말리기는 했지만 자신과 함께 던전에 들어간다면 그런 걱정도 해결이다.
남은 과제는 단 하나.
어떻게 하면 가장 감동적으로 정체를 밝히고 재회를 축하할 수 있는지. 바로 그것이다.
저녁 메뉴 말하듯이 가볍게 밝힐 수 있는 사실은 아니니까.
최적의 타이밍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오늘이 될 지도 모른다.
이수민이 메시지를 전송했다.
<지현아! 언니 이제 다 와가~>
<아, 언니 저 나갈게요!>
퇴원 축하 기념으로 유지현에게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기로 했다.
계획에는 고기 메뉴가 없지만, 이수민은 상당한 재량을 발휘해 고기가 들어간 메뉴를 주문할 것도 고려는 하고 있었다.
귀여운 제자야 그 아버지인지 뭔지가 주길래 먹은 것뿐일 테니. 곧바로 다시 채식주의의 길로 회귀하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겠지······.
유지현이 사는 단독주택 앞.
조금 일찍 도착한 이수민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유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문이 달칵 열린 순간, 이수민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딸. 가방 안 매고 가?”
“응. 그냥 가게. 아, 언니!”
유지현이 천사 같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저절로 표정이 풀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 뒤에 불청객이 하나 있었다.
키는 좀 크고 얼굴은 번지르르했다.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사랑하는 제자의 현생의 아버지인 유수현.
어째선지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딘가 대하기 어려웠다.
묘하게 위축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유수현을 떠올릴 때마다 이수민은 자신이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있음을 느꼈다.
현생에서 제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질투?
제자를 육식주의자로 개종시킨 데 대한 분노?
그런 것도 있겠지만 뭐랄까······.
그래, 본능적인 거부감 같은 것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 제자의 아버지라니 난 인정할 수 없어.’
그런 속내는 감추고 이수민이 다가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한 번 뵀었죠?”
하지만 유수현은 그다지 속내를 숨길 생각이 없어보였다. 누가 봐도 떨떠름한 표정이다.
“우리 딸 오늘 약속 있다는 게 이수민 씨였나요?”
“네. 지현이랑 많이 친해졌거든요. 오늘 저녁이나 한 끼 사려고요.”
이 아버지란 작자는 건방지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보호자 짬밥으로 따지자면 자신이 비할 수도 없이 우위일 터. 어딜 감히······.
하지만 제자 앞에서 갈등을 빚을 순 없다.
이수민이 친절한 목소리를 가장해 말했다.
“괜찮으시면 식사 같이 하시겠어요? 혼자 드시는 것보다는 같이 드시면 좋을 것 같은데.”
물론 말을 하면서도 이수민은 유수현이 사양할 것을 믿어 의심치않았다.
한데,
“그래도 괜찮으시면 네. 감사합니다.”
“아, 네······.”
상황을 모르는 유지현만이 환하게 웃었다.
“난 찬성!”
“가시죠. 차는 주차할 곳이 없어서 저기 세워뒀어요.”
“아, 기둥 뒤에 공간 있어요. 아무튼 가시죠.”
초여름의 운치 있는 거리를 세 사람이 걸었다.
유지현은 생각했다.
‘맛있는 거 먹으면 좋겠다아.’
이수민은 생각했다.
‘염치도 없는 방해꾼 자식······.’
유수현은 생각했다.
‘기분 나쁜 스토커 새끼······.’
세 사람은 웃으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