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15화 (15/130)

15. 당신의 치아, 몇 개입니까.

이수민은 충격과 공포 속에서 병실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나의 제자(추정)가······.

하지만 엄연히 맞닥뜨린 현실이었다.

14세 유지현 양은 한창 성장할 나이답게 고기라면 환장을 하고 없어서 못 먹는다. 그것이 진실이다.

조금 전까지 나눴던 대화가 지금도 생생했다.

‘그런데 언니. 아,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네? 아아. 응, 당연하지. 저기 그러면 나도······, 말 편하게 해도 될까?’

이수민은 이 대목에서 잠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지현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히히. 그러니까요. 제가 언니한테 여쭤보고 싶은 게 하나 있거든요.’

‘뭔데?’

이수민은 상당히 긴장한 채로 침을 꿀꺽 삼키고 되물었다.

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고?

‘그게 말인데요. 지금 여기서 치킨 배달시키면 의사쌤한테 들킬까요, 안 들킬까요?’

배시시 웃으며 장난스레 묻는 그 질문이 이수민에게는 강호무림을 횡행하며 겪었던 어떤 음공보다도 고통스러웠다.

이 아이가 내 제자가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

이래봬도 전생에서는 불가에서 말하는 육신통과 비슷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자부하는 이수민이었다. 이 강렬한 육감이 결코 틀릴 리는 없었다. 한데 어째서······.

이수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있잖아. 지현이는 어릴 때부터 고기 잘 먹고 그랬니?’

‘아빠가 그러는데 어릴 때는 채소랑 나물을 더 좋아했대요. 근데 우리 아빠가 고기 엄청 좋아하거든요. 엄마도 싫어하지는 않고. 근데 아빠가 보통 요리 다 하니까 주로 고기가 많이 나와서 저도 먹다보니까 되게 맛있던데요?’

이 순간 이수민은 결심했다.

내 귀여운 제자와 동반으로 채식주의 홍보대사가 되려던 꿈을 망쳐놓은, 그 얼굴 뺀질한 아버지와는 언제 한 번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겠다고.

흔히 사부와 아비가 동급이라고 했으나 경력으로 따지면 자신이 더 위다.

‘내가 결코 이대로 좌시하지만은 않을 테다······!’

주차장에 들어선 이수민이 멀리 병실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심력을 많이 소모해 그냥 돌아간다.

하지만 다음에야말로 감동적인 해후를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새빨간 스포츠카에 올라타려고 할 때 어디선가 부아아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병실에서 이수민이 결제해줬던 치킨을 배달하러 온 오토바이 소리였다.

“······.”

차에 올라탄 이수민은 청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원념을 담아 키패드를 꾹꾹 눌러나갔다.

먼저 발신자 표시제한 *23#.

그리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거기 병원 맞나요? 아까 지나가면서 보니까 701호였나? 거기서 몰래 치킨 시키는 것 같던데. 다른 병실에 위화감 조성할 수 있으니 한 번 확인해 주시겠어요? 네? 먹어도 상관없다고요?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거친 배기음 소리와 함께 스포츠카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왠지 모를 오한에 몸을 떨었다.

누가 내 욕을 하나?

전생이야 몰라도 현생에서는 원한 살 일을 한 적이 없는데?

팔을 슥 감싸며 공터 한쪽 구석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지현이가 용과 싸운 그날, D랭크 던전에 S랭크 괴수가 출현한 이상사태를 보고 떠올렸던 계획.

김유진과 계획했던 그 일의 첫 단추를 오늘 잘 꿰매야 한다.

그러고 보면 방금 든 오한은 어쩌면 미래 예지 같은 걸지도 모른다.

아마 오늘 내 수명이 꽤 늘어날 터.

욕 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니까 말이야.

어느덧 약속시간이 되어간다.

저기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드디어 왔구나. 샌드백이 되도록 예정지어진 자들이여······.

얼추 보니까 열 명 정도 왔다.

다들 방송이나 어디 잡지에 한두 번은 나왔거나 관리직 하면서 이름이랑 신상명세 한 번씩은 들어본 사람들이었다.

20대 초중반에서 30대 초까지로 구성된, 말하자면 헌터계의 로얄로더들.

김유진 이 사람 생각보다도 인맥이 좋구만.

일행의 선두에 있던 김유진이 잔뜩 얼어 있는 표정을 꾸미고 내 쪽으로 달려 왔다.

서로 눈치를 보던 나머지 샌드백들이 그 뒤를 따랐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나는 대답 대신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폈다.

“아, 오분······.”

고개를 저었다.

“핍티 미닛(50분).”

“아앗, 아아······.”

김유진이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러면서 뒤에 엉거주춤 서 있는 일행들에게 눈치를 준다.

이 녀석들 보게. 반응이 늦는구만. 사실 5분 기다린 게 맞기는 했는데.

뭐, 반응이 늦는다면 그것도 좋다. 곧 자연히 빨라지게 될 터.

김유진이 일행들을 돌아보며 나를 소개했다.

“말씀드렸던 그분이셔. S랭크 괴수를 혼자 처리하신 각성자분.”

“언니. 저분 한국 분 아니셔요?”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한 여자애 하나가 김유진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방송에서 많이 봤는데 이름이 정예슬이었던가.

마나 방출 계통이 특기로 젊은 헌터들 중에서는 가장 전도유망한 헌터라고 들었다.

김유진이 작은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응. 보시다시피······, 혼혈이시라고.”

미리 역용술을 펼쳐 얼굴을 적당히 만져뒀다.

머리카락 색은 검정색이 맞지만 얼굴은 적당히 혼혈 느낌이 들도록.

애 엄마가 봐도 나인 줄 모를 거다. 아닌가? 애 엄마라면 눈치 챌 수도 있겠다.

아무튼 김유진을 제외한 다른 모두에게 내 신분은 극비리다.

여기 모인 헌터들이건, 협회의 어디 높으신 분들이건.

물론 김유진도 표면상으로는 모르는 걸로 되어 있고.

그나저나 의외네.

젊고 재능 있는 애들로만 몇 명 뽑아와라, 이상한 사람들 달고 오면 성한 꼴 보기 힘들 거라고 엄포를 놓긴 했지만, 생각 외로 말을 잘 들었다.

하기야 협회라고 하면 비리의 온상 같은 이미지긴 해도 대한민국 헌터 업계는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지.

내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미리 말합니다. 나 한국말 잘 못합니다. 나와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추천 드리지 않습니다.”

“되게 잘하는 것 같은데?”

정예슬이 옆에 서 있는 다른 동료들을 쳐다보며 궁시렁거렸다. 김유진이 얼른 손을 뻗어 입을 막아버렸다.

“요즘 한국 땅 던전. 명백히 이상합니다. D랭크에서 S랭크 보스 출현. 이상합니다. 그런데.”

나는 검지손가락을 뻗어 내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헌터들을 한 명씩 가리켰다.

“유, 유, 유. 당신들 모두 약합니다. 저스트 테러블. 유남쌩?”

은근히 불편한 기색이 감돌았다.

알아주는 유망주니 이십대 나이에 벌써 A랭크니 다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을 텐데 면전에서 이런 말 들으면 기분 나쁠 만도 하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명백한 사실이다.

판타지 소설과는 다르게 현대 사회의 헌터들은 스킬이라는 게 없다. 상태창도 없다. 괴수를 잡아서 나오는 마정석을 통해 강화? 그런 거 없다.

마나 감응력이 높은지, 낮은지.

신체 강화에 적성이 있는가, 마나 방출에 적성이 있는가.

격투기의 재능 여부.

실전에 두려움이 있거나, 혹은 없거나.

그런 단순한 몇 가지 요건들로 일신의 무력이 결정되며, 괴수들을 상대로 한 활약상과 헌터로서의 급이 결정된다.

안일하기 짝이 없다.

A랭크 헌터 정도 되면 단순히 운용할 수 있는 마나의 총량이라면 전생의 강호무림의 일류고수를 상회할 수 있겠지만 막상 A랭크 헌터와 일류고수가 맞붙는다?

장담하는데 일백 초식을 나누기도 전에 헌터들 목이 날아갈 거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건 원석을 다듬는 거다.

실전을 방불케하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해서.

전생에도 이거 비슷한 걸 몇 번 해 본 적이 있는데 그때 기억이 나는구만.

좀 거칠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때랑 비슷한 코스로 가야겠다 싶었다.

그게 효과는 좋았으니까.

“오늘부터 일주일에 세 번, 시간 정해줍니다. 정해진 장소로 나오세요. 내가 직접 티-칭합니다. 훈련과 교육, 병행해서-”

“하나 질문 드릴 게 있습니다.”

누구냐. 내 말을 잘라먹은 겁없는 녀석이.

딱 봐도 도전적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뭔가 익숙한 상황이다. 이 기시감의 정체는······.

“정말로 그쪽이 S랭크 괴수를 혼자 잡았습니까?”

“물론. 저스트 온리 원 펀치 맨.”

“솔직히 저희랑 나이대도 비슷해 보이고 쉽게 믿기지도 않는데, 교육이니 훈련이니 하기 전에 저랑 대련 한 번 해보시죠.”

생각났다.

전생에 하도 심심해서 맹에서 몰래 빠져나와 항주까지 유람을 갔었는데 설화루였던가? 거기서 마주쳤던 남궁세가의 뭐시기라던 놈.

그때 상황이랑 비슷하네.

인간의 본성이란 수백 년이 흘러도 바뀌질 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이제 보니 저놈도 누구인지 알겠다.

이름이 최민호였나? 여기 모인 애들 중에서는 제일 잘나가는 축이지, 아마.

여전히 나를 노려보는 눈빛 그대로다. 호승심이라고 해야 하나.

쟤도 내가 그 무지막지한 괴수를 잡았다는 걸 정말로 안 믿는 건 아닐 거다. 그냥, 뭐라고 해야 하나. 현실감각이 없는 거지.

나 정도면 어딜 가서 비벼도 꿀릴 게 없다. 혹시나 밀리더라도 제일 먼저 맞붙고 나면 저 정체모를 인간도 내 재능과 실력을 인정해 줄 거다. 대강 이런 생각이겠지.

새빨간 오산이다.

먼저 여기 모인 이 녀석들의 정신무장을 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손가락을 까딱했다.

“유. 컴 히어.”

“그렇게 나오셔야지.”

갑자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모여 있는 녀석들이 호기심에 상기된 표정으로 나와 최민호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섰다.

내 몸소 알려주도록 하겠다. 이건 단순한 훈련이 아니라는 사실을.

최민호가 내게 인사를 꾸벅했다.

“죄송합니다. 괜히 무례했던 것 아닌가 모르겠네요. 그냥, 저도 대한민국 지키는 헌터의 한 사람으로서 궁금해서요.”

사과할 필요는 없다. 그런다고 이미 저지른 무례가 없어지지는 않으니까.

나는 물었다.

“유. 하우 매니 티쓰 두유 햅.”

“네?”

최민호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리켰다.

“티쓰. 치아.”

“아아. 보자, 스물여덟 개입니다만.”

“위즈덤 티쓰. 한국말로 사랑니. 없습니까?”

“네? 이미 다 뽑았는데요······.”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다.

치과 안 가도 되게 사랑니 먼저 뽑아주려 했건만.

“그러면 충치는?”

“없습니다.”

그렇군. 굳이 서비스를 해 줄 필요는 없어보였다.

시작 사인 같은 게 떨어지기도 전에 최민호 앞으로 순간적으로 가속했다.

“어?”

퍼억!

내공을 실은 주먹에 왼쪽 뺨을 정통으로 강타당한 최민호가 저 멀리 나뒹굴었다.

방금 감촉은 흐음.

“방금, 당신의 치아, 하나 아웃.”

“잠깐, 이게 무슨, 아악-!”

이번엔 오른쪽 뺨.

공평하게 하나씩 나가게 해줬다.

“댓츠 오케이. 이제 두 개. 당신의 치아 아직 스물여섯. 많이 남았다.”

“잠깐만요! 나 임플란트했는데- 으아악!”

······미리 말하지 그랬어.

***

세 시간 후.

한 명씩 대련을 끝마쳤다.

첫 케이스를 성공적으로 끝내서인지 나머지 헌터들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배워가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보였다. 아주 바람직했다.

“우선 실전대련. 여기까지. 이틀 후에는 지도합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 당신들 둘 다 나쁩니다. 그러니 둘 다 고생. 모두 언더스탠?”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말을 좀 잘 듣는군.

“약속시간을 엄수합니다. 지각할 시 페널티, 존재.”

헌터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훈련 끝나면, 던전 들어갑니다. 참고하세요.”

단순히 이 녀석들한테 무공만 가르쳐주고 끝낼 생각은 없다. 누구 좋으라고.

김유진이라는 꼭두각시를 통해서 나는 일종의 헌터 사병집단을 만들 생각이었다.

수족처럼 조종해 던전 레이드에 참여시키고, 나 따라서 S랭크 던전 들어가게 해서 뒤치다꺼리도 시키고.

내가 항상 지현이를 따라다닐 순 없으니까 티 안 나게 지현이가 들어갈 던전에도 같이 가게 하고 여러모로 유용하게 써먹을 계획이었다.

“아무튼 다음 시간에 봅시다. 시유 레이러.”

끙끙거리는 녀석들을 내버려두고 나 혼자 털레털레 산길을 내려오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일행 중 거의 유일하게 멀쩡한 정예슬이었다.

얘는 마나 방출계가 특기라서 괴수들 접근 못하게 하는 데는 그래도 도가 텄더라고.

덕분에 두 대 맞을 걸 한 대만 맞고, 한 대 맞을 건 안 맞고 그랬다.

내가 보기엔 가장 싹수가 보이는 애들 중 하나였다.

“아후, 걸음 되게 빠르시네.”

너스레를 떨면서 정예슬이 내민 건 자기 휴대전화였다. 이걸 어쩌라고.

“휴대폰은 가지고 계시죠? 번호 알려주세요!”

나는 손을 내밀며 정중히 사양했다.

“유와 개인적인 연락, 원치 않습니다. 온리 티칭과 트레이닝. 오케이?”

“흐음. 그래요?”

정예슬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섰다.

“용건 없으면 이만 갑니다.”

“네에. 근데요.”

“뭡니까.”

“사실 한국말 잘하시죠? 그거 무슨 번역체인가 그거잖아요. 에이, 그걸 누가 속아요.”

“속고 싶게 만들어 줄 수는 있습니다.”

등을 돌린 상태 그대로 오른팔을 들었다.

“아, 그건 좀······.”

부스럭거리며 한 걸음 물러서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이틀 후에 봅시다. 아윌비백.”

들고 있던 오른팔 주먹에서 엄지손가락만 올려주고 그대로 산길을 걸어 내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