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13화 (13/130)

13. 이름이 뭐예요?

김유진이 되물었다.

“일이요? 무슨······.”

하나하나 설명할 시간이 없다.

나는 손가락을 멀리 뻗었다.

“저기 보세요.”

방금 막 지현이가 용과 거리를 벌리면서 묵빛의 장력을 날렸다.

김유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게 뭐예요!? 지현이가 어떻게-”

“우리 지현이가 저런 앱니다.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그냥 받아들이세요.”

“네, 네······.”

“그리고 저도 그런 사람입니다. 아까 보셨죠?”

“그것도, 네······.”

김유진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세다. 지금 당신한테 허락된 유일한 행동이 그거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중요한 거요?”

“지현이는 제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몰라요. 앞으로도 몰라야 합니다.”

전생의 나와 천마 일맥 사이의 은원이 결코 가볍지 않고, 그것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지현이 본인을 위해서. 작년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다.

우리 딸이 그런 표정으로 지내는 건 두 번 다시 보기 싫다.

“어떤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상황 판단력과 이해력이 빠르시군요. 좋습니다.”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다시 흘낏 고개를 돌려 공동의 저편을 바라봤다.

싸움은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용은 날개 한 짝이 반쯤 떨어져 나갔고, 온몸에서 기묘한 색의 피를 흘리고 있다.

지현이도 쉽사리 접근하지는 못하고 대치하면서 틈을 엿보는 중.

둘 다 지쳐가는 것이다.

용은 덩치가 커서, 지현이는 아직 그만한 체력이 안 되어서.

십 분 정도는 별 탈 없이 괜찮을 것 같지만······, 그래도 빨리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그러면 시키실 일이라는 게 어떤 거죠?”

“김유진 씨가 이래저래 센터에서 힘 좀 쓰실 수 있는 걸로 압니다.”

그러니까 나랑 지현이가 처리해야 할 절차 같은 것도 알아서 대신해줬지.

헌터로서의 실력이 좋기도 했지만 집안이 빵빵해서 센터와 더 나아가서 협회 쪽에도 어느 정도 권한이 있다고 들었다.

한창 나이에 현역 쉬면서 교관 노릇하는 것도 집에서 위험한 일하지 말라고 하도 성화여서 잠시 쉬는 거라고.

김유진이 답했다.

“어느 정도는······.”

그 말을 기다렸다.

간략하게 내 계획을 설명했다.

“네, 아마 될 것 같아요.”

좋아.

주위를 둘러봤다.

십수 명의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다. 아까 이쪽으로 오면서 죄다 지풍으로 혈을 짚어둬서 깨어날 일은 없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온 배낭들.

몇 개는 흐르는 용암에 타버렸지만 몇 개는 아직 멀쩡하다.

거기 필요한 게 들어 있었다.

그리고 운용할 무공이 그거랑 이거, 그것도 필요하겠네.

“김유진 씨. 지금부터 뭔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마십쇼. 아시겠습니까, 휴먼?”

“네? 어, 응? 어어?”

어리둥절해 하던 김유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눈앞에서 갑자기 사람 모습이 달라지면 그럴 만도 하겠지.

역용술과 축골공.

성대의 구조를 바꿔 목소리를 변조하고, 거기에 더해서 존재감을 지우는 살수들의 비기까지.

얼굴 근육이 좀 당기는 데다 뼈를 좀 만졌더니 옷이 헐렁해졌다. 그래도 급하게 한 것치고는 합격점이다.

김유진의 입에서 멍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유수현······, 씨?

“아직도 내가 유수현으로 보입니까?”

김유진이 갑자기 히익,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이 여자가?

“······놀래킬려고 한 말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냐고 묻는 겁니다.”

“아, 아뇨. 안 보여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요.”

“그럼 됐습니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흡자결의 묘리를 이용해서 대강 올백 스타일로.

그리고 허공섭물을 조심스럽게 운용했다.

배낭 몇 개가 땅 위로 끌리듯이 내게 다가왔다.

“이제 배낭에서 옷 찢어졌을 때 입는 거, 예비옷 좀 꺼내보세요. 상하의랑, 신발은 있으면 좋고요.”

“네. 그런데 유수현 씨.”

“뭡니까.”

입을 우물거리던 김유진이 마침내 말했다.

“정말로 사람 아니신 건-”

“······당연히 사람 맞습니다.”

“그, 조금 전에 저보고 ‘휴먼’이라고 하시길래······.”

나도 사람이야, 사람.

“그런 말할 정신 있으면 빨리 옷부터 챙겨요.”

옷을 다 꺼내고 배낭은 태워버렸다. 증거인멸도 완벽하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등장한다.

나는 침묵의 수호자이자, 우리 딸을 지켜주는 보호······ 응?

멀리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바위 파편 하나가 이 근처로 쏜살같이 날아오다가, 장력에 요격되어 폭발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흩뿌려지는 돌의 잔해 사이로 용의 거대한 발톱이 지현이를 노리는 장면이 보이고, 계획 같은 걸 생각할 틈도 없이 나는 무작정 땅을 박찼다.

***

유지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대한 나무기둥보다도 두터운 발톱이 자신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못 피하겠네.’

이미 자세가 흐트러졌다. 지금 걸 피해도 후속공격은 못 피한다.

일단 간격에 들어선 이상 한 번은 잡혀야만 했다.

게다가 남은 내공이 얼마 되지 않았다.

자연지기를 순환한다고 해도 최소한의 동력이 될 내공은 가지고 있어야 했기에, 더 이상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도 없다.

‘차라리 한 번 맞아주고 마지막 기회를 노리는 게······!’

그래도 조금이라도 비껴서 받는 게 더 나았다.

유지현은 천마월영보를 구사해 몸을 살짝 띄우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용의 발톱이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

‘어?’

문득 유지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얼마 전의 기억이었다.

아버지 유수현에게 천마월영보를 가르쳐줄 때의 일.

‘······응?’

‘지현아, 왜? 아빠 틀렸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천마월영보의 다섯 번째 걸음.

서툴러 보이는, 유지현이 원래 걷던 것과는 약간 다른 움직임.

하지만 왠지 기억에 남아 있었다.

유지현은 자기도 모르는 새 그 걸음을 따라했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 가 닿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쾌감 같은 서늘함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용의 눈앞이었다.

유지현은 몸속의 내공과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마나를 손에 담아 전력으로 묵빛의 강기를 휘둘렀다.

***

축지를 구사하며 정신없이 달리던 내 눈에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우리 딸이 천재였어?

방금은 꼼짝없이 잡혔다. 무조건 한 대는 맞아야 할 상황이었다.

내가 그 꼴은 못 보겠어서 뛰쳐나가려고 했고.

한데 지현이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도약했다.

천마월영보가 그럭저럭 괜찮은 무공이라 십성 넘기면 이형환위처럼 써먹을 수도 있긴 하다. 얼마 전에 지현이에게 살짝 단초만 보여주기도 했고.

그래도 그렇지. 그걸 한 번 봤다고 저렇게 바로?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미간의 급소에 치명적인 일격을 얻어맞은 용이 배를 보이고 쓰러졌다.

하지만 지현이도 순간적으로 자기 기량 이상의 무공을 보여준 여파인지 착지한 뒤로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다. 초짜들이 무공으로 신을 엿보고 나오면 다 저러긴 하더라만.

벌러덩 누워 있던 용이 몸을 뒤튼다. 저 질긴 새끼······.

그래도 이 정도면 완벽한 상황이다.

지현이 기절부터 시키고 마무리 지을 것까지도 생각했었는데, 안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애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데 괜히 접촉을 늘릴 필요가 없지.

아무튼 우리 딸, 아빠가 늦어서 미안하다.

***

유지현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몽롱한 기운이 가시지가 않았다.

아직 마무리를 못 지었는데······.

거대한 용이 안간힘을 쓰면서 꿈틀거렸다.

조금만 더 내공이 남아 있으면······.

그러나 몸이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르르, 거친 숨을 내쉬며 용이 완전히 몸을 일으켰을 때 유지현은 누군지 모를 남자의 뒷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남자의 손짓은 간결했다.

무공이랄 것도 없는, 단순히 손을 위에서 아래로 그어내리는 단 한 동작.

하지만 그 단순한 동작의 기저에 담긴,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무의 깊이를 유지현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푸르게 빛나는 남자의 손에서 뻗어나온 마나의 검결이 지친 용의 몸뚱어리를 너무도 쉽게 두동강냈다.

남자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였다.

유지현이 힘겹게 입을 뗐다.

“구명지은에 감- 아니, 그게 아니라······,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유지현은 한 발 다가서며 물었다.

“나는 이름을 설운, 이 아니라 유지현이라 하고, 진씨 성에 자는 천군이라 쓰시는 분을 스승으로 사사하였소. 귀하의 존성대명을······.”

“······.”

“······저기, 이름이 뭐예요?”

남자의 뒷통수가 좌우로 움직인다.

말하기 싫다는 건가?

그럼 최소한 얼굴이라도······.

유지현이 한 발 더 다가간 그때였다.

갑자기 남자가 허공을 향해 한 팔을 들었다.

마나를 쏟아낸 공격에 얻어맞은 공동의 천장에서부터 커다란 바위들이 쏟아졌다.

쾅, 쾅!

연이어 이어진 바위세례들이 용의 몸체를 거의 다 가렸다.

유지현은 모래바람에 눈을 제대로 뜨기가 어려웠다.

어렴풋이 남자가 발을 떼는 모습이 보인다.

유지현이 외쳤다.

“이름 알려주고 가!”

콰앙!

다시 한 번 바위들이 바닥에 부딪치며 굉음을 냈다.

그리고 남자가 뭘 했는지 그 바위들은 땅에 닿자마자 폭발해 버렸고, 소음이 잦아들었을 때는 이미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홀로 남은 유지현이 흐릿한 의식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 순간, 남자가 모습을 감추기 직전 작게 흘렸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나보다 약한 자의 명령 따위는 듣지 않는다.’

그날 밤.

누구도 알지 못하게 먼저 던전에 침입해 있다가, S랭크로 추정되는 괴수를 홀로 도륙한 정체불명의 각성자에 대한 뉴스가 대한민국 전체를 시끄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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