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들키지 않으면 가라가 아니다.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처음에는 꼭 소풍 온 기분이었다.
공략인원도 충분하고 센터의 헌터들도 세 명이나 왔으니까.
지현이가 뜬금없이 소설 홍보를 하려는 통에 분위기가 좀 싸해지긴 했지만 뭐 어때. 우리 딸은 존재 자체만으로 빛이요, 소금이다.
그리고 김유진이 워낙에 말을 잘 받아줘서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또 지현이가 경계하던 이채린은 알고 보니 같이 온 설인호와 연인 사이였다.
그 시점에서 이 문제도 해결.
엄마한테 일러바쳐도 상관없냐고 지현이가 귓속말 할 때는 목덜미가 좀 서늘해지긴 했지만······, 상관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 문제는 음······.
아무튼 분위기는 좋았다.
처음 느낌이 쎄했던 건 첫 전투 때였다.
묘하게 괴수들이 이쪽으로 몰리는 것 같았단 말이지.
그때는 기분 탓인 줄 알았다.
본격적으로 이상한 점을 느꼈던 건 전투가 끝난 후였다.
D랭크 던전은 일반적으로 지하 4층으로 구성된다.
입장한 직후의 대기실 같은 공간을 지나 지하 1층.
그 아래로 지하 2층, 지하 3층. 그리고 마지막 보스몹이 있는 지하 4층.
그런데 2층으로 진입하고 나니······, 괴수가 없었다. 3층도 마찬가지.
포장이사 불러서 짐이라도 싹 뺀 듯이 말끔했다.
삼십 분 정도 회의를 한 끝에 보스몹이 있을 지하 4층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차고 넘칠 전력인 데다 확인은 해 볼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의구심과 함께 보스몹의 방에 도착했지만, 여기도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흩어져서 별다른 게 있나 둘러봤지먼 말끔했다.
“저기 구석에 동굴 몇 군데 보이는데 저기 숨어 있나?”
“제대로 허탕친 것 같은데.”
지현이가 말했다.
"아빠, 이상하지?"
"그러네."
"진짜로 혹시 누가 몰래 들어온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겠다.
원래 던전이란 게 발견하고 신고 들어가고 나면 출입이 금지되긴 한데, 작정하면 또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도 그랬고.
아무튼 여기저기서 허탈한 탄식이 새어나오고, 나도 슬슬 벚꽃잎이 그려진 화투패가 생각나는 차였는데······.
입이 방정이지.
갑자기 쩌어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에서 무슨 초대형 게이트도 아닌 것이, 공간이 갈라져 나왔다.
이때 모두가 직감했다.
이건 뭔가 잘못해도 단단히 잘못됐다.
이런 상황을 판타지 소설에서 몇 번 봤는데.
이러면 꼭 갑자기 밸런스 붕괴시킬 것 같은 강한······, 진짜 나오네.
용이다. 강해 보인다.
일전에 뉴스에 대서특필됐던 S급 괴수 카라카. 걔보다 좀 더 세보인다.
“크와아아아-!”
순식간에 공동 안이 도떼기시장으로 변해버렸다.
게다가 목청에다 꿀이라도 발라놨는지 사람들이 그대로 픽픽 쓰러져버렸다. 이 사람들이야 D랭크 던전 공략하러 온 헌터들이니까.
시간이 좀 지나고 일어서 있는 건 딱 다섯이었다.
나와 지현이, 센터에서 나온 헌터 셋.
내 손을 꼭 부여잡고 있던 지현이가 말했다.
“아빠, 멀리 떨어져 있-”
지현아, 그게 이미 늦었는데.
저놈, 여기로 날아온다.
콰아아아앙-!
몸집이 커서 느려보이지만 사실 겁나게 빨랐다.
지현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용이 갑자기 방향을 살짝 틀어 초대형 채찍 같은 꼬리를 휘둘렀다.
지현이를 공격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그 궤도에 걸리는 게 있었다.
실신 안 하고 버티고 있는 센터의 헌터들.
내가 지현이를 밀치면서 대각선으로 뛰었다.
안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있던 헌터들은 멍하니 서 있었다.
아주 약간, 그들보다 십 센티 정도 앞에서 내가 공격의 거의 대부분을 받아냈다.
콰아앙!
지현이를 제외한 나머지 넷이 거의 동시에 허공을 날았다.
***
“아빠, 아빠!”
유지현은 망연자실하게 외쳤다.
아버지 유수현이 멀찍이서 엎드려 누워 있다. 숨은 쉬고 있는 것 같지만 반응은 없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유지현이 냉정하게 마음을 먹었다.
최대한 이 괴수를 빨리 처치하는 게 지금 해야 할 일이다.
유지현은 몸에 힘을 뺐다.
의식적으로 닫아놓았던 천마 설운혜로서의 기억이 새어나온다.
자연적인 마나의 운동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모여든 마나는 유지현의 몸속을 순환하며 거대한 줄기가 되었다.
강호무림에서 흔히 자연경이라 일컫곤 했던 천마신공의 묘리였으며, 천마의 독문 강기공을 사용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했다.
신교의 천마에게 있어 무의 제일 덕목은 언제나 체술보다는 강기공이었다.
그들의 적은 온 세상이었고 두 손은 그것들을 모두 감당하기에는 작기만 했다.
해서 신교의 천마는 만물과 소통하고 그 모든 흐름을 다룰 수 있어야 했다.
맞서야 하는 것이 또한 세상이었으므로.
팔을 뻗었다.
칠흑 같은 내공이 거대한 채찍이 되었다.
그대로 휘둘렀다.
용이 경계하듯이 뒤로 날았다.
하지만 이번 건 공격이 아니었다.
강기에 얻어맞은 근처 돌벽이 우수수 무너져내렸다.
아버지 유수현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바로 앞으로 두터운 돌무더기가 쌓였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그리고 조금 마음을 놓고 유지현이 힘을 쏟아냈다.
강기의 채찍이 휘둘러지고, 용과 맞닿았다.
“크와아아아!”
고통스러워하던 용이 이성을 잃은 것처럼 눈을 희번덕거렸다.
다가온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자연지기에 자연경.
말은 좋지. 그게 다 이중으로 일 만드는 거다.
외부에서 받아들이고, 다시 내 걸로 만들고, 순도를 올려서 쓴다니. 귀찮게시리.
하수들 여럿에게 쓰기는 좋지만 대등한 상대와 맞붙을 때는 순간적으로 힘이 달리거나 반응이 늦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
지현이가 제 사조부 정도로 운용을 잘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딸이 아직 그 수준은 아니다.
결정적으로 지현이는 아직 어렸다.
가진 내공의 총량도 적었고, 육체적으로도 덜 성장했다.
막대한 자연지기를 다룰 만큼의 여건이 도저히 안 됐다.
이래가지곤 안 된다.
못 이긴다.
뭔가......, 계획이 필요했다.
내가 고민하는 와중에도 싸움은 이어지고 있었다.
용은 접근하려고 했고 지현이는 피하면서 강기공으로 요격하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지현이의 최우선 과제는 어떻게든 나와 멀찍이 거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비록 적잖이 손해를 본다고 해도.
이제 지현이는 거의 손톱만하게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정체는 못 밝힌다.
하지만 우리 딸이 다치는 것도 못 보겠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동시에 성립시키지?
지현이가 쏘아낸 공격이 빗나가 공동의 천장에 맞았다.
우르르 소리를 내며 거대한 바위가 쏟아져 내렸다.
용이 속도를 높여 지현이를 향해 쇄도했다.
지현이는 용이 들어올 수 없는, 가장자리의 동굴로 몸을 피했다가 다시 반격했다.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지현이 생겨서 내가 군대는 상근을 다녀왔는데 내 사수가 해줬던 말이다.
'들키지 않으면 가라가 아니다.'
과연, 과연.
그때도 옳았고 지금도 옳은, 진리의 한 편린 같은 말이다.
안경 낀 어린애 모습을 한 연쇄살인마가 늘 그러듯이 내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단서들이 짜맞춰졌다.
때마침 강렬한 충격파와 함께 흙먼지가 휘몰아쳤다.
나는 곧바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우선 지현이에게서 이곳까지의 시야가 가려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혹시 몰라서 절뚝거리는 연기를 하다가, 한 명작 영화의 엔딩처럼 내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걸으면서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에 지풍을 튕겼다. 좋아. 위험요소는 모두 제거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쪼그려 앉았다.
손을 뻗어서 어깨를 툭, 두들겼다.
“이봐요, 김유진 씨.”
“······.”
“빨리 일어나 봐요. 빨리.”
깨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약하게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제야 김유진이 멍한 표정으로 눈을 뜨더니 고개를 들었다.
“유수현 씨······?”
그 아버님이라는 호칭 뭔가 듣기가 어색했는데 자기도 의식해서 쓰던 거였나 보다. 정정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긴 한데, 지금은 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한시가 급하다.
나는 냉혹한 보스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유진 씨. 지금부터 제가 당신한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내 말만 믿고 따라오면 당신 인생도 이제 탄탄대로라 이거야.
김유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사태파악이 아직 안 되나 보군.
뭔가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손바닥에 돌멩이를 하나 올렸다.
그리고 삼매진화를 일으켜 태워버렸다. 돌멩이가 불꽃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흐리멍텅하던 김유진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거, 나랑 일 하나 같이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