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11화 (11/130)

11. 중2 병이라는 것이 폭발한다······!

어린애들이 티없이 맑게 뛰노는 장면이 흑백 영상으로 흘러나온다.

단정한 차림을 한 여자가 창밖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상냥하게 웃는다.

「환경보호.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실천하세요. 당신도 지구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공익광고협의회.」

“저 사람은 별걸 다 하네.”

“왜? 난 엄청 감명 받았는데!”

지현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방금 광고에 출연해 나레이션까지 맡은 여자는 바로 며칠 전 만났던 헌터 이수민이다.

별로 신경 안 쓰던 게 알고 나면 눈에 밟힌다더니. 저런 거도 하고 있었구만.

쓸데없이 목소리가 부드러워서 기분이 나빴다.

지현이가 의욕을 불태우며 말했다.

“우리도 이제 전기세랑 일회용품 사용 같은 걸 좀 줄여야겠어. 지구는 우리의 친구잖아?”

“오호, 그래서 에어컨 안 쓸 거야?”

“으응? 그건 또 다른 이야기지. 에어컨 같은 인류 최대의 발명품을 안 쓰는 건 그것 나름대로 현대 문명에 대한 죄를 짓는 게 아닐까?”

“아빠도 동의.”

역시 우리 딸이다. 이곳저곳 널려 있는 되다만 인간들과는 차원이 달라.

윌리스 캐리어 형님. 에어컨의 발명자시여······. 감사합니다.

“근데 아빠. 우리 언제 들어갈 수 있는지 연락 받은 거 있어?”

“아빠도 아직? 딸 기대 많이 되나 보네.”

“응. 엄청.”

지현이가 배시시 웃었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건 바로 던전에 입장할 수 있는 날짜.

나야 원래 관련 계통에서 일했으니 혹시 간단한 테스트가 필요하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도 없고, 번거로운 절차는 김유진이 간소화해서 연락 준다고 했으니까, 일단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지현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제안하는 중이었다.

“아빠. 그거 해, 그거.”

“아빠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왜? 나한테 무공 일초 반식이라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왜애? 내가 진짜 나이는 얼마 안 먹었어도 완전히 무공의 일대종사였단 말야.”

그 일대종사의 사부의 사부랑 드잡이질하던 사람이 커서 된 게 바로 나란다.

아무튼 우리 착한 딸이 아빠가 걱정이 되는지 제발 마공 좀 배우라, 그럼 내가 큰맘 먹고 천마신공을 가르쳐주겠다, 정 배우기 싫으면 하다못해 경신법이라도 익혀라. 성화도 이런 성화가 없었다.

좋아. 큰맘 먹고 지현이에게 말했다.

“그러면 딸, 아빠가 발 움직이는 것만 한 번 배워볼까?”

“응, 응! 그러면 집 앞에 공원 가서 해! 히히.”

넓은 공원의 한구석에 지현이와 내가 나란히 섰다.

“자. 아빠 잘 봐? 왼발 끝으로 이렇게 땅을 친다는 느낌으로 뛰면서 무릎은 이만큼 구부리구, 또 반대발로 바꿔가면서.”

다리 움직임을 알아보기 쉽게 트레이닝복을 입은 지현이가 이리저리 시범을 보였다.

익히기 어렵지 않으면서도 신체의 뼈와 근육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좋은 경신법이다.

생각해 보니 이게 마교 무공이구나. ······방금 한 말은 취소다.

“이렇게 뛰면 그냥 뛰는 것보다 훨씬 힘 안 들이고 빠르고 멀리 뛸 수 있거든. 아, 내공은 운용은 해야 돼. 그리고 보법은······.”

내가 곧잘 따라하자 바로 보법으로 진도가 넘어갔는데, 여기서는 지현이도 고심을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대체적으로 경신법보다는 보법이 어려우니까.

“뭐가 좋을까? 운룡보는 바로 익히기는 좀 어렵구, 유성보는 내공 때문에 안 될 것 같구, 으음······. 아!”

손가락을 꼽으며 중얼거리던 지현이가 마침내 뭘 가르쳐줄지 정했는지 눈을 빛냈다.

“아빠, 여기 와봐.”

그리고 지현이가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보법, 그러니까 발 디디는 법을 알려줄 거야. 보법 이름은 천마월영보. 호교호법과 교주 직계에게만 전해지는 것이고 본디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이나······, 이제 와서 어찌 그런 것에 의미를 둘까.”

그러면서 자조적인 한숨을 픽, 흘린다.

어째 말하는 도중에 우리 딸 말투가 점점 이상해지는데······.

“아무튼 아주 고오급 무공이니까. 거의 보법계의 페라리! 람보르기니! 또, 또 롤스로이스! 이게 그 정도 급이야. 아빠도 옛날에 들어는 봤지?”

“들어만 보긴 했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이해가 빠르긴 하네.”

“흐흐. 아마 배우면 깜짝 놀랄걸? 놀라지 마시게. 석년의 본좌가 이 보법으로 정파의 버러지들 삼만 대군 사이를 거침없이 누볐느니라.”

“······.”

유수현, 34세.

할 말은 한다.

“딸.”

“으응?”

떨떠름한 목소리로 지현이를 불렀다.

뭘 회상하는지 위험해 보이는 미소를 흘리는 지현이를 향해 정론으로 반박했다.

“아빠도 아는데 그건 좀······, 과장이 있지 않을까? 거, 뭐냐. 기억의 왜곡이라거나.”

뭐? 삼만 대군?

요 맹랑한 녀석이 정파를 완전히 물로 보네.

팩트에 기반한 내 반박에 지현이가 한 방 먹었다는 얼굴을 했다.

거봐. 거짓말 맞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자 지현이가 입을 우물거리다가 소리쳤다.

“힝, 아빠가 뭘 알아!”

어?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러면 또 반격하는 방법이 있지.

오늘 한 번 버르장머리를 고쳐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오, 유지현 씨. 옛날에 천마였다고 이제는 완전히 막나가시겠다?”

“응? 으응? 아냐아, 아빠. 그게 아니구······.”

지현이가 화들짝 놀래서 내 쪽으로 달려온다.

“왜 그래애. 아빠 내 맘 알지? 아무튼, 응. 뭐, 그래. 내가 잠시 헷갈렸던 것 같아.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지. 내가 지금 생각해 보니까 삼만은 아니구, 일만?”

“······일만?”

눈에 힘을 주니 그제야 실토한다.

“삼천······.”

“보법이나 배우자.”

“응······.”

빨리 대강 배우고 끝내야겠다.

어차피 ‘이거 다 아는 무공들이구만.’ 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지현이는 아까 문구점에서 사둔 분필을 들고 공원 바닥에다 발자국들을 그렸다.

“이 순서를 잘 기억해줘.”

그리고 지현이가 걸음을 밟았다. 사뿐사뿐 나는 듯이. 허공이라도 누빌 것처럼.

우리 딸 잘 걷네.

얼추 9성 초입 정도는 되어 보인다. 잘 봐주면 그 이상.

제 사조부보다야 못해도 진천군 그놈보다는 확실히 낫네.

이건 콩깍지 따위와는 전혀 관계없는 객관적인 평가임에 틀림없다.

근데 살짝, 아주 사알짝 아쉬운 점이 보이긴 했다.

지현이가 보법 시연을 끝내고 나보고 걸어보라길래 조금 서투른 척하면서 그 부분을 약간 교정해줬다.

뒤에서 내가 걷는 걸 보고 있던 지현이가 묘한 목소리를 냈다.

“······응?”

“지현아, 왜? 아빠 틀렸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우리 딸이 알아봤으면 좋겠는데.

그날은 해가 질 때까지 보법 수련을 빙자해 지현이와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

마침내 처음 지현이와 던전에 입장하는 날이 왔다.

“아빠, 아빠. 이제 곧 들어가.”

“응, 응.”

“아빠는 왜 안 신나 보여?”

“음, 위험하니까 그래도 아빠는 조심해야지 않을까?”

“에이. 여기 D랭크잖아. 그리구 사람도 이렇게 많은데?”

아직은 신원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어쨌든 특급 유망주의 첫 던전 탐사.

그만큼 별달리 위험이 없는 곳으로 정했다.

보통 던전의 랭크라는 게 ‘동일 랭크 헌터들이 표준적으로 팀을 구성하면 무난하게 클리어할 수 있다.’ 라는 기준으로 정해지니까.

심지어 오늘은 인원수도 두 배에 김유진을 비롯한 센터의 헌터들까지 따라온다고 했다. 아, 저기 있네.

“아버님! 지현아!”

“어? 쌤, 안녕하세요오.”

지현이가 꾸벅 인사를 했다.

김유진이 옆에 몇 명을 달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 아버님 소개드릴게요. 이쪽은 설인호 씨고, 이쪽은 이채린 씨요.”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채린이에요.”

설인호는 목소리도 서글서글하고 호남형인 남자였고, 이채린은 김유진보다 한두 살 어려보였는데 딱 봐도 애교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근데 남의 얼굴은 뭘 그리 유심히 보시나.

“······.”

왠지 옆에서 싸늘한 공기가 느껴져서 봤더니 지현이가 도끼눈을 뜨고 있다.

우리 딸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걸 내 입으로 뭐라고 말하기도 그렇다.

‘아빠. 엄마한테 이를 거야.’

입 모양으로만 지현이가 그렇게 말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냐······.

고개만 살짝 젓고 대답은 안 했다.

빨리 던전 입장이나 했으면 싶었다.

때마침 리더 역할을 맡은 헌터가 크게 외쳤다.

“입장합니다! 다들 준비 철저히 해주세요!”

“아빠, 들어간다?”

던전 안으로 발을 내딛기 직전에 지현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안에 몸을 들이자마자 외부의 햇빛 같은 게 한 번에 사라졌다.

후텁지근했던 공기도 건조한 가을 날씨처럼 변했다.

“어둡네.”

“응, 아빠.”

옆에서 김유진이 작게 말했다.

“아버님도 아시겠지만 D랭크 던전에는 컨셉 스테이지가 없으니까요. 라이트 키고 쭉 가서 보스몹까지만 잡으면 끝날 거예요. 이 인원이면 아마 빠르면 두 시간 정도?”

그리고 두 시간 후.

끝을 모르게 거대한 공동이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는 100미터는 될 듯했고 땅의 너비는 그보다도 훨씬 넓었다.

휘황찬란한 빛들이 천장에서 뻗어져 나와 바닥을 비췄고, 이따금 식지 않은 불꽃들이 단단한 바위를 녹이며 핏물처럼 흘렀다.

그 공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용.

몸 길이가 30미터를 훌쩍 넘겨 보이는 그 용은 일전에 내가 죽였던 녀석과는 차원이 달랐다.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일렁이는 마나의 파장에 땅이 우르르 진동했다.

붉고 푸른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용의 날개가 눈부시게 찬란했다.

그리고······, 그에 한치도 밀리지 않고 칠흑처럼 검은 마기를 줄기줄기 흘리는 소녀가 있었다.

앳된 얼굴에 움직이기 편한 옷을 걸친 평범한 차림새였지만 얼굴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가득 차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감히, 감히······! 하찮은 미물 따위가 본좌의 아비를······!”

소녀가 팔을 한 번 떨쳤다.

팔이 늘어난 것처럼 검은 마기가 채찍처럼 뻗어나왔다. 채찍이 닿은 곳의 바위가 형편없이 바스러져 가루가 되었다.

길다란 머리카락이 곤두세워져 위태롭게 흔들렸다.

“억조창생의 구주救主된 신교의 천마로서 맹세하노라. 오늘 이 자리, 하나의 업을 더하리.”

그리고 소녀, 지현이가 한 손으로 용을 가리키며 선언했다.

“결코 편히 죽이지는 않으리라······!”

공동의 구석진 자리.

옆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과 함께 엎드려 조용히 실눈을 뜨고는, 나는 생각했다.

‘우리 지현이 말투가 원래는 저랬구나. 어째 보법 가르쳐줄 때부터 낌새가 이상하더라니.’

듣고 있기가 조금 민망했다.

우리 딸이 아직 중1이긴 한데.

꼭 중2 병이 조금 빠르게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냐······.’

이 대참사의 시작은 던전 입장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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