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어요?
정.
이건 정파의 정을 말하는 거겠지. 바를 정正.
선?
내가 심성이 착하다고는 생각 안 하지만······, 아마 착할 선善이 맞을 거다.
눈에 거슬리는 놈들 줘패고 다니긴 했어도 걔네가 다 나쁜 놈들이었거든.
마왕?
이건 잘 모르겠다.
그런 말 들어본 기억이 없는 건 아닌데······, 그 뜻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건 지금 신경 안 써도 된다.
지금 중요한 건 내 옆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지현이. 우리 딸이다!
“아빠. 이거 한자 맞지. 유진 쌤, 맞아요?”
“응? 응. 측정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오니까. 방금 아버님처럼 한자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영어 단어로 나오는 사람도 있고.”
김유진이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럼 여기 정이랑 선은 그거 맞아요? 바를 정이랑 착할 선.”
지현이가 손가락으로 허공에다가 바를 정자를 그려본다. 착할 선을 생략한 건 한자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냥 쓰기 귀찮아서라고 믿고 싶다. 우리 애가 명색이 천마였는데.
김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거기까지는 선생님도 잘······.”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보였다.
곳곳에 묻혀 있는 지뢰를 피해 도착할 단 하나의 시나리오가 보였다 이거야!
“딸, 이거 정은 그거 같은데?”
“그거 뭐?”
지현이의 눈빛이 불안하다. 저 반듯한 이마 안쪽에서 폭풍처럼 소용돌이 치고 있는 거친 생각이 그대로 투시되는 것만 같다. 그걸 지켜보는 나는 흡사 호랑이 앞의 고양이가 된 듯한 기분이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계획은 완벽하니까.
“아빠가 정이 많잖아. 그래서 저렇게 나온 것 같은데?”
“······초코파이 할 때 그 정?”
“그렇지.”
여유로운 웃음으로 동의하면서 지현이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줬다. 아빠의 정을 느껴보라는 뜻에서.
눈가를 좁히고 잠깐 가만히 있던 지현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선은?”
“그거는······, 선을 잘 지킨다 할 때 그 선 아닐까?”
선! 라인!
중학생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단어일 터. 지현이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어? 근데 생각해 보니까 착할 선이 아니라 진짜로 그 선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흐음······.
일리가 있다, 일리가 있어.
내가 뒤에서는 저 왈패 같은 놈이라고 험담을 좀 듣고 다녔어도 그래도 맹주자리 계속 해먹을 수 있던 건 압도적인 무공도 무공이거니와 ‘그래도 위선자 놈들보다는 낫다.’ 라는 평가를 들어서이기도 하니까.
실제로도 그런 놈들을 많이 혼내주고 다녔고.
완벽하다. 심지어 나 자신마저 설득되고 마는 압도적인 논리였다.
그럼 지현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런 거면 뭐······.”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지현아. 이거 마왕은 뭔지 안 궁금해?”
“그건 별로 상관없는데? 흐흥. 마왕은 멋있잖아.”
“그치? 아빠도 이거는 되게 마음에 드네. 하, 하하.”
“······.”
묘한 시선이 느껴지길래 시선을 돌려봤다.
어느새 두어 발자국 거리를 벌린 김유진이 우리 대화를 한심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어때서 그러냐. 불만 있으면 말로 해, 이 사람아.
만족스럽게 주억거리던 지현이가 갑자기 깨달은 것처럼 불안한 얼굴을 했다.
“근데 이거······, 이거는 뭐예요?”
지현이가 가리킨 곳은 특성평가의 첫 줄이었다.
PTSD가 어쩌고, 트리거가 어쩌고 하는 그거.
전생에서야 워낙에 다사다난했으니 그런 게 있을 만도 하지.
나 스스로야 멀쩡하다고 느끼기는 하지만, 지현이가 보기에는 불안하게 느껴졌나 보다.
김유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아, 그거?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돼. 아버님도요.”
“정말요?”
지현이가 여전히 걱정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응. 원래 각성자라는 게 일반 사람들이랑은 조금 다르니까,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소견이거든. 당장 현대 사회부터가 모든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불안 증상 같은 걸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잖아요? 각성자 관리에 그런 부분에서도 다 정책적으로 마련이 되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이다, 아빠.”
김유진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상향했다.
어이, 김유진. 귀를 씻고 잘 들어라.
넌 오늘부터 우리 딸의 교관으로서 「합격」이다.
***
던전에 들어가기 위한 절차나 교육 이수 같은 문제도 김유진 본인이 알아서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
어째 첫 만남 때 느낀 것과는 다르게 치트키적인 캐릭터라는 인상이 강해지는 것 같은데.
그렇게 대강 정리를 마치고 지현이와 함께 센터를 나섰다.
“졸개야아.”
“네, 교주님.”
“우리 밖에서 밥 먹고 가자.”
“뭐 먹고 싶어?”
“나 소고기! 근데 피자도 좋구, 초밥도 먹고 싶구, 음······.”
“뷔페. 비싼 뷔페로 가자.”
지현이가 폴짝 뛰면서 등 뒤에서 어깨를 감싸 안았다.
“히히. 내가 우리 졸개 때문에 산다, 살아! 그럼 안내하거라!”
“존명.”
그리고 주차해 뒀던 차에 타려고 하는데······, 저 멀찍이 있던 차에서 누군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키가 컸고 다리가 쭉 뻗었다.
긴 머리카락은 뒷머리 윗쪽에서 하나로 질끈 묶었다.
얼굴색은 눈처럼 하얗고 섬세한 이목구비에 눈매가 서늘해서 솔직히 겉모습으로만 보면 굉장히 미인이었다.
거참, 메시지 보내면 잘근잘근 잘 씹게 생겼네!
“어? 아빠, 저 사람.”
지현이가 속닥거렸다.
맞네. 이수민.
우리 지현이랑 마찬가지로 마나 감응력 측정불가로 나온 헌터.
특성평가에 별칭이 무신武神으로 나왔다고 했던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
나는 티비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싫어했다.
왠지 그냥 싫었다. 싸가지가 없어 보이잖아.
그리고 실제로 마주치니 내가 내렸던 평가가 틀린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저거 봐. 어른이랑 눈 마주쳤으면 목례부터 할 것이지 어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느냔 말이야.
이수민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지현이가 내 팔을 잡아끌면서 속삭였다.
“아빠, 모르는 사람이랑 막 그렇게 쳐다보면 시비 붙는단 말야. 빨리 타아. 졸개야, 내 말 들어. 응?”
“걱정 마십쇼, 교주님.”
딸아, 걱정하지 마라.
시비 붙으면 창피 당하는 건 저 여자야. 국내 최고의 포텐셜을 가진 헌터니 어쩌니 하는 수식어도 당장 센터에다 반납하고 가야 할 걸.
그리고 우리 쪽을 쳐다보던 이수민이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눈빛이 확 살아나는 듯하더니 곧장 걷는다.
응? 근데 왜 이쪽으로 와?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성큼성큼 걸어서 금방 나와 지현이 앞에 섰다.
지현이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이수민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티비에서 보던 것보다도 서늘하게 들렸다.
“저기요.”
“뭡니까.”
“사인해 드릴까요?”
“······?”
지현이와 내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사인? 이 상황에서 뜬금없이?
잘 보면 이수민의 새하얀 얼굴에 홍조 같은 게 감돌고 있다.
시선은 나를 보는 것 같은데, 잘 보면 신경은 온통 지현이한테 가 있다.
뭐냐, 이 여자.
“계속 보시는 것 같길래······.”
“아니, 아니 괜찮습니다.”
당신 사인 같은 걸 갖고 싶을 리가 있나.
적당히 사양하고 가던 길 보내려고 하는데 또 말을 건다.
“혹시 헌터신가요? 그······, 오빠 되시나요?”
내가 좀 젋어보이긴 하지.
“아뇨, 저희 아빠요. 아빠랑 저랑 둘 다 각성자예요!”
분위기가 왠지 괜찮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던지 지현이가 밝은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이수민이 주섬주섬 지갑을 꺼냈다.
저 여자 가만 보니까 손까지 떠는 것 같은데.
꺼낸 건 명함이었다. 두 장.
하나는 나한테 재빨리 주고는 나머지 하나는 지현이에게 줬다.
“헌터 이수민입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유수현입니다.”
“저는 유지현이에요.”
“아, 유지현. 유지현······.”
왜 기분 나쁘게 우리 딸 이름을 계속 중얼거리냐.
급기야는 로맨스 드라마의 필수 코스 같은 대사까지 내뱉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없나요?”
“네?”
지현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 인상이 낯이 익어서.”
우리 딸처럼 귀여운 애가 흔하지는 않는데 왜 다단계 알바 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
나는 경계심을 가득 담아 쏘아보고, 지현이는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러자 볼일 급한 강아지처럼 불안한 손짓으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이수민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면 제 명함. 버리지 마시고 꼭 연락주세요.”
이제는 아예 내 쪽은 신경도 안 쓰는구만. 대체 뭐냐, 저 여자. 심장 박동도 어지간히 빨라졌는지 쿵쿵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다.
이수민이 자리를 떠나고, 방금의 사태에 대해 내가 한 마디로 정의를 내렸다.
“저 여자 좀 이상한 거 같은데.”
“그래? 난 그래도 멋있는 것 같던데.”
“나도 어른 되면 막 저렇게 포스 있고 그러면 좋겠어.”
우리 딸의 미적감각의 기준을 가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헌터 이수민은 서둘러 센터에서의 할 일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국내 수위의 헌터로서의 권력을 남용해 이미 신상정보를 파악해 뒀다.
유지현.
열네 살.
중학교 1학년.
아버지와 함께 생활 중.
전화번호도 함께 알아냈지만, 그렇게 연락하는 건 최후의 수단이다.
일단은, 일단은 기다리자.
초고층 아파트의 최상층에서 엘레베이터가 멈췄다.
바쁜 걸음으로 이수민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부족해, 부족해.’
옷가지를 내팽개치다시피 던지고 도착한 곳은 넓은 아파트의 가장 안쪽 방.
다른 용도는 없다. 커다란 벽장이 두 개 놓여 있고, 붓으로 고풍스럽게 그린 인물화가 벽면을 채우고 있다.
이수민은 깨달았다.
이 방의 문을 열 때 느끼곤 했던 충족감을 이제 두 번 다시는 맛 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역치가 높아져 버렸다.
이런 가짜들로는 만족할 수 없어.
떨리는 손으로 벽장을 열었다.
흑단 같은 머리칼을 기르고, 검소한 무복을 입은 두 명의 여인의 조각상.
도색에도 극도의 정성을 기울여 조각상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천마신교 6대 천마 진천군.
그녀의 하나된 제자였던 7대 천마 설운혜.
행복한 미소를 가득 담고 검무를 나누는,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피규어였다.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모형.
천마군림보의 기수식을 취하는 설운혜.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는 진천군.
벽면에 그려진 수묵화까지 더불어 마치 이곳이 현대의 대한민국이 아닌, 아주 오래 전의 어떤 곳으로 변한 것만 같았다.
그것들 하나하나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이수민은 기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문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흐, 흐흐······.”
이제 이런 가짜들로 기억을 되새기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찾았다. 찾아내고야 말았다.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알아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들었으니까.
‘졸개야, 내 말 들어. 응?’
‘걱정 마십쇼, 교주님.’
심증도 물증도 아직은 빈약하다.
확실한 게 아니다.
가슴속의 떨림은 이미 확신하고 있지만, 그렇지만······,
1%를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물론 문제될 건 없다.
이수민은 그걸 어떻게 채울 수 있을지 이미 계획을 마련하고 있었다.
만약 생각대로만 된다면, 그리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러면 이제 두 번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야······.”
방 안에서 귀기 어린 웃음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