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9화 (9/130)

9. 나한테 왜 이러냐.

***

요즘 아빠 소리를 잘 못 듣고 산다.

“졸개야, 나 용돈 다 썼는데. 히히.”

라던가.

“에헴, 졸개야. 오늘 국에 간이 싱겁구나.”

라던가.

“아빠, 이제 시작한다. 빨리 와.”

“금방 가니까 먼저 보고 있어.”

“어허어, 하늘처럼 높으신 교주님 말씀을 거역한단 말야? 어서 오너라!”

“······존명.”

이런 식이다.

과일 깎은 접시를 들고 거실로 향했다.

쇼파의 2/3을 점거하고 누워 있던 지현이가 자기 머리맡을 두드린다.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아빠.”

“응?”

“자세 바꾸면 안 된다? 지금 화면 보기 딱 좋은 각도란 말야.”

내 무릎을 베고 누운 지현이가 노곤한 말투로 말했다.

다른 집 자식들은 중학생쯤 되면 부모랑 말도 잘 안 한다는데, 우리 지현이야 그런 게 없어서 좋긴 하다만······, 솔직히 귀찮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깔깔 웃음을 터뜨리던 지현이가 물었다.

“맞다, 아빠 그거 생각해 봤어?”

“헌터?”

“응, 응.”

요즘 지현이가 노래를 부르다시피 졸라대는 게 그거다.

부녀 헌터.

지현이 본인도 내 동의를 받아서 헌터 일을 시작할 수 있고, 또 나랑 같이 다닐 수 있고, 겸사겸사 나한테 마공도 가르쳐주려는, 지현이 나름대로는 치밀하게 구성한 계획이다.

하지만 이 건에 한해서는 나에게 무적에 가까운 방패가 있다.

“엄마가 알면?”

“음, 으음······.”

지현이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뼉을 짝, 치며 외쳤다.

“내 생각인데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닌 것 같아. 왜냐면 아빠가 우리 집 가장이니까! 나는······, 나는 그냥 용돈 받고 사는 빈대! 엄마랑 아빠 일에 내가 감히 어떻게 참견을 하겠어. 가장의 무게란 게 막 그렇게 함부로 짊어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치이?”

“말이나 못하면.”

지현이 볼을 잡고 쭉 늘어뜨렸다. 아직 젖살이 안 빠져서 보들보들한 게 잡는 맛이 있었다.

“우리 딸, 근데 아빠가 가장이라면서 왜 자꾸 졸개라고 불러.”

“으응. 다 장난이지이. 힝, 아빠 화났어? 그러면 승진시켜줄까?”

살짝 내 눈치를 보던 지현이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빠 내가 손 마사지 해줄게.”

양손으로 내 왼손을 붙잡고 꾹꾹 누르는데 내공을 안 쓰는 모양인지 별로 힘이 없다. 마사지라기보다는 만지작거리는 느낌이었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맛에 딸 키우는 거 아니겠나.

“아무튼 아빠. 어차피 나 아직 어려서 안전 보장된 던전만 다니게 정해져 있거든. 미성년자는 원래 그렇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

덕분에 국내 헌터 중에 미성년자는 부상 입는 일도 별로 없을 정도다.

“그러면 아빠도 헌터 돼도 나랑 같이 다니면서 확실하게 안전한 곳만 다닐 수 있으니까. 엄마한테도 그렇게 말하면 되지 않을까?”

“흐음······.”

지현이랑 같이 헌터?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는 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옆에서 지켜보는 게 더 확실한 방법일지도 몰라.

몰래 던전 몇 번 들어갔는데 이게 귀찮기도 하거니와 들킬까봐 조심해야 해서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저번에 실수로 옷 태워먹는 바람에 목욕탕 가서 씻고 왔을 때 지현이가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보기도 했고.

문제는 애 엄마인데······.

이것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지현이는 이미 나한테 책임전가를 할 생각이다.

그러면 나는?

나도 지현이를 방패로 내세우지.

그렇게 폭탄 돌리기를 하다 보면 애 엄마도 별 수 없다고 포기하지 않을까?

누구도 나와 지현이를 비난할 순 없다.

이것이······, 이것이 우리 부녀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

“아버님, 정말 잘 생각하셨어요!”

지현이 교관이라던 김유진인가 뭔가 하는 헌터는 거의 입이 귀에 걸렸다.

지현이 통해서 각성자 등록 신청절차를 좀 간편하게 하려고 했는데, 이 여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복잡한 절차 같은 걸 모두 쾌속하게 처리해 줬다.

그리고 감응력 검사 받으러 가는 센터에는 마중까지 나와줬다.

저번에 그다지 좋게 만난 사이는 아닌데, 흐음.

나름대로 붙임성 있고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여자라고 평가를 조금 상향시켜줬다.

아무리 봐도 지현이 말처럼 성격이 세 보이지는 않는데.

“지현이 걱정돼서 하는 일인 걸요.”

각성자 등록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지현이에게 조건을 걸었다.

‘그러면 아빠랑 약속해.’

‘어떤 거?’

‘던전은 아빠랑 같이 있을 때만 들어가는 거야.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는.’

‘응, 응! 알겠어.’

감응력 검사를 하러 가면서 내 옆에서 김유진이 계속 조잘거렸다.

“그런데 놀랐어요. 아버님도 각성자실 줄은 몰랐거든요. 재능이라는 게 닮긴 하나 봐요.”

얼씨구.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시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C 랭크만 받을 생각이다.

어차피 지현이는 어려서 C랭크, 고등학교 가서도 B랭크 던전밖에는 못 들어가니까.

C랭크 정도면 지현이 따라서 다니기는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어느 정도 아시고 오셨겠지만 본인이 직접 하는 절차라는 게 크게 두 가지로 나뉘거든요. 심리 및 인적성 검사, 감응력 검사.”

“감응력 검사는 그렇다 치고, 인적성 검사 그건 오래 걸립니까?”

“세 시간 정도는 걸릴 거예요. 사실 그거도 짧은 편이죠.”

하기야 각성자라는 게 총칼 들고 다니는 사람과도 비교가 안 되는 살인병기니까. 아무리 열심히 걸러내도 과하다고는 말 못하겠지.

“인적성이랑 감응력 검사 종합해서 특성 같은 것도 한 줄 나오는데 그거 읽어보시면 꽤 재밌으실 거예요.”

그러면서 눈을 찡긋한다.

A랭크 이상 되고 매스컴도 타는 헌터한테 붙는 별명. 그걸 말하는 건가.

뭐, 받아보면 알겠지.

이상한 도형이나 설문조사 같은 문제를 두세 시간쯤 풀고, 감응력 측정하는 기계에 내공을 조금 불어넣었다. 밀도는 정말 낮게 했다. 이러면 C랭크 정도 나오겠지 싶은 정도로.

그게 다였다. 각성자 등록 과정이란 게 의외로 간단했다. 김유진이 잡다한 일처리를 다 해줘서 그런 건가.

감응력 측정까지 끝마치고 나오니 지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끝났어?”

“응. 딸도 교육 방금 마쳤어?”

“응. 아빠 기다린다고 오늘 좀 일찍 끝냈거든.”

그리고 다시 삼십 분 정도 기다리니 김유진이 한 손에 종이봉투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아버님, 오래 기다리셨죠? 하나씩 설명 드리려고 제가 결과서 가지고 왔어요.”

“아빠, 내가 열어도 돼?”

“그래. 열어보자.”

뭐, 잘 나와봐야 B- 정도 나왔겠지.

“그러면 연다?”

지현이가 두근거리는 얼굴로 봉투를 열었다.

종이를 펼쳤다.

“와, 아빠 B랭크인데?”

“어머, 아버님도 높게 나오셨네요.”

지현이와 김유진이 동시에 감탄했다.

B랭크? 너무 높게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헌터들 수준을 너무 높게 잡았나?

그래도 이 정도면 오차범위 안에는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별 상관은 없겠지.

김유진이 손가락으로 종이의 중간쯤을 가리켰다.

“아버님, 여기 부분이 특성란이에요.”

헌터 특성. 말하자면 생활기록부의 학생 평가 같은 것이다.

심리 및 인적성 검사와 마나 감응력 등을 종합한 결론.

‘이 아이는 이러이러한 아이이며 나중에는 이러이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느낌이랄까.

가끔 별명 같은 것도 나와서 유명한 헌터는 특성란의 평가를 별칭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요즘 한창 잘 나가는 헌터 이수민은 무신武神이라고 나왔다던데. 건방진 것이. 티비에 나올 때 얼굴 생김새부터 마음에 안 들더라니.

어쨌든 이것도 무난하게 나오겠지. 무난하게 검사했으니까.

지현이가 눈을 빛냈다.

“어디 봐. 아빠는······, 응?”

뭐야, 뭔데.

옆에서 같이 흥미진진해 하던 김유진도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뭐야, 뭔데.

검사서로 시선을 옮겼다.

짧게 두 줄이 적혀 있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징후. 강박증 소견. 알 수 없는 트리거.’

‘정. 선. 마왕.’

지현이가 멍하니 중얼거린다.

“정······? 선······?”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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