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 영호 삼촌 아시는구나.
유수현. 34세.
특이사항으로는 중학생 딸이 있다는 것과,
그리고 전생에 무림맹주였다는 것.
별호는 협검무제 俠劍武帝.
전생에서는 무제 소리 듣기까지 꽤 많은 위기를 겪었다.
천라지망에 갇혀서 사흘밤낮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검만 휘두른 적도 있고,
믿었던 사람이 배신해 등에 칼 꽂힌 적도 있고,
평생의 적수였던 5대 천마와는 싸울 때마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여하튼 몇 번이나 위기를 극복해 지금 이 시대에 환생하게 되었지만······,
“빨리 말해 봐. 아빠가 교룡출두를 어떻게 아냐니까?”
아무래도 가장 큰 위기는 아직 찾아오지도 않았던 것 같다.
***
지금껏 겪어보지도 못했던 미증유의 사태 속에서 이상하게 시간이 느려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의식은 정확히 둘로 분열했다.
좆됐다······. 이제 다 끝이야.
변명해. 빨리 아무거나 말하라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전자는 내버려두고, 간신히 후자의 의식이 몸을 지배했다.
“······그러게? 아빠가 어떻게 알았을까? 완전 신기하지?”
후자도 똑같은 놈이었다.
“됐고 어서 말해. 교룡출두라는 말만 듣고 어떻게 한 치도 안 틀리고 내가 아는 동작을 그대로 재현했는지 말하라니까?”
지현이는 나를 죄인처럼 세워두고는 자기 혼자 쇼파에 앉아 있다. 팔짱을 끼고 다리까지 꼬고 있다. 한창 클 나이에 저러면 자세 나빠지는데······.
아니, 일단 대답을 해야 한다.
당황할 건 없다. 교룡출두. 그냥 봐도 무공초식 이름 같잖아.
복호출동, 태산압정, 팔방풍우 등등. 형제의 냄새가 진하게 나잖아.
나 때는 어디 동네 뒷산에서 노인네들도 운동한답시고 따라하던 초식들이다. 둘러대면 그만이다.
“그거? 아빠가 우리 딸 도와주려고 인터넷에 검색해서 연습했지. 아빠 잘했지? 하, 하하.”
지현이가 피식, 하고 비웃는다.
갑자기 옆에 놔뒀던 스마트폰을 두드리더니 나한테 슥 내민다.
“교룡출두 같은 거 검색해도 안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해?”
안 나와? 왜 안 나와? 삼재검만큼 유명한 초식이었는데 왜!
씁,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형님들······. 부디 제게 이겨낼 힘을 주세요.
“아빠가 착각했나보다. 영화에서 봤었나? 엽문인가 이소룡인가 모르겠네. 성룡일 수도 있고, 잘 모르겠네? 아무튼 영화에서 봤어.”
세상에 무협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 어?
“그으래? 좋아, 딱 기다려봐.”
지현이가 티비를 켜더니 영화 카테고리로 들어간다.
리모컨을 만지작거려 도착한 곳은 엽문 1의 결제창.
망설임없이 결제를 누르고 쇼파의 자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친다.
“이리 와. 옆에 앉아.”
“왜, 왜?”
“오늘부터 시간 날 때마다 무협 영화랑 드라마 하나씩 볼 거야. 유명한 거랑, 아무튼 구할 수 있는 거 전부 다. 거기서 안 나오기만 해봐.”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났다.
“재밌다······.”
“명작이네······.”
묘한 여운에 잠긴 채로 지현이와 내가 중얼거렸다.
지현이가 탁자에 놓여 있던 과자를 하나 집어먹었다.
와그작하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린다.
엽문 형님의 화려한 액션 앞에 잠시 소강상태가 됐지만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현이가 입을 열었다.
“아빠.”
“응?”
“나느은 아빠한테 비밀 같은 거 없거든. 그건 아빠도 알지?”
“알지, 우리 착한 딸.”
“그래서 나는 아빠도 나한테 비밀 같은 거 안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면 안 돼?”
올려다보는 지현이의 시선이 순수해서 마주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아빠가 솔직해지면 가정이 무너져요, 이 철없는 녀석.
하지만 계속 이대로 있을 수도 없다. 어떻게 쉴 때마다 영화를 매번 봐.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저 얼굴.
나는 말하기로 했다.
“그래, 지현아. 사실 아빠가 말할 게 있어.”
“뭔데, 뭔데? 나 마음의 준비 다 됐어. 안 놀랄 테니까 말해.”
나는 쇼파에서 일어섰다.
지현이를 마주보고 섰다.
양팔을 올리고, 머리와 상반신과 함께 동시에 90도로 숙이면서 외쳤다.
“천마앙복 天魔仰從!”
“어? 응?”
지현이가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피가 새어나오는 것 같다.
시발, 시발······.
그치만······, 그치만 내 목적을 위해서는 이럴 수밖에 없었어······.
“아빠 왜 그래, 왜애. 빨리 고개 들어, 빨리이.”
지현이가 벌떡 일어나서 내 상반신을 일으키려고 낑낑댄다.
우리 착한 딸.
그래,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이 방법 밖에 없다. 치욕스러워하지 않아도 돼.
나는 천마에게 고개를 숙인 게 아니라 우리 딸을 위해 숙인 거다. 아무튼 그렇다.
“아빠, 진짜 뭐야. 깜짝 놀랐어.”
조금 진정이 되고 다시 쇼파에 앉아 지현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딸도 눈치 챘겠지만, 아빠도 전생 기억이 있어.”
“응, 그럴 거 같았어. 근데 왜 말 안 한 거야? 내가 말했을 때 아빠도 곧바로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그, 창피해서.”
“왜 창피한데?”
“딸은 천마였다며. 아빠는······, 전생에 마교 졸개였거든······.”
“앗······, 아아······.”
지현이 얼굴로 복잡한 빛이 스친다.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한, 연민 섞인 저 표정.
마! 느그 사부가 나만 보면 벌벌 떨었다! 협검무제 하무린이라고 들어는 봤나!
말하고 싶다. 아빠는 당당한 백도 정파의 무공 천하제일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말 못해······.
지현이가 어렵사리 표정을 수습하고 물었다.
“그럼 아빠는 어느 시대 사람인데?”
“아빠는 백운상 교주님 아래에 있었지······.”
“아아, 사조부님. 나도 한 번도 뵙지는 못했는데. 아빠 그럼 어디 근무했어?”
“십만대산 입구 문지기······.”
“그, 그러면 근처 살았겠네?”
잠시 당황하던 지현이가 물었다.
“응. 십리쯤 내려가면 곡 아래에 화전촌이 하나 있거든. 아빠는 거기 살았어.”
거긴 실제로 가 봤다. 몇 번 마교에 갈 일이 있었는데 잠은 거기서 잤거든.
그러자 갑자기 지현이 얼굴에 생기가 확 돈다.
“아빠 그러면 영호 삼촌 알아?”
영호 삼촌? 그게 누구야.
“왜애, 그 있잖아. 내 사숙 되시는데. 영호경 숙부. 몰라? 그분도 어릴 적에는 그 근처 사셨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영호경? 그 얼굴 뺀질해 보이던 그 새끼?
미친놈이 지 사부 따라와서는 정파 후기지수 여자애들이랑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을 찍으려고 하길래 앞니 두 개를 부러뜨려줬는데.
임플란트가 없는 시대에 태어난 게 그놈의 불운이다.
아무튼 얼버무려야 한다.
“아, 응. 몇 번 뵙기는 했지······.”
“그렇구나. 영호 삼촌 아는구나······. 그분이 나 되게 예뻐해주셨는데.”
이 새끼 우리 딸이랑 친했어?
앞니 말고 이빨을 그냥 다 부러뜨렸으면 우리 딸이 그 새끼를 피해 다녔을까?
내 고뇌는 전혀 모른 채로 지현이가 그립다는 얼굴을 했다.
“히잉, 말하니까 보고 싶다. 아무튼 이제 다 이해했어.”
지현이가 손가락을 꼽으며 자기가 의문이었던 점과 그게 어떻게 해결됐는지를 하나씩 말했다.
우리 딸은 무협 작가 말고 차라리 추리소설을 쓰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아빠 그러면 지금도 내공 있어?”
“응, 자질이 별로라서 조금뿐이긴 한데.”
“아빠 그래도 몸동작은 엄청 좋아보이던데! 맞다, 그럼 아빠도 검사만 받으면 헌터도 할 수 있겠네?”
“으응. 그건 그렇지?”
“아빠 그러면······.”
요즘 들어 압도적으로 적중률이 올라간 육감이 경고했다. 뭔가, 뭔가 불안하다.
“내가 무공 가르쳐 줄까? 마공 끝내주는 걸로!”
뭐? 나한테 마공을 가르쳐준다고?
나보고 마인이 되라고?
아, 아아. 주화입마 조심.
구결, 구결. 심호흡을 하자.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아빠는 지금이 편해.”
“흐응. 그래? 아무튼 나 진짜 별 생각 다 했거든. 아빠가 혹시 정파였으면 어쩌나······, 싶기도 했구.”
“······정파였으면?”
지현이가 사악한 미소를 흘렸다.
“당연히 회개하게 하고 교도로 입교 시키려고 했지. 현세에서의 첫 번째 교도. 아빠가 좌호법이야!”
이거 정말 미치겠구만.
지현아, 너네 좌호법 복날 개잡듯이 두들겨 팬 게 이 아빠야.
“아무튼 딸. 숨겨서 미안해.”
“에이, 괜찮아. 지금이라도 말해줬으면 됐지. 아, 근데 아빠. 나 있잖아.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뭔데?”
“그거 해봐, 그거.”
“그거?”
지현이가 실실 웃었다.
“천마앙복. 히히.”
별 수 없다. 강호의 동도들은 부디 나를 욕하지 말라.
당신들도 딸 키워보면 이해할 거야.
나는 말했다.
“처, 천마앙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