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버님, 양육을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계획을 세워보자.
지현이는 보통 오후 네 시에 학교를 마친다.
그리고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헌터 자격 이수 때문에 저녁 여덟 시는 되어야 집에 온다.
내 일은 기상청 비슷한 건데, 장점이라면 퇴근이 빠르다는 거다. 별 일이 없으면 네 시나 다섯 시 퇴근이다.
모두 더해보면······, 여유시간은 월요일과 수요일의 서너 시간과 주말.
업무상 권한을 최대한 남용해 이 근처의 던전이나 게이트 예상 발생 지역을 알아보고, 여유시간을 활용해 몰래 들어간다.
일단은 사전조사 차원에서 몇 군데 정도.
이래저래 조심을 해야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B랭크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안 들키고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가 볼 수 있다.
던전과 게이트.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은 없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공간인지는 알아봐야겠다.
그놈의 괴수가 어떤 원리로 튀어나오는지, 그걸 아는 게 중요했다.
던전과 게이트의 발생 원인에 대한 논문도 몇 개 찾아봤는데 도통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 됐거든.
그럴 땐 몸으로 겪어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
역용술, 축골공, 축지縮地, 편재遍在, 기타 등등.
아무튼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내 행적과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
지현이한테는 더더욱.
전생에 지현이 사부였던 진천군 그놈.
그 새끼가 지현이한테 내 욕을 얼마나 했을지 감도 안 잡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허공섭물로 입에다 고기 처넣지 말 것을······.
없는 살림에 산해진미를 차려놨더니 말이야.
풀떼기만 깨작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 그놈 사부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내가 몸소 신세계를 보여주려고 한 것인데, 안타깝게도 내 큰 뜻을 이해를 못하는 녀석이었다.
억지로 턱 움직여서 씹게 만들고 꿀꺽 삼키게 했는데, 차마 지 사부한테 일러바치지는 못하고 분해서 눈물을 줄줄 흘렸었지.
······지금 생각하니 미안한 감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누구나 먹고 싶은 음식을 선택할 자유도 있는 법인데, 내가 그만 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꼭 나만 나쁜 것도 아닌 게, 그 새끼 사부도 고기 먹기 싫다는 그놈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걸 내가 똑똑히 봤다.
그놈 사부가 보기에도 진천군 그 새끼 하는 짓거리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일 터.
내가 손수 고기 먹이는 모습을 봤다고 해도 나를 응원해줬을 것이 틀림없다.
아무튼 전생으로 회귀라도 하지 않는 이상, 사과하고 싶어도 이미 늦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사실은 딸애가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거다.
그래, 모른다.
그러니 앞으로도 몰라야 한다······.
***
잔챙이들 뚫는 데야 십 분이면 충분했다.
거대한 공동이 눈앞에 펼쳐졌다.
넓다, 넓어.
역시 보스몹이다. 그 좁은 동굴을 지나서도 자기 방을 이렇게 크게 가져간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사무실에도 이런 돔 사무실이 필요하다,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
아니, 내가 지금 뭐라는 거냐. 텁텁한 공기 마시다 보니 정신이 혼미해졌나.
머리에 뿔 달린 드래곤이 어둠 속에서 걸어나와 불을 뿜었다.
화력은 좋네.
저걸 보니 갑자기 걱정이 들었다.
조심해야지. 옷 그슬리면 안 되니까.
상의를 황급히 벗어 동굴 구석에 던져놓고 드래곤 근처로 다가갔다.
쇠 긁는 소리처럼 그르렁거리면서 나를 쏘아보는 눈동자가 몹시 살벌했다.
흠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자고로 약한 개가 더 크게 짖는 법이지.
그래도 덩치만큼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어우, 뭘 먹고 저렇게 크냐.”
뿔에서 시작해서 꼬리 끝까지 십 미터도 넘는 것 같다.
이런 대형 몬스터를 실제로 접해본 건 처음이다 보니 얼마나 강한지 직관적으로 파악이 안 됐다.
소설 같은 걸 읽어보면 상태창 같은 게 나와서 수치상으로 바로 얼마나 센지를 판단할 수 있던데.
뭐, 어때.
내 눈이 바로 스카우터다 이거야.
어디 보자.
흥, 전투력이 고작 5인가······. 형편없구만. 이 쓰레기 녀석.
참고로 내 전투력은 53만이지만, 인정사정 안 봐주고 전력을 다할 거니까 걱정하는 게 좋을 거다, 도마뱀 대가리. 나는 빨리 끝내고 집에 가야 한단 말이야.
마침내 도마뱀과의 거리가 이십 미터 안쪽으로 들어왔다. 여기부터가 이 녀석의 간격인 모양이었다. 용대가리가 불을 뿜었다. 으아, 시발!
호신강기護身罡氣로 막다간 큰일나겠다 싶어 황급히 취선보를 밟아 옆으로 피했다.
하마터면 머리카락 다 태워먹을 뻔했네.
호신강기란 게 듣기에는 무지개 반사처럼 편리해 보이지만 딱 피부만 감싸준다는 치명적인 결점이 하나 있다. 옷이나 머리카락은 보호가 안 된다고.
어중간하게 불편해서 원래부터 잘 써먹지도 않았다. 피하거나 맞받아치면 그만인 것을.
땡중들이야 잘 써먹었지. 걔네는 머리카락이 없으니까.
아무튼 저놈을 너무 얕봤다. 내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치명적일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카락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당장 접근전은 무리다.
우선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놓은 후에 사정없이 쥐어패주마.
드래곤이 날아올라서 불을 뿜었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냐.
내공을 끌어올려 손에 모았다. 압축했다.
다시 그 위에 내공을 덧씌워서, 또 압축했다.
그러다 보면 강기罡氣가 되고, 그걸 계속 응축하면 강환罡環이 된다.
복잡한 깨달음? 대오각성? 그런 게 왜 필요해.
기氣가 성成해 강罡이 되니 뭐니 하는데, 어려운 말 쓸 것 없다.
그런 건 그냥 요령이다.
어떻게 내공을 잘 뭉칠 수 있을지, 뭉친 내공을 흩어지지 않게 활용할 수 있는지.
나는 처음 무공을 배운 순간부터 그걸 해낼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
굳이 의식해서 호흡하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리고 서른 살 무렵엔 온 세상을 통틀어 가장 잘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무공 천하제일의 칭호를 얻은 강호 무림의 맹주였다.
내가 던져낸 강환과 드래곤의 불길이 맞닿았다.
두부 가르듯이 불길의 중심까지 파고 들어가고, 그 시점에서 폭음이 터졌다.
일부러 저쯤에서 밀도가 흩어지게 해뒀거든.
동굴 사방으로 채 해소되지 못한 기의 파편이 날았다.
도마뱀이 날개를 접어 몸을 감쌌다.
얼마 안 되는 틈이지만 접근하기에는 넘치도록 충분했다.
땅을 가볍게 박차고, 도마뱀 대가리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갔다.
파충류 특유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린다.
한 손은 이마의 뿔에 대서 지지대를 만들고, 힘을 가득 실어서 콧잔등을 발로 차버렸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못생겼네!”
“꾸에엑-!”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요상한 비명소리와 함께 드래곤이 허공을 날았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느린 화면처럼 보였다.
털썩, 하고 뻗어버린 드래곤의 등으로 올라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펜이 하나 잡혔다.
매개체가 없는 것보다는 이거라도 있는 게 낫지.
내공을 넣어 단검처럼 만든 후에 결 따라서 도마뱀 날개를 죽죽 그었다.
어후, 오랜만에 피 보는 게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르렁거리는 드래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야. 너 뭐냐. 정체가 뭐냐고. 대답하면 편하게 보내준다. 한국어 못해? 캔 유 스픽 잉글리쉬? 니혼진데스까?”
답이 없었다.
S랭크 던전의 보스 몬스터 중에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놈들도 있다던데.
몸에 비해 머리가 작아 슬픈 파충류에게는 너무 큰 짐이었는가······.
“······됐다. 잘 가라.”
그대로 드래곤을 끝장내고 던전을 빠져나왔다.
소설 보면 보상 같은 것도 나오던데, 여긴 그런 것도 없다.
내버려두면 던전 밖으로 뛰쳐나오는 괴수를 처치한다.
헌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그리고, 던전에서 나오는 이 시점이야말로 괴수들 잡을 때보다도 조심해야 할 타이밍이다.
눈에 비치는 시야가 바깥 세상으로 바뀌는 것과 동시에 허신虛身 상태로 최대한 멀리 땅을 박찼다.
이러면 혹시 누가 목격하더라도 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
일부러 구석진 곳의 던전을 골랐는데도 심장이 쫄깃했다.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
시간이 딱 맞아서 지현이를 데리러 갔더니 입구에 누군가와 같이 서 있었다.
키가 좀 크다. 여자다.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인다.
지현이 등 뒤에서 양손으로 어깨를 꼭 쥐고 서 있는 게 누가 보면 저 여자가 지현이 언니나 보호자인 줄 알겠네.
지현이가 나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아빠!”
여자도 내 얼굴을 확인했는지 뚫어져라 눈을 마주친다.
뭐야, 왜 저래.
우선 인사를 했다.
“우리 딸 열심히 배웠어?”
“응. 그냥 뭐.”
“이분은 누구시니?”
지현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지현이 아버님 되시나요?”
“네, 네. 그런데 누구시죠?”
“저는 지현이 교육 맡고 있는 김유진이라고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방송도 몇 번 탔고, 한창 활동할 때는 A랭크까지 올라간 걸로 알고 있는데.
옆에서 지현이가 ‘무기술 담당이셔.’ 하고 작게 속삭였다.
‘안 배워도 되는데.’ 라는 건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무기술 담당?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김유진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목소리를 잔뜩 굳히고 말했다.
“아버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냥 안 듣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혹시 모르잖아.
들어나 보자. 물론 듣기만 하겠지만.
“네, 말씀하세요.”
“그, 지현이 교육 커리큘럼 관련해서 얘기를 드리고 싶어서요.”
“아아. 정식으로 연락을 주셨으면 제가 먼저 찾아뵈었을 텐데.”
아주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닌지 그제서야 핫, 하고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미 늦었어. 나한테 저 여자 첫인상은 최악이다.
아니지. 가만 생각해 보면 지현이 있는 자리에서 확실히 못을 박아두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선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 지현이가 일주일에 총 6시간 교육을 받는데 혹시 아버님이 허락하신다면 시간을 조금 늘릴 수 없을까, 해서요.”
“시간이요?”
“네. 아버님도 아시겠지만······.”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시작하니까 저 여자 목소리에 갑자기 생기가 감돌았다.
“지현이가 헌터로서의 재능이 대단히 뛰어납니다. 국내에 현재 등록된 각성자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고, 특히나 아직 어려요. 지금부터 탄탄하게 교육을 받으면 전세계적으로도 탑 클래스 각성자가 될 수 있어요. 제가 장담 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당신보다는 내가 훨씬 더 잘 알지.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지현이랑 이미 상의를 했습니다. 헌터를 반드시 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아니고, 아이 진로는 성인이 돼서 자기가 선택할 수 있게 여유를 두기로요.”
“그래도 아버님, 한 번만 더 생각을 해주세요.”
이 여자 진짜 마음에 안 드네.
“아무래도 지현이 진로다 보니까 지현이 의견이 가장 중요한 건데······, 그러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네. 지현이 본인도 재미를 느끼고 있다고 하고요.”
그러면서 고개를 낮춰 지현이 쪽을 본다.
지현아, 내 말 맞지? 라는 눈빛이다.
지현이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는지 어색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다.
이거 돌아가는 꼴을 보니 설마 우리 딸이 먼저 부추긴 건가······.
그래도 지현이 가르치는 교관이라는데 무례하게 대할 수도 없고, 적당히 이야기를 끝내기로 했다.
“아무튼 당장은 더 교육시간을 늘릴 수는 없고, 제가 나중에라도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지현이 항상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지현이랑 같이 한 번만 더 생각을 해 주세요. 물론 지현이 행복이 제일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재능입니다. 이렇게 부탁 드립니다.”
그러면서 허리를 아주 90도로 숙였다.
뭐야, 이거. 이러면 꼭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그러면 나보고 뭐, 양육을 좀 대국적으로 하라, 그런 말인가.
우리 딸이 행복한 게 제일이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이 조용했다.
조수석에 앉아서 창밖만 바라보던 지현이가 내게 말했다.
“아빠. 대단하네.”
“응? 뭐가?”
“유진 쌤 있잖아.”
“그 선생님이 왜?”
“그 쌤 편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잘 없거든. 수업시간에 애들 한 명도 안 떠들어. 분위기 같은 게 있나봐. 다른 교관들도 은근히 어렵게 대하고.”
“그래?”
내가 보기엔 좀 소심해 보이던데.
“근데 아까 이야기할 때 보니까 오히려 유진 쌤이 어려워 하더라?”
당연히 그래야지. 남의 집 귀한 딸을 헌터로 키우니 마니 하는데.
“그 선생님이야 어려운 이야기 꺼내려고 하신 거니까 그런 거 아닐까?”
“그런가? 그래도······, 좀 신기하긴 했어.”
내 옆얼굴로 지현이의 시선이 와닿는 게 느껴졌다.
“근데 딸.”
“응?”
“솔직히 말해. 딸이 아까 그 선생님한테 먼저 말한 거 아냐?”
묘하게 고요하던 지현이의 눈초리에 당황이 깃들었다.
“응? 에, 에이. 아냐. 아빠랑 이미 다 이야기 끝난 건데 내가 왜 그랬겠어. 그치?”
“확실해?”
“응, 확실해. 완전 확실.”
“그래? 그럼 뭐, 그런 걸로 알고 있지 뭐.”
“아이, 진짜 내가 먼저 말한 거 아니라니까아.”
“그럼 좋다고는 했단 말이네?”
지현이는 대답하지 않고 노래를 듣고 싶다며 스피커를 켰다.
이런 걸 보면 어째 갈수록 애 엄마를 닮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
유지현은 생각했다.
요즘 아빠가 수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