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5화 (5/130)

5. 아무 일도 없었다.

스무 살 생일에 술을 진탕 마시고 집에 돌아오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내가 전생에 무림맹주였구나!

갑자기 없던 기억들이 한 번에 밀려들어오길래 처음에는 내가 미쳐버린 줄 알았다.

하지만 너무 생생한데다 머릿속에 있던 무공 자세 같은 걸 취해보니 실제로도 자세가 나왔다.

산에 올라가서 맑은 정기를 들이마시고 큰 바위에 주먹질을 하니까 막 바위가 가루가 돼서 사라지고 그랬다니까.

결국 납득할 수 있었다.

전생이야 전생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내가 겪은 경험과 내가 쌓아온 인격을 조화시키는 것도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는 별 탈없이 순탄하게 살아왔는데······, 이런 일이 생겨버리다니.

삑, 삐빅.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다녀왔습니다. 아빠? 왜 불도 안 켜고 그러고 있어?”

부엌 식탁에 팔짱을 끼고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더니 지현이가 놀라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유지현. 너 어디 갔다 왔어.”

“그냥 잠깐-”

“아빠가 알아보면 다 나오니까 지금 말해. 아까 뉴스에 나오던데. 누가 각성자 등록했다고. 딸 아냐?”

“어, 어떻게 알았지······.”

지현이가 나라 잃은 표정으로 중얼거렸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본론부터 이야기했다.

“엄마한테 연락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아, 하지 마. 제발, 아빠 제발.”

지현이가 데굴데굴 구르면서 매달렸다.

그래도 이미 늦었어.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말했다.

“아빠도 화 많이 났는데 그건 둘째치고 엄마가 알면 어떨 거 같아.”

“······뭐라고 할 것 같아.”

“그냥 뭐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지.”

“그건 그래.”

지현이가 잔뜩 풀이 죽어 동의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

“자수해서 광명 찾자?”

“바로 그거지.”

“그래도, 숨길 수 있으면 숨기는 게 좋잖아.”

“언제까지?”

“나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어떻게 숨길 건데?”

내가 자기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았는지 지현이가 재잘재잘 말을 쏟아냈다.

“어차피 등록은 돼도 미성년자는 보호자 동의 없으면 헌터 일 못하잖아? 교육시간 이수도 해야 하고, 자격 시험도 쳐야 하고. 그러니까 지금은 학교 끝나고 교육만 가끔 받구, 그러면 누가 알 일 없지 않을까?"

이젠 나도 모르겠다.

화도 나고, 걱정도 되고, 애 엄마가 노발대발할 걸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냥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싶었다.

“정말로 당장은 헌터 안 할 거지?”

“응. 그리고 졸업한다고 무조건 한다는 것도 아냐. 앞으로 계속 잘 생각해서 결정할게.”

그러더니 갑자기 요상한 말투로 무게를 잡았다.

“그래······. 본좌가 교도들을 이끌고 있을 적과는 상황이 다르- 아, 갑자기 뭐야!”

나도 모르게 살짝 머리를 쥐어박고 말았다.

절대 내 의도는 아니었다.

“그건 무슨 말투야.”

“······나 옛날에 쓰던 말투.”

“학교에서는 쓰지 마.”

지현이의 앞으로의 교우관계를 위해 진지하게 충고했다.

“에이, 안 그러지.”

지현이가 천사처럼 맑게 웃었다.

아니다. 다시 보니 악마의 속삭임 같기도 했다.

“아빠는 걱정인 게, 사람이 손에 뭘 쥐고 있으면 하고 싶어지니까. 그래서 걱정돼서 그러지.”

“아냐아. 한국이 치안이 얼마나 좋은데, 내가 힘 쓸 일이 뭐가 있겠어.”

지현이가 걱정하지 말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하기야 나도 지금까지 무공 쓸 일이 없었으니까.

일반인이면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은 괴수와 맞닥뜨릴 일은 없다고 봐도 된다.

확률로 따지면 몇만 분의 일?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

출근해서 내 자리에 앉자마자 옆자리 직원이 인사처럼 물었다.

“요즘은 어때요?”

“어떤 거 말씀이세요?”

“따님 사춘기 왔다고 하셨던 거.”

“아아, 말도 마세요.”

여전히 웹소설 작가의 꿈은 버리지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헌터 교육 받는다고 집에 늦게 온다.

하고 싶은 것 하고 살라고 자기가 다니고 싶다는 거 아니면 학원도 안 보냈건만.

그렇다고 누가 이렇게 막나가랬냔 말이다.

지금껏 키우면서 속 한 번 썩여본 적 없는 착한 애가······.

그놈의 천마 고백이 만악의 근원이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밀려 있던 것들이 이자까지 합쳐서 쏟아져 오고 있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듣지 않을 수 있었을까······.

“걱정이시겠다. 지금은 따님이랑 둘이 산다고 하셨죠?”

“네, 뭐. 그래도 요즘은 살 만하긴 해요.”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익숙해지니 어느 정도는 그러려니 하게 됐다.

“어쨌든 힘내세요. 아, 그리고 오늘 자료 체크한 거 확인 좀 해주시겠어요?”

“네.”

첨부 자료를 확인했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마나 밀도를 체크하고 프로그램 돌려서 괴수 발생 확률 정리하는 게 내 업무 중 하나였다.

어디 보자, 오늘이······.

오전엔 괜찮은데 오후가 문제네.

특히 이 근처에 마나가 짙게 깔렸다.

“오늘 많으면 게이트 세 군데는 터지겠는데요.”

“그래요? 미리 출동 신청 해둬야겠네.”

자료를 보내니 다섯 팀 정도 준비 시켜두라길래 그렇게 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

퇴근하고는 지현이와 통화를 했다.

“응, 지현아. 아빠 오늘 일이 좀 늦어서 이제 집에 가는 중. 방금 끝났어? 태워주러 갈까? 응. 그럼 아빠 거기 있을게.”

조금 돌아가긴 했지만 그리 먼 곳은 아니라 차를 반대로 몰았다.

근처에 차를 세웠을 때쯤에 지현이가 횡단보도 앞이라고 했다.

“지현아, 아빠 도착했어. 뛰지 말고 천천히- 지현아, 잠깐만.”

······이런 미친.

여기 왜 게이트가 터져 있냐.

골목 구석에 허공에 은색 거울 같은 게 일렁이고 있었다.

주먹만한 손거울 크기였던 게 급격히 팽창해간다.

아니, 왜?

왜 하필?

이 근처에 당장 출동 가능한 팀은 없다. 아마도.

지현이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아마 이제 1분도 안 남았을 거다.

게이트 상태를 보아하니 마찬가지로 1분 안에 터진다.

거 색깔도 더럽게 진하네. 던전도 아니고 게이트인데 A급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 어. 지현아. 오고 있어? 일단 거기 가만 있을래? 응? 앞에 아빠 차 보인다고?”

이런, 이런 시발······.

게이트가 터진다고 치자.

A급에서는 별의 별 놈들이 다 나온다.

지금 해결해야 한다.

양손으로 게이트를 잡았다. 때리면 터질까봐 겁나서, 온힘을 다해 구겼다.

닫혀라, 제발 좀 닫혀라.

······닫힐 리가 있나.

던전이야 들어가서 해결 보면 되는 거지만 게이트는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그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안 돼······.

조금 후에 벌어질 일이 주마등처럼 상상된다.

게이트가 열린다.

괴수가 튀어나온다.

지현이가 그걸 본다.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으니 싸우겠지.

그러다 보면 혹시라도 다칠지도 모른다.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으니 나도 싸운다.

지현이가 놀란다.

왜 지금까지 각성자라고 안 밝혔는지를 궁금해 하고, 만에 하나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혹시 무공이라도 알아본다면······, 그건 생각하기도 싫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문제다.

있는 내공 없는 내공 다 끌어모았다.

기맥이 터질 것처럼 들끓었지만 상관없었다.

구겨져라, 구겨져라.

손에 모든 힘을 싣고 게이트를 양쪽에서 짜부라뜨리듯이 쥐었다.

무림맹주를 얕보지 마라. 고작 게이트 하나쯤 내공으로 밀어내줄 테다.

그러자, 기적처럼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 어? 줄어든다. 시발, 줄어든다고.

반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은색 빛이 격렬하게 뒤틀리더니 점차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진짜 이게 되네?

“아빠! 나 여기!”

지현이 목소리가 들린다.

등지고 있어서 내가 뭐하는지는 안 보일 거다.

게이트는 이미 다시 손바닥만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제발, 제발.

마침내 펑! 하고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은빛이 사라졌다.

“후우, 휴······.”

전생부터 시작해서 이만큼 힘 쓴 적이 몇 번 있었나. 양손을 축 늘어뜨리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지현이가 내 등 뒤로 다가왔다.

“응? 아빠, 방금 소리 뭐야? 무슨 일 있었어?”

다행히 눈치는 못 챈 것 같았다.

안도와 함께 뒤돌아섰다.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거 누구 흉내내는 거야?”

요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현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중에 지현이가 정말로 헌터를 한다고 하면 그때마다 이렇게 마음 졸여야 한다고?

그건 아니다.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안 될 일이다.

뭔가,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이 세상 게이트랑 던전을 다 없애서라도······, 괴수란 괴수는 다 때려잡아서라도, 내가 그 꼴은 막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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