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보여주고 증명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천마가 손을 한 번 떨치자 정파의 위선자들이 추풍낙엽처럼 스러졌다. 겁쟁이들이 벌벌 떨면서 외쳤다.
“천마앙복! 만만세!”
“와아아! 만세!”
아무튼 정파놈들은 목소리부터 매가리가 없었다.
정말 한심했다.
다음화에 계속.」
“얘는 이걸 지금 글이라고······.”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소위 명문이라는 곳 제자들이 무공수련 말고도 정신교육을 얼마나 철저하게 했는데, 악의 우두머리가 힘 좀 세다고 손바닥 뒤집듯이 천마만세를 외친단 말이야.
사심 가득한, 역사왜곡에 가까운 폭거였다.
내 딸이 그만큼 야심차게 쓰고 싶었던 게 정말 이 활자혼합물이란 말인가.
어렵사리 제목을 알아내서 찾아봤는데 글의 상태가 하나부터 열까지 총체적으로 난국이었다.
그래도 연재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치고는 댓글은 많이 달려 있네. 추천은 몇 개 없는데.
댓글 페이지로 들어가 봤다.
거의 스무 개 가까이 됐는데, 들어가 보니······.
“아이고.”
절반이 지현이 댓글이었고, 그나마도 읽어준 독자들과 댓글로 일기토를 벌이고 있었다.
<천마가 여자? 여주물 거름 ㅅㄱ>
ㄴ여주물이면 안 되나요?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네요. 하차합니다.>
ㄴ철저한 고증과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함부로 폄하하지 말아주세요.
ㄴㅋㅋㅋㅋㅋㅋㅋ 무슨 경험? 혹시 천마 역할극 같은 거 했어요?
<아 ㅋㅋ 솔직히 작가님 이거 웃기려고 쓴 거죠?>
ㄴ진지한데요? 어디가 웃긴지 저한테 알려주시겠어요?
<이거 글이 이상함. 무공 설명하는데만 무슨 한 화의 절반을 쓰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글에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필력은 개허접한데 한자는 또 오지게 많이 씀 ㅋㅋㅋㅋㅋ>
ㄴ사실적인 묘사가 이 글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밌게 따라와 주세요 ^^
“이 불쏘시개를 누가 따라가냐······.”
나니까 따라가지.
댓글을 달았다.
가만 보면 닉네임도 아주 가관이었다.
스카이 데빌. 하늘의 악마. 천마.
요즘 들어 생긴 습관성 두통이 또 반갑다는 듯이 찾아오는 걸 느꼈다.
띠링. 알림소리였다.
댓글 등록한 지 1분도 안 됐는데?
ㄴ감사합니다. 호흡이 긴 천마의 일대기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기대해주세요. ^^
지금 학교 수업시간일 텐데 이 기집애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대댓글을 달아?
한숨을 한 번 쉬고 휴대폰 화면을 껐다.
“수현 씨,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아닙니다. 그냥 딸애가 말을 좀 안 들어서······.”
“아, 딸 이번에 중학교 입학했다고 했지? 그럼 그럴 수 있지.”
직장 상사는 딱하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집 애도 사춘기 오고 얼마나 말을 안 듣던지. 아예 부르면 대답도 잘 안 했어.”
“그럴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뭐, 별 수 있나. 하고 싶다는 거 하게 해주면서 풀어놓았더니 나중에는 괜찮아지더라고. 우리 애가 순해서 그랬나?”
교육적으로 맞는 조언인지는 모르겠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온 거라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심성 착한 거로는 우리 지현이가 어디 가서 빠지는 애가 아니지.
근데 당신 자식은 이러진 않았을 거 아냐.
똑똑.
밥 먹으라고 노크를 했는데 대답이 없다.
애가 자나?
방문을 살짝 열었다.
맙소사. 지현이가 한 손에 리코더를 들고 이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저게 천마검법 3초식이었던가, 4초식이었나?
모르겠다. 아무튼 심각했다.
지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리코더 든 손을 팔랑거리면서 입을 우물거렸다.
“······아빠 제발 노크 좀 하고 들어오면 안 돼?”
그러면서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괜히 미안해져서 변명을 주워섬겼다.
“하긴 했는데······.”
“대답 안 했는데 그냥 들어왔잖아.”
“미안, 아빠가 미안하다.”
그렇지. 너도 누구한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을 텐데.
어색하게 말했다.
“지현아······, 소설 쓰니?”
“아, 몰라아. 집중하고 있었는데 아빠 때문에 흐름 깨졌단 말야. 책임져.”
지현이가 투덜거리며 볼멘소리를 했다.
우리 딸이 쓰는 소설 상태를 보아하건데, 깨뜨리기가 정말 천만다행이다.
“글이 잘 안 써져?”
“응. 이게 바로 창작의 고통이라는 건가.”
지현이가 처연하게 웃었다. 고독한 늑대같은 미소가 퍽 웃겼다.
“아빠. 대중들한테 보이기에는 내 글이 수준이 너무 높은 것 같아. 시대를 너무 앞서갔나봐.”
“······그래?”
“으응.”
“아무튼 밥 다 돼가니까 먹으러 나와.”
“그래놓고 다 되려면 한참이잖아. 이제 안 속거든? 지금 쓰는 부분만 마무리 짓고 갈게.”
30분이나 더 지나서 지현이가 지친 걸음으로 비척비척 거실로 나왔다.
된장찌개에서 소고기만 쏙 골라먹으면서 지현이가 말했다.
“아빠아. 나 스트레스 너무 받아서 그러는데에 만원만 더 결제해도 돼?”
결제는 해도 되는데 허락만 먼저 받으라고 했거늘 이건 허락하고 말고가 아니라 아예 통보형식이었다. 속에 천불이 올라서 답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다 해.”
“응. 알겠어!”
그게 그 뜻이 아닌데.
얼굴색이 급격하게 밝아진 지현이에게 물었다.
“근데 이제 어지간한 건 다 안 봤니?”
“연재 중인 건 다 봤구 나온지 몇 년 된 거 발굴 중이야. 지금 보는 건 천마재생이랑 천마님 던전 가신다! 천마재생은 천마 남장후의 인간적인 고뇌와 숙명을 다룬 수작이구, 천마님 던전 가신다는 천마 강천우의 호쾌한 액션이 돋보이는 멋진 작품이야.”
“아, 그러니······? 그거 참 재밌겠네······.”
“응. 엄청 재밌는데 아빠도 볼래? 나 아이디랑 비밀번호 알려줄까?”
“아니, 됐다.”
힘없이 거절하고는 밥을 한 숟가락 크게 우겨넣었다.
내 돈으로 내 딸애가 천마가 주인공인 작품을 결제해서 나한테 영업까지 하다니.
무림맹 입맹 동기가 삼대 천마의 일대기를 다룬 잡서를 보라고 건네줬을 때보다 더 충격이었다.
편견을 버리고 작품성만을 느껴보라길래 내가 그놈의 머리통을 가격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 안일한 편견부터 깨부숴줬는데, 딸애한테는······, 그렇게는 못하지······.
“아무튼 명작들 보면서 영감을 더 충전해서 써봐야겠어.”
“딸, 진짜로 작가 하려고?”
지현이가 반찬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으음, 일단은 좀 더 써보려구. 아니면 아빠, 있잖아.”
요즘 지현이가 무슨 말만 꺼내려고 해도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게다가 그 예감이란 게 대체로 잘 적중하는 편이다.
“나도 그냥 헌터나 할까?”
이런 젠장. 이번엔 아예 역대급이었다.
헌, 뭐요?
지현이가 검지손가락을 쭉 뻗었다.
티비 화면을 향해서였다.
S급 괴수 카라카 토벌 완료라고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웹소설 작가만 해도 골치가 아팠는데 헌터? 열네 살짜리 중학교 1학년이 허언터?
내 딸이 저런 괴물들이랑 드잡이질을 하고 다니겠다고?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내가 그 꼴은 못 본다.
목소리를 확 내리깔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왜 안 돼?”
“안 된다면 안 돼.”
“헌터하면서 현직 헌터가 쓴 웹소설이라고 광고도 하고, 진짜 저거 하나도 안 위험해. 내가 보니까 6문······, 이 아니라 6성이면 떡을 칠-”
이 바나나처럼 발랑 까진 기집애가 뭐가 어쩌고 저째?
“유지현. 이쁜말. 고운말.”
“아, 알겠어. 아무튼 내가 진짜로 내공, 그러니까 헌터로 치면 마나도 있거든? 지금까지 따로 수련은 안 해서 얼마 안 되기는 한데 모으기만 하면 금방이란 말야.”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지현이가 입이 댓발처럼 나와서 삐죽거렸다.
“진짜 생각도 안 해보고 안 된대. 솔직히 아빠도 비슷한 일하잖아. 헌터 관리.”
“그래서.”
“아빠가 봤을 때 헌터가 위험해, 안 위험해. 우리 진짜로 팩트만 가지고 이야기해 봐. 요즘은 헌터 사망률이나 교통사고 사망률이나 별 차이도 없어. 그건 아빠가 더 잘 알지? 그러면 봐, 내가 나중에 차만 안 사고 안 몰고 다니면 플러스 마이너스해서 쌤쌤이잖아. 안 그래?”
그게 무슨 기적의 계산법이냐.
내 딸이 벌써부터 수학포기자였던가.
더 듣다가는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씁, 어쩔 수 없지.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한 번만 더 이야기하면 아빠 진짜 화낼 거야. 엄마한테 전화해서 일러바치기 전에 빨리 밥이나 먹어.”
“아, 왜애. 진짜······.”
그래도 지 엄마는 무섭나 보네.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
레지스탕스의 꺼져가는 마지막 저항처럼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내 인생을 살 권리가 있는데······.”
맙소사. 내가 이 대사를 듣게 될 줄이야.
***
하지만 사태는 시시각각 악화되어 갔다.
지현이는 꿋꿋하게 연재를 계속 했다.
어떻게든 화력 지원을 해주려고 추천란에 추천글도 한 번 썼는데 지인 추천은 지인 추천이라고 밝히고 써야 한다고 욕만 더 먹었다. 어떻게 알았냐.
그리고 연재 회차가 쌓일수록 악플의 수위도 높아졌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시대의 갓작가 인정? 어 인정. 축하드립니다. 병맛 소설의 신기원을 열었네요 ^^>
<정작 작가 본인은 진지하다는 게 개그 포인트임 ㅋㅋㅋㅋㅋㅋㅋ>
<작가님 오늘 후기 뭐예요?
‘이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제가 느꼈던 고뇌를 그대로 담아 적었어요.’
무슨 고뇌를 느꼈다는 거임? 혹시 꿈꿨음?>
ㄴ믿기 싫으시면 믿지 마세요. 제가 전생에 천마였습니다.
ㄴㅋㅋㅋㅋㅋㅋㅋ 천맠ㅋㅋㅋㅋ
마침내 댓글 스무 개가 모두 조롱에 가득한 악성 댓글이었을 때, 지현이는 대댓글을 다는 대신에 공지를 하나 올렸다.
‘보여주고 증명하겠습니다.’
그 한 문장이 몹시도 불안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느낌이 쎄했다.
지현이는 잔뜩 굳은 얼굴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아빠, 나 오늘 어디 갔다 와야 해서 조금 늦을 거야.”
“어디?”
“그냥 잠깐 볼 일 생겨서.”
“딸, 지금 중간고사 기간 아냐?”
“아이, 내가 다 알아서 해애. 아무튼 늦으니까 먼저 밥 먹어.”
“그래, 알겠어. 일찍 들어와.”
퇴근하고 돌아오니 집 안이 싸했다.
싸늘한 공기가 피부를 감쌌다.
슬슬 여름인데 왜 이러지.
거실에 불을 키고, 대충 밥을 차려서 티비를 켰다.
응?
돌리는 채널마다 대문짝만하게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뭐야, 이거.
아나운서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국내에서는 세 번째로 마나 감응력 특급 각성자가 나타났습니다. 본인 요청으로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이 각성자는-”
앗, 아아······.
때로는 모든 추론 과정을 한순간에 뛰어넘어 알게 되는 진실이 있다.
반사적으로 뒷목을 잡았다.
게다가, 혹시라도 이걸 애 엄마가 알게 되면······.
난 이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