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월천각 날카롭게 섰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 보니 새벽 두 시였다.
몽롱한 기분이 가시지도 않은 차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이마를 감싸쥐었다.
“후······.”
요즘 매일 악몽을 꾼다.
딸애가 자기 전생이 천마라고 말한 그날부터 매일.
첫날은 지현이와 정마대전을 벌였다.
나는 추리닝 입고, 지현이는 중학교 교복 입고 하루 밤낮으로 일천 합을 겨뤘다.
초식을 나누는 중간중간에 ‘아빠, 그때 왜 냉동고에 넣어둔 아이스크림 맘대로 먹었어!?’ ‘너는 밥 먹었으면 설거지라도 좀 해라!’ 같은 추한 대사를 주고받았던 건 잊고 싶은 기억이다.
아니, 근데 솔직히 말해서 애가 설거지를 인간적으로 너무 안 한다. 내가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그게 불만이긴 했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보면 개꿈도 이런 개꿈이 따로 없었다.
둘째날은 극적으로 화해 무드에 접어들어 탁자에 마주앉아 협상을 했다.
배상금이 어쩌니저쩌니 했는데 단위가 금자나 은자가 아니라 한국 돈이었다.
둘째날은 연륜을 발휘해 내가 이겼다.
그리고 오늘 악몽.
······이건 진짜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물이나 한 잔 마시려고 부엌으로 향했다. 이미 지현이가 콜라를 한 컵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어? 아빠, 왜 일어났어?”
“자다가 깼지. 딸은 왜 안 자고 있어.”
“응? 나도 자다가 깼는데?”
이게 어디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이야.
시뻘겋게 퀭해진 가운데서도 말똥말똥한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기집애 지금까지 휴대폰 액정만 쳐다보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추궁을 해볼까 하는데 지현이가 졸린 티를 억지로 꾸며내며 가짜 하품을 했다.
“아휴, 졸려. 아빠 나 다시 들어가 잘게. 아빠도 자.”
“······일찍 자.”
“자고 있었다니까?”
입 삐쭉 내밀고 대답하는 모습이 몹시도 탐탁지 않았다.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하는 걸 보자니 역시 그 천하의 악질 같은 마교 교육의 영향을 받은 느낌도 없지 않아······, 아냐. 아니지.
이 착한 애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어.
그냥 안타까울 뿐이다.
내가 먼저 지현이를 알았다면 누구보다 빛나는 정파의 여협으로 키웠을 텐데.
지난 일을 어떻게 할 수는 없고, 지금이라도 잘 길러내야 했다.
하지만 요즘 지현이가 나를 피하고 대화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
보통 지현이와 둘이 있으면 집이 조용할 순간이 별로 없다. 같이 게임을 하거나 예능 보면서 수다 떨거나, 내가 과일을 깎거나, 내가 밥을 차려서 먹이거나, 수고는 주로 내가 하지만 아무튼 그런 식이다.
한데 이틀 전부터 좀 이상했다.
“다녀왔습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그리고는 곧장 쇼파에 드러누워 휴대폰만 보면서 키득거린다.
도대체 뭘 보고 있는지 웃다가 또 표정이 심각하다가, 급기야는 눈시울까지 시뻘게진다.
“딸, 뭐해?”
“응? 그냥.”
그냥이란다. 그냥 왜 웃다가 정색하다가 울려고 하는데.
아파트 앞 베란다 쪽으로 걸었다. 여기선 내가 뭘하든 지현이한테는 안 보이는 사각지대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발놀림으로 누워 있는 지현이 뒤통수로 다가갔다. 내기에 이겨서 얻어배운 화산경신 암향부동暗香浮動이 이럴 때는 쓸 만했다.
한데 내가 간격 안까지 들어가자 뒤에 눈이라도 달린 듯이 지현이가 휴대폰 각도를 스윽 조정했다. 나풀나풀한 손동작이 눈에 익었다. 저거, 저거 금나수 쓰는 거 보소.
“아빠, 왜?”
“딸 뭐하나 싶어서.”
“그냥 좀.”
후우.
며칠을 지켜봤지만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다.
“지현아.”
“아, 왜애. 왜 그러는데.”
“유지현.”
“······?”
“너 잠깐 아빠 좀 보자.”
목소리가 살짝 내리깔리니 지현이가 흠칫하고는 내 얼굴을 바라봤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걱정 비슷한 것이 어렸다.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지만 다잡고는 재차 말했다.
“빨리 쇼파 밑으로 내려와.”
“히잉.”
투덜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안다. 저건 겁나서 괜히 짜증부리는 척하는 거다.
“유지현.”
“······왜.”
“아빠가 왜 불렀는지 알아, 몰라.”
“······알아.”
“너 요새 밤에 잠도 안 자고 새벽까지 휴대폰만 보고. 아빠 말에 대꾸도 안 하고, 응?”
“아아니. 그냥 글 같은 거 보고 있어.”
이게 뭔 소리야.
“글? 무슨 글.”
“그냥 그런 거 있잖아. 소설 같은 거.”
갑자기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혹시,
“지현아. 너 요즘 판타지 소설 같은 거 보니?”
“아니. 판타지는 아니구······.”
오, 맙소사.
차라리 판타지 소설이기를 바랐건만.
“그럼, 혹시 무협?”
“······응.”
“그, 저번에 말했던 거. 천마 나오고 그런 거?”
지현이가 대답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젠장. 벌써부터 주화입마가 오려고 한다.
지현이가 떠듬떠듬 변명을 했다.
“그, 요즘 많더라구. 보다 보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재밌기도 하고······. 그래서 좀 많이 보긴 했어.”
오후에 집에 와서 새벽까지 봤는데 좀 많이 정도가 아니지. 모르긴 몰라도 학교에서도 계속 봤을 것 같다.
그때 퍼뜩 생각난 게 있었다.
“근데 요즘은 어지간하면 돈 내고 보는 거잖아.”
‘돈 내고’ 라는 대목이 나오는 순간 지현이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격하게 흔들렸다.
“응. 그, 렇지?”
“그럼 어떻게 했어?”
“그게······, 아빠한테 미리 말하려구 했는데······. 내가 결제를 몇 번 하긴 했거든? 뒷부분 너무 궁금한 데서 끝나가지구······.”
“결제 얼마.”
지현이가 열 손가락을 다 폈다.
“만원?”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십만원······.”
간신히 진정시켰던 기맥이 다시 들끓어 오른다.
“너 한 달 용돈 얼마야.”
“십만원.”
“이번 달 지금까지 얼마 썼어.”
“칠만원······.
나는 단호히 부정했다.
“아니지. 십만원 결제했으니까 십칠만원 쓴 거지. 아빠 말이 맞아, 안 맞아.”
“맞긴 한데······.”
지현이의 표정이 흡사 나라라도 잃은 것처럼 절망에 물들었다.
“다음달은 용돈 삼만원만 받아.”
“아, 아빠! 나 그걸로는 매점도 못 간단 말야. 왜 그래애.”
어깨 붙잡고 부비적거려봐야 전혀 안 통한다는 걸 오늘이야말로 가르쳐줘야 했다.
내가 묵묵부답이자 지현이는 제 딴엔 다른 카드랍시고 외쳤다.
“아빠, 잘 생각해봐. 이거는, 그러니까, 맞아! 학원비 비슷한 거야.”
“학원비?”
“아, 수업료라고 해도 되겠다.”
불길한 예감이 더할 나위 없이 커져갔지만 어렵사리 되물었다.
“무슨 수업료.”
“아빠가 진짜로 잘 몰라서 그러는데 요즘 웹소설 시장이 엄청 커졌거든. 잘 쓰면 한 달에 천만원도 금방이야. 와, 안 믿네? 진짜라니까?”
속으로 금강부동신공을 필사적으로 되뇌기 시작한 게 그 시점부터였다.
“그래서, 그게 우리 딸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아니, 좀 막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하지 말구, 진지하게 들어, 좀.”
“알겠으니까 말해.”
“잘 들어 봐. 내가 웹소설 이거 조금만 감 잡고 쓰기만 하면 월천 금방이라니까? 아빠 월급보다도 더 많아.”
느닷없이 날카로운 공격에 조금 더 마음이 아파왔다.
지현이는 내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진 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설득했다.
“봐. 내가 그, 요즘 말하는 중고 같은 신입? 완전 그거잖아. 솔직히 내가 각잡고 경험 살려서 쓰기만 하면, 무협 나보다 잘 쓸 사람 없을걸? 한 십 년치만 풀어도 그게 책으로 다 몇 권이야. 아, 고구마 너무 많으면 안 되니까 좀 각색해서 결말도 해피엔딩으로 바꾸고. 응?”
쓰다 보면 마교의 인식 개선도 될 수 있을 거라면서 지현이는 희망에 가득찬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냥 필사적으로 금강부동신공만 되뇌었다.
열네 살짜리 내 딸의 장래희망은 경험을 충실히 살린 웹소설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