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2화 (2/130)

2. 느그 사조부 십만대산 살재?

뇌가 정지한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오늘 아주 큰 깨달음을 얻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딸을 바라봤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어떤 간절한 빛을 담고 마주 나를 응시한다.

유지현. 열네 살.

올해 중학교에 입학했다.

나랑 닮은 구석은 없지만 귀엽다.

아니지. 자세히 보면 눈이랑 머리카락 색이 나랑 같은 검은색인 게 꽤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귀엽다.

이 천사 같은 애가 천마라고?

내가 천마 몇 명 봐서 아는데 대저 천마라는 것들은 모두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놈들만 데려다 뽑는지는 내가 싸움날까봐 차마 못 물어봤다.

그런데 내 딸 지현이가 천마?

물론 행복회로를 혹사해 보자면, 아닐 수도 있다.

어제 학교에서 천마 나오는 무협소설을 보고 확 빠졌다던가. 그런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다.

근데 당장 내가 전생에 무림맹주였잖아.

그럼 딸이 천마일 수도 있지······.

지현이가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재차 말한다.

“아빠 왜 말이 없어? 혹시 나 정신 나갔다고 생각해? 그건 진짜 아닌데······.”

“아니, 아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 안 하지. 그냥 좀 당황스러워서.”

우선 평정을 되찾아야 한다. 속으로 소림사 금강부동신공을 외웠다.

어릴 적에 영웅대회 나갔을 때 땡중이 나만 알고 있으라면서 가르쳐 준 건데······, 너무 오래 까먹고 있었더니 가물가물하다. 구결이 이게 맞던가.

안 돼. 역효과다. 오히려 주화입마를 일으킬 것 같다.

구결 외우는 걸 중단하고 지현이에게 물었다.

“그······, 딸?”

“응.”

“아빠도 옛날에 무협소설 몇 권 봐서 아는데 천마라는 사람들 있잖아.”

“응, 응.”

“그거 순 나쁜 사람들 아니야?”

순간 지현이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절대 아니거든!? 우리가 나쁜 게 아니라 황제 꽁무니에 붙은 정파 그 새끼들이 쳐죽일- 아니, 아빠. 이게 내가 욕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그만······.”

지현이가 열변을 토하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설레설레 손을 저었다.

그래, 좋아. 한 걸음만 더 타협하자.

지현이가 천마라고 치고, 그게 꼭 내가 있던 세상의 천마라는 법은 없잖아?

뭐냐, 그거. 다중우주.

그런 거일 수도 있잖아.

“7대 천마 설운혜라고 내가 제일 싸움 잘했거든. 강호일통도 진짜로 거의 할 뻔했는데, 근데 아빠 지금 하나도 안 믿고 있지.”

“7대? 그러면 사부님도 있었겠네?”

“응! 그분이 6대셨는데 진가 성에 이름은 외자로 무武 자 쓰셨어. 멋있지 않아!?”

거 이름 한 번 더럽게 유치하네!

누가 봐도 멋있어 보이려고 자기가 지은 이름이잖아.

그런데 6대 이름이 진무? 내가 아는 6대는 그런 이름이 아니었는-

“자字는 하늘 천에 임금 군자 쓰셨어. 어릴 적부터 그렇게 더 많이 불리셨다고 하셨는데.”

앗, 아아······.

6대 천마 진천군 震天君.

그 새끼 내가 아는데 아주 악질 중에 악질인 새끼였다.

5대 천마가 협상할 때 한 번 자기 제자라고 데리고 왔는데 새파랗게 어린놈이 기껏 고기반찬 차려놓은 건 안 먹고 풀떼기만 처먹는 게 아닌가.

왜 고기를 안 먹냐고 물었더니 백만 교도들의 궁핍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고기반찬이 쉬이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일찌감치 채식주의자의 선구를 달리던 그놈.

느그 마교도가 백만 명씩이나 되겠냐는 당연한 의문은 차치하고서라도 아주 골 때리는 놈이었다.

아무튼 후기지수 시절에는 4대도 봤고, 맹주직 지내면서는 5대랑 지지고 볶고 죽어라 싸웠다. 지현이한테는 사조부가 되네.

느그 사조부 십만대산 살재? 내가 임마, 느그 사조부랑 그때도 임마! 비무하고! 협상도 같이 하고! 으이? 마 다 했어!

그것도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진천군 그 새끼는 나이 먹어서도 고기를 안 처먹었는지.

하지만 죽어도 못 물어보겠지.

그나마 진천군만 얼굴 봤던 게 불행 중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하마터면 딸이랑도 칼춤 한 번 거하게 출 뻔했네.

지현이는 오랜만에 옛 추억을 꺼내게 되어서 즐거운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봐. 이게 천마군림보 天魔君臨步 기수식이거든. 내가 옛날에는 진짜 발 한 번 구르면 지진 난 듯이 흔들리고 그랬다?”

왕년에 우리집에 금송아지가 열 마리도 더 있었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말투였다.

그걸 자랑처럼 말하는 건 아빠의 시선으로 봐도 좀 아니지 않나 싶은데······.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기수식에서 좌수의 높이가 한 치 정도 내려가 있다.

지현이 시대에는 저게 최신 트렌드였나? 내가 보기엔 좀 이상한 것 같은데 고쳐줄 수도 없고.

게다가 딸애가 내 앞에서 마교 무공의 기수식을 취하고 있는 걸 보는 게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내 얼굴이 갈수록 떨떠름하게 굳어지는 걸 느꼈나 보다. 가만히 냅두면 아예 발이라도 구를 것 같던 지현이가 급격하게 풀이 죽었다.

비틀비틀 기수식 자세를 풀더니 다시 밥그릇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안. 내가 아빠 입장이라도 이런 거 못 믿을 거야. 그냥 나는 아빠한테 비밀 같은 거 가지기 싫어서······.”

“아니, 지현아. 그게-”

“미안해. 괜히 이상한 소리해서. 밥 먹자. 김치찌개 맛있네.”

“알았다. 밥 한 그릇 더 먹을래?”

지현이는 잠시 고민하다니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했다.

“······응.”

“잠깐만 기다려 봐.”

“아, 근데 아빠.”

“왜?”

“좀 많이 퍼도 돼.”

“······알았다.”

한없이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지현이는 한 그릇을 또 더 먹었다.

한창 잘 클 때라서 그런가.

***

대판 싸웠을 때만 빼면 저녁 시간에 우리집이 이렇게 조용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지현이는 일찌감치 씻고 자기 방에 들어갔고, 나는 설거지를 끝내고 이제서야 침대에 누웠다.

원래 이 시간에는 거실에서 예능 프로그램 보면서 과일 깎아먹고 그날 있었던 일 같은 걸 이야기한다.

그걸로 하루의 피로를 푸는데, 갑자기 못하게 되니 몸이 확 지치는 게 느껴졌다.

가만 있어 봐. 지현이가 천마고 내가 무림맹주면 이거 30평짜리 우리 집에서 정마대전만 몇 번이 일어난 거냐.

심지어 대체로 내가 졌다. 이래서야 도저히 강호의 동도들을 볼 면목이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애가 어릴 때는 고기 먹는 걸 별로 안 좋아했지.

지금이야 없어서 못 먹지만 분유 떼고부터 유치원 다닐 때까지는 나물반찬이나 샐러드, 과일류를 더 좋아했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애가 입맛은 어른 같다고 그것도 귀엽다고 좋아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것도 진천군 그 새끼의 영향이 분명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네. 지만 처먹을 것이지 왜 애한테 강요를 해. 확 뒤질라고.

“하, 모르겠다.”

한동안 진천군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해졌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내일 출근도 해야 하니 오늘은 이쯤 해서 적당히 생각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 무림맹주 아빠가 있으면 천마 딸도 있을 수 있지. 평화와 화합의 시대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암, 그렇고말고.

무슨 문제 있나?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지만 않으면.

그리고 들킬 일도 없다.

무공 쓸 일이 없는데 어떻게 들켜.

세상이 던전이니 괴수니 떠들썩해도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

땅이 뒤집히고 찌를 듯이 높은 하늘 아래, 딸과 내가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누더기처럼 찢겨진 깃발이 여기저기 나부꼈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지현이를 멀리서 둘러싸고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다른 인간들은 다 내가 맹주 시절 때 최신으로 유행하던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나는 집에서 입는 추리닝, 지현이는 다니는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게 특이한 점이다.

어쨌거나 사소한 설정오류만 제외한다면 사뭇 비장한 장면이었다.

딸의 손 주변으로는 칠흑같이 검은 마기가 줄기줄기 흘렀다.

저거, 천마신공 저거. 딱 보니까 9성이네.

지현이가 말했다.

“아빠, 용서해요. 백만 교도들을 위해선······.”

그래도 내가 무림맹주니까 ‘천마, 오시오.’ 같은 대사를 쳐야 할 텐데 당황해서 이런 대답 밖에는 안 나왔다.

“야, 유지현! 네가 어떻게 아빠한테 이럴 수가 있냐!? 먹여주고 입혀줬더니 이게 은혜도 모르고!”

내 딸과 함께 보낸 행복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지현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내게 말했다.

“미안해요, 아빠.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지현이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처연한 미소가 짙어졌다.

직감적으로 얘가 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할 지 알 것 같았다.

아, 그건 좀······.

하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지현이의 입에서 삼류 영화 같은 대사가 흘러나왔다.

아빠는 무림맹주고, 저는 천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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