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251화 (251/251)

< 은하수를 여행하는 사람들(完) >

의식이 옅어져 간다. 오감의 전원이 차단된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세계를 이동하는 중입니다.]

아, 그랬지.

고맙다.

알려줘서.

[세계를 이동하는 중입니다.]

차원이동은 이제 조금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낯설었다.

몸이 붕 뜨는 듯한 부유감. 이게 무슨 감각인지 잘 모르겠다고? 자이로드롭 혹은 롤러코스터 익스프레스, 그도 아니라면 바이킹을 타본 사람이라면 날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차원이동 때 느끼는 감각은 그것보다 100배 정도 더욱 진하다는 게 조금 다르겠지만, 뭐 100배라고 해봐야 인간이 느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 게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갑자기 김치가 들어간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김치라면은 김치라면이지만, 겉절이 김치도 따로 준비해서 먹으면 정말 기가 막힌다. 아, 짜장면에 탕수육 찍어먹고 싶다. 사실 나 짜장면 안 좋아한다. 테일러가 좋아해서 하도 먹다보니 그냥 먹게된 거다.

이게 은근 신기하네. 테일러는 늘 말했었거든. ‘너 그거 처먹다보면 언젠가 정 붙어서 계속 생각날걸?’

실제로 그랬다. 자꾸만 짜장면이 생각이 났다. 새카맣지만 반짝거리는 윤기 가득한 꼬들꼬들 면발. 한 젓가락 딱 집어서······. 그딴 거 먹어서 뭐에 쓰나. 그거 먹을 바에 든든한 떡만둣국 한 사발 뚝딱 하고 말지.

그런데.

내가 왜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 거지?

차원을 이동하는 과정은 짧으면 1초에서 길어봐야 10초 안에 모두 끝나게 되어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뭔가 비정상적이다. 어째서, 차원이동이 이렇게까지 길게 느껴진단 말인가?

[세계를 이동하는 중입니다.]

번쩍!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떴고, 헛숨을 크게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아······!’

눈앞에, 우주가 펼쳐졌다.

끝없이 펼쳐진 은하수. 세상 어디로 시선을 돌리더라도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별자리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것들은 나에게 ‘아름다움’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자꾸만 별빛을 출렁였다.

철썩! 별빛의 파도가 내게 닿았다가 멀어졌다. 뿌우우!! 별들로 이루어진 흑등고래 한 마리가 별빛의 파도 위로 크게 떠올랐다가 저편으로 사라진다.

세상 모든 별자리가 나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었다.

예쁘다. 정말로, 예쁜데.

‘······우주가 원래 이랬던가?’

내가 아는 우주는 온통 새카만 공간에 불과했다. 밤하늘에 별자리가 많이 보이는 것처럼 느껴져도, 실제로 우주에 나가보면 별이 있는 공간보다도 그렇지 않은 공간이 더욱 많아서 아무것도 없는 어둠처럼 느껴지는 게 정상이란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는 별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말인가?

-······저 별들은 각각이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이 된 서담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 레이나? 레이나야?”

-그렇습니다. 서담. 오랜만이군요.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오랜만이라니. 우리 계속 함께했잖아.”

-그렇···지요······.

줄곧 함께했지만, 나는 그녀가 레이나라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레이나를 그토록 애타게 찾았는데, 그녀는 자신이 레이나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고 나는 그녀가 레이나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유서담과 레이나로서 하는 대화는, 정말로 오랜만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간······ 잘 지냈나 모르겠네.”

-저야 잘 지내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리면서 시작한답니다. 노트북도 나름대로 최신형으로 바꿔서 쓰고는 있어요. 후후, 제가 그걸 잘 다루지 못해서 성능은 의미가 없지만요.

“그렇구나. 하하···.”

-신기한 거 알려드릴까요?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제게 흘러들어온다는 거요. 이곳에서 일하면서 저는 굉장히 많은 세계를 볼 수 있었고, 슬픈 이야기나 행복한 이야기를 모두 알 수 있게 되었어요. 가끔은 막장 로맨스를 보면서 분통이 터질 때도 있지만요.

정말로 별것도 아닌 이야기들이었다. 친구들이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들. 나는 레이나와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행복했고.

어쩌면, 이게 그 마지막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퍼졌다.

레이나는 한동안 자신의 근황을 늘어놓았다. 내 근황은 이미 잘 알고 있을 테니 나는 그저 경청하였다.

그녀는 애써 기쁜 듯 이야기를 이어갔고, 어느 순간 말이 뚝 끊어졌다.

그러더니.

-······당신은 곧 이야기의 공백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알아. 내가 멀리 떨어지면, 더 이상 ‘스토리’는 진행되지 않잖아.”

죽어도 안 된다. 그렇다고 살아있어도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 살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로, 이렇게 영원히 떠도는 것.

이제 이 세상에 주인공은 나밖에 없다. 다른 주인공들은 모두 ‘서브 주인공’일 뿐이고, 그들로 인해서 세상이 멸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업을 모두 받아내었으니까.

“이대로··· 주인공으로서의 존재감이 옅어질 때까지,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되는 거야. 문제없어.”

-······.

하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까.

-수천, 혹은 수만 년을 더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당신의 존재는 이미······.

“상관없어. 난 이미 충분히 행복했거든.”

-그렇···습니까.

레이나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서둘러 물었다.

“지구는 어떻게 됐어?”

-다행스럽게도······ 헬 게이트의 침공을 완벽히 막아냈습니다. 당신이 아직 살아있기에, 「살아 돌아올 유서담을 기다리며, 헬 게이트에게서 승리한다」라는 개연성이 진행된 것이지요.

하지만 그 이후의 스토리는 결코 발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 돌아가야만 다음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이 세상은 개연성을 소모하지 않아도 좋다.

이미 나는 지구에 많은 것을 남겨두고 왔다.

마법과 과학. 그리고 나를 기억해주는 수많은 인연들. 내가 이렇게 사라지더라도, 나를 사랑해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너무나 사무치도록 행복했다.

그거면 충분하다. 조용히, 전장의 끄트머리에서, 하급의 괴수에게 죽임을 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하찮은 F랭크의 헌터치고는 과분한 인생을 살지 않았던가.

더 많은 행복을 바라서는 안 된다. 그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 테니까.

-마지막으로······ 여태 함께했던 동료들을 보시겠습니까?

“······.”

아니, 라고 대답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니 레이나가 홀로그램 스크린을 띄워주었다.

가장 먼저 나타난 사람은 역시나 테일러였다.

그녀는 배멀미도 있는 주제에 태평양에서 여전히 떠나지도 않고 하염없이 뱃머리에 앉아서 사라져버린 헬 게이트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헬 게이트가 완전히 닫히기 직전 내가 그 구멍을 통해 나타났어야 하는데.

그렇질 않으니, 그녀가 안심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꾸벅꾸벅 졸다가도 화들짝 깨어나 다시 헬 게이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고, 그러다 이내 유성우가 떨어지는 밤하늘을 보면서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도 보여줘.”

다음으로는 예카테리나였다. 예카테리나의 사무실에는 내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있었다. 떠나기 직전에는 없었는데, 걸어놓은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그녀는 사라져버린 나라는 존재에 대해 슬퍼하기도 전에 쏟아지는 업무에 치여 살고 있었다.

짙게 드리운 다크 써클이 그것을 증명한다. 예카테리나는 문득 사무실의 구석에 틀어져있는 TV에 시선을 돌렸다.

-치직! 속보입니다! ‘이면 세계’에 숨어 살던 헬 게이트의 괴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무림맹 측에서 발빠르게 대처를 하고 있지만, 전 세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바람에······!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자면, 헬 게이트의 잔존 괴수들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라는······.

하. 그러고 보니 이면 세계가 남아있던가. 헬 게이트의 잔류 찌꺼기와도 같은 그곳은 여태 무림맹이 도맡아서 하나씩 처리하고 있었는데, 헬 게이트가 사라지자마자 아예 폭주를 하고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저놈들은 어디까지나 잔존세력에 불과했으니까.

아마도, 여기서도 어나더 리그는 큰 활약을 보이며 세계적인 길드로 발돋움을 하겠지.

그 외에도 어나더 리그의 또다른 길드원들이 보여졌다. 하선영이나 검술 사범들, 마법 연구원들이나 정령들까지. 저들 나름대로 잘 지내는 것으로 보였기에 안심이 되었다.

“누님을 보여줘.”

화면에는 설중연 누님이 나타났다. 여전히 노을진 설산을 닮은 백금발을 찰랑이며, 그녀는 전장의 선두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름답고, 찬란했다.

감히 ‘주인공’이라는 존재 따위가 삶을 구속하고 마음을 빼앗을 정도로 그녀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내가 없더라도, 누님은 살아갈 이유를 만들 것이다.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문제없다. 시체를 처리하거라.

-명!

검끝에 묻은 피를 흩뿌린 누님은 전장을 종식시킨 뒤 조용히 뒤돌아섰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표정에 아무런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공허한 눈동자 때문에, 인형같던 외모가 한층 더 인형처럼 보였다. 저렇게 가만히 있으면 정말 잘 만들어진 예쁜 마네킹이구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눈가에도 다크서클이 살짝 드리워 있었다. 현경의 고수라면 어지간해서는 피곤할 일이 없을 텐데······.

-맹주님. 이제 그만 쉬세요 제발! 벌써 석 달째입니다. 제아무리 현경의 고수라고 하셔도, 그러다 정말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신혜지가 나타나더니 누님을 다그쳤다.

석 달이라고?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단 말이야?

-······글쎄. 죽는다면 그게 내 운명이겠지.

-맹주님 제발 그런 소리는 하지 마세요······.

그녀가 잘사는 것처럼 보였던 건, 내 착각이었다. 누님은 제대로 살아가고 있지 못했다. 나를 잊지 못해서.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으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온전히 내 선택이었으니까.

슬픈 눈으로 노을을 등지고서 쪽잠을 청하는 설중연 누님을 마지막으로, 화면을 돌려버렸다.

-···서담. 다른 세계도 보시겠습니까?

“응······.”

화면에는 어느 거대한 나선형의 세계가 나타났다. 스테이지를 오르며, 성좌들에게 방송을 해야만 하는 ‘더 아라슈’의 세계.

어쩌다 보니 내가 도와주게 되었던 4인방이 화면에 등장하였다. 그들은 어느 트로피를 거머쥐고 있었다. 마침내, 50스테이지를 모두 클리어하고 만 것이다.

-소원을 빌거라.

-우리의 소원은······ 인간들의 세계를 다시 되돌려줘. 예전처럼, 평화롭게 살아가던 그 시절로.

-허, 성좌가 될 수도 있다. 강력한 힘을 얻어서 모든 인간들의 위에서 군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말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되돌리겠단 말이냐?

-그래. 그것이 줄곧 우리들의 목표였으니까!

-······그렇다면, 좋다! 돌아가거라, 너희들이 원하는 세계로.

쨍그랑! 세계가 깨어지는 것으로 화면이 종료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소원을 이룬 것이다.

“하··· 저 친구들 처음엔 어리바리했는데, 기어코 저걸 해내네.”

다음으로는 몽환의 섬이 나타났다. 마릴렌과 사릴렌. 앙숙의 사이였던 그녀들은 이제는 그 누구보다도 친한 자매로서, 정령술을 발달시키며 섬들간의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뛰어난 재능 덕분일까. 다른 그 어떤 섬에서 쳐들어와도 모조리 막아낼 수 있었다. 그 어떤 침공조차 허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천혜의 요새. 그것이 바로 몽환의 섬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무림의 세계였다.

그곳의 주인공이 된 백소휘. 그녀의 사명은, 세계에 남아서 무림을 혼란으로 뒤덮는 악마들을 모조리 처단하는 것.

그녀는 그 어떤 주인공보다도, 심지어 나보다도 더욱 강력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주인공의 운명을 거부했던 여자였으니까.

만약 저 여자가 내 자리에 있었더라면, 많은 게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백소휘의 앞에는, 붉은 뿔 달린 거대한 악마가 쓰러져 있었다. 태산보다도 높았고, 바다보다도 넓었으며, 용암보다도 뜨거웠던 대악마 ‘라그레지온’은 하늘보다도 청명한 백소휘의 마지막 일격에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백소휘! 우리가 해냈어! 마지막 악마를 쓰러뜨렸다고!

-그래······.

백소휘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검이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그 검의 이름은 량혼. 귀여움을 담당하는 마스코트이자, 백소휘의 마음을 달래주는 인도자였다.

-그동안,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량혼. 너와 함께 싸울 수 있어서 나에게는 정말 행운이었다.

-후후. 이제야 내 진면목을 알아봤구나? 그래서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거야?

-이젠······.

백소휘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말했던 세계로 가야겠지. 이제 이 세계는 내가 남아있을 수 없어.

그것을 마지막으로 화면이 종료되었고, 나는 또다른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새삼 느꼈다. 나는 정말로 수많은 세계를 여행했었구나. 그리고 그곳에서 정말로 많은 인연을 맺었었구나.

나를 찾기 위해 튜토리얼의 탑을 다시 오르는 말레아, 헬스 프린세스의 세계에서 어엿한 황녀가 된 예리나, 완전히 대마법사가 되어 세계를 구원하는 데에 성공한 엘레임까지.

그러나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인연들이었다.

나는 그저 저들을 기억하고 또 추억하며, 그렇게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치직!

화면이 흐려졌다.

-서···담. 너무 멀어졌···니다. 더 이상 목소리가 닿질······.

“······레이나. 그동안 고생 많았어.”

레이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에 서글퍼졌으나 애써 웃어보았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 쉬도록 해.”

-······감사했습니다, 유서담.

그렇게.

레이나의 목소리마저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계에서, 별자리들마저 점점 더 내게서 멀어져만 갔다.

공간은 새카맣게 물들었고, 더 이상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볼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시각이라는 감각은 중요치 않았으니까.

나는 두 귀를 닫았다. 들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청각이라는 감각은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생각을 되풀이하기로 했다. 언젠가, 수만 년이 지나 내 주인공으로서의 업이 모두 사라졌을 때에도 나라는 존재를 잊지 않을 수 있도록.

‘하하··· 그때가 되면 이미 돌아가기에는 늦었으려나.’

시간과 공간과 이야기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되돌아갈 수 없는 행복했던 추억을 회상하며.

나는 그렇게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 完]

[지금까지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직! 칙!

······쿵!!

“어···?”

무언가가 찢어졌다. 요란한 굉음에 눈을 뜨자, 새카맸던 공간이 어떤 새하얀 기둥으로 인해 무너져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어둠은 조각조각 파편이 되어 흩날렸고,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별자리가 되어 아무것도 없던 이 공간을 밝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라셀리가 양손으로 공간을 억지로 찢어발기며, 힘겹게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교수님.”

“아라···셀리······?”

그녀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귀여운 기합과 함께, 마침내 공간을 아주 크게 열어젖혔다. 나라는 자그마한 존재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직하게도 말이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어, 어?”

아라셀리가 허공에 발을 내딛자, 반짝이는 공간파편이 이어지더니 나에게 연결되도록 다리를 만들었다.

사박, 사박.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빛의 파장이 퍼져나가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교수님이 어디에 있든······.”

그러면서,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제가 찾아가겠다고.”

“아······.”

그에, 나는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억지로 지으며 마주보며 웃어주었다. 그녀의 손을 마주잡으니, 갑작스레 세상이 회전하였다.

사라졌던 별자리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저 멀리 반짝이는 별들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거 아세요? 이 세상에는 정말 많은 세계가 있고,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도 많다는 걸요.”

“······그건 몰랐어.”

“지금부터, 함께 그런 곳을 여행하며 ‘업’을 지우는 거예요. 길거리에서 꼬치도 사 먹고, 가끔은 뷔페식도 먹어보고, 가끔은 거지처럼 흙탕물에서 뒹굴어도 보고, 가끔은 황제가 되어서 제국을 다스려도 보고. 그렇게, 저 별들을 모두 여행하는 거예요.”

또각!

그리고 뒤늦게, 깨어진 공간에서 또다른 누군가가 걸어들어왔다. 별자리보다 더욱 반짝이는 은색의 머리카락을 화려하게도 휘날리며, 사하르 공녀는 우아하게 걸어오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아라셀리와 사하르 공녀는 우리가 앞으로 떠날 별자리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요.”

나는 마주보며 웃는 것으로 화답했고, 이내 그녀들은 내 손을 잡았다.

끝없이 펼쳐진 저 은하수를 향해 떠나기 위해서.

[完]

< 은하수를 여행하는 사람들(完) > 끝

< Epilogue 완성된 세계 >

유서담이 헬 게이트와 함께 사라진 이후로, 육 개월이 흘렀다.

통상적으로 헌터가 던전 및 균열 너머에서 육 개월간 실종된 채로 돌아오지 않으면 ‘사망’처리가 된다.

쏴아아아!!

유난히도 소나기가 추적추적 쏟아지는 초여름.

[세계를 구한 영웅, 유서담을 추모하며]

슬픈 날에 비가 오는 건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이 또한 이야기의 흐름에 의해서일까.

유서담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장례식은 쓸데없이도 거창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세계적인 거물들이 모여서, 전 세계 국가로 실시간 중계를 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의 마지막만큼은 그 어떤 허례허식에서 벗어나, 조용히 치르고 싶었다.

“우산은 쓰고 계세요.”

“······.”

우산조차 쓰지 않은 채 소나기를 맞으며 서있는 테일러의 머리 위에 예카테리나가 장우산을 씌워주었다. 테일러는 그런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멍하니 유서담의 묘비를 바라보았다.

[2020~2054]

[유서담]

[내가 죽으면 제사상에 떡만둣국을 올려줘]

[콩자반도 같이]

묘비에는 유서담이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던 농담이 그대로 적혀있었다. 테일러의 의견이었다.

그 어린 시절, 전장에서 그와 등을 맞대며 싸울 때.

혹시나 자신들이 죽게 된다면, 각자의 묘비에 멋있는 명언을 써주자고 농담삼아 말한 것이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명언이랑 비슷한 걸 적어줬으면 좋겠는데.’

‘아인슈타인?’

‘그래! 오직 남을 위해 산 인생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이거 알아?’

‘알긴 아는데······ 그걸 그대로 베껴 쓰려고?’

‘당연히 아니지. 조금 변형해서 써줘.’

소년 유서담은, 그때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오직 나를 위해 산 인생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뭐야 그게. 완전 나쁜놈 같잖아.’

‘남을 위해 살아서 뭐에다 쓰는데? 당장 내가 배고파 죽겠는데.’

‘그건······ 맞는 말이긴 하네?’

테일러와 유서담은 그런 농담을 나눈 뒤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그때를 생각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그 말대로, 마지막까지 이기적으로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냐고······.”

유서담은 헬 게이트와 함께 소멸되기를 택했다. 대체 어떻게, 그리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이제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테일러 나인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건 별로 힘들지 않았다. 그저 이곳을 외면하고 돌아서면, 그때 다시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서, 그게 너무나도 힘들었다.

툭, 투툭!

소나기는 그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왕래하는 사람은 눈에 띄게 적어졌고, 그녀처럼 몇날며칠이고 남아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우산이라도 쓰고 있는 게 어떻겠는가.”

“······며칠 전에도 똑같은 소리하던 흰둥이가 하나 있었는데 말이죠.”

테일러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답했다. 우산을 씌워준 설중연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둘은 우두커니 서서 한참이나 묘비를 바라보았고, 테일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저 개자식을 잊을 수 있을 것 같나요?”

설중연은 말없이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그랬다면, 무림맹주를 그만두지는 않았겠지.”

유서담의 죽음이 확정된 장례식 당일.

설중연은 무림맹주를 그만두었다.

애초부터 유서담이라는 단 한 명을 위해서 해왔던 일이었다. 그러니 그가 없는 지금 와서 무림맹주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갈 건가요?”

“글쎄······. 살아간다는 게 이제는 뭔지도 잘 모르겠구나.”

“저도, 저도······ 그래요. 왜, 좀 행복해지려니까, 그렇게 좀 잘 살아보려니까, 저렇게 가버려야 되는 건지, 저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

테일러는 조용히 흐느꼈고, 설중연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눈물은 슬픔을 씻어내기 위해 흐르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너무나도 많이 울었고, 너무나도 많은 슬픔을 토해냈다.

정말로 한참이 지난 후에야, 테일러는 다시금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설중연은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이젠······ 됐어요.”

“다 떨쳐냈느냐?”

자기 자신도 전부 떨쳐내지 못한 주제에, 남을 배려하는 꼴이라니. 설중연도, 자신도, 모든 게 우스웠다.

아마도, 평생 못 떨쳐내겠지.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자신이라고 해서 유난히 이상한 건 아니다. 그녀는 그리 생각하며 설중연에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허세라도 한껏 부려보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오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어, 어······?”

찰랑이는 금색의 머릿결과 꿀물을 뚝 떨어뜨린 듯한 금색의 눈동자. 비록 흑정장을 입고 있었음에도 온몸에서 황금색의 광휘가 반짝이는 그녀는, 틀림없는.

“······레이나?”

그 이후의 행동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테일러는 자신도 모르게 레이나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고, 그녀 역시 슬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너, 너······ 레이나 맞지? 레이나, 주. 맞는 거냐고······!”

“······오랜만입니다. 나도 만나서 반갑군요. 테일러.”

“네가, 네가 어떻게······.”

“이거 놓고 얘기하지요.”

그에 정신을 차린 테일러는 멱살을 놓고서 뒤로 물러났다. 뒤늦게 달려온 설중연 또한 당황한 눈으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가끔이지만,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유서담이 보여주고는 했는데, 그때 봤던 레이나와 똑 닮은 여인이 이 자리에 서있는 게 아니던가?

“대체······ 네가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너무하군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한다는 소리가 그거라니.”

“빨리 대답해!!”

쿵! 그녀가 소리치자, 일대에 자그마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레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예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럼, 설마······. 그 자식이 헬 게이트로 쳐들어가서 너를 구해낸 거야······?”

“···네. 맞습니다.”

“그, 그럼 유서담은? 그 새끼는 어떻게 됐는데?!”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에 테일러는 물론, 설중연의 눈동자 또한 거친 파도처럼 흔들렸다.

“죽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대체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설명해줘. 제발······.”

“······헬 게이트를 소멸시키는 데에 성공한 서담은, 두 가지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자신으로 인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겠느냐.

그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스스로가 사라지겠느냐.

서담은 스스로 사라지기를 선택했고, 지금도 레이나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의 공백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죽지만 않았을 뿐이지.

“······죽는 것보다 더한 꼴을 당했다는 거네.”

마지막 미련에 단두대를 내리꽂아 버리는 레이나의 확언에, 테일러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럼······ 찾을 수는 없는가?”

“저 또한 찾고는 있지만······ 불가능합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거야······?”

레이나는 침울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답했다.

“만약에 있다고 하더라도, 유서담이 다시 돌아오는 건 불가능합니다.”

“······내가 찾아가면 되잖아. 그것도 안 되는 거야?”

잠시 고민해보았지만, 역시 안 된다. 차원 이동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다.

유서담의 위치를 알지 못해서였다.

“그래······ 알았어. 미안, 너도 슬플 텐데 추한 모습을 보여서.”

“······아닙니다.”

테일러는 뒤돌아 힘없는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레이나는 슬픈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설중연은 레이나에게 목례를 하고서 그녀의 어깨를 지나쳤다.

“······아주 만약, 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휘이잉···! 불어오는 비바람과 함께 자취를 감추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내게도 꼭 전해주시오.”

모두가 떠나고.

장례식장에 남은 사람은, 이제 레이나 단 한 명밖에 없었다.

*

레이나의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태양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을 열어젖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으음······.”

눈부신 하늘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리고서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선 무방비하게 하품을 쩍, 하다가 이곳을 바라보았다.

“···숙녀가 자다 깼는데 매너도 없이 그렇게 보고 계시는 건가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는 곧바로 작업실로 들어가 노트북을 펼쳤다. 어제 편집하다가 남은 것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

“이것도······ 연재 중지인가.”

이 세계에는 정말로, 아주아주 많은 주인공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주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어느 누군가가 주인공의 업을 모두 짊어짐으로써, 더 이상 개연성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그들 대부분이 주인공이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저 수많은 세상들에게는 주인공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건 긍정적인 현상이었고, 덕분에 레이나의 업무는 이제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럼에도 레이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벌써 9년째 계속해온 업무였기 때문일까, 버릇에 가까웠다.

9년 전, 2043년.

레이나 주는 ‘초거대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망 처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날 레이나는 죽지 않았다. 지구인들이 초거대균열이라고 알고있던 그것은 다름아닌 헬 게이트로 통하는 게이트였으니까.

그녀는 헬 게이트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육체가 모조리 썩어가는 와중에도, 필사의 정신력으로 꿋꿋하게 버텨낸 것이다.

그러던 레이나에게 손을 뻗은 자가 다름아닌 ‘헬 게이트의 의지’.

레이나가 장난삼아 ‘사장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는 레이나라는 존재를 매우 신기해하며, 자신의 계획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일단 당장은 살고 봐야 했기에 레이나는 수락하였고, 이후의 계획을 듣고서는 머리가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정말 우연히도, 2년 뒤에 유서담이 헬 게이트로 찾아왔던가. 그의 수명은 이미 꺼져가고 있었고, 아마 그때 레이나는 결심했을 것이다.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왔으며, 또한 불행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그 남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자고.

비록 그 끝에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이렇게 죽는 것보다는 조금의 행복을 만끽하다가 가는 게 더 나은 삶이 될 테니까.

‘레이나? 흐음, 흥미롭네.’

헬 게이트의 의지는 레이나에게서 천천히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고 있었다. 아직은 어눌하고, 제대로 자신의 형상조차 만들지 못했지만 대화가 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도 저 남자가 마음에 들어. 너만큼이나.’

그 이후로 조금의 시간이 흘렀고.

“···아마도, 당신들이 아는 그 이야기가 펼쳐졌겠죠.”

「시한부 F랭크의 헌터 유서담, 특별한 기연을 얻어 승승장구하다!」

주인공으로 정해진 그 시점부터 유서담의 이야기는 이미 소설처럼 쓰여지고 있던 것이다.

나쁘지 않았다. 유서담은 사랑하는 인연과 믿을 수 있는 동료를 얻었고, 수많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더욱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레이나는 그것이 마냥 좋았다. 비록 그의 곁에 있을 수 없더라도, 그것 하나로 족했다.

“······.”

문득, 사장님이 떠오른 레이나는 커피를 내려놓고서 일어났다.

비록 사장님의 목표가 모든 세계를 멸망하여 통합하는 일이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행복할 수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은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끼익, 사장님이 잠들어있는 침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레이나구나.”

“이미 형체를 잃으신 겁니까.”

“그래······ 흉측한 몰골이 됐으니까, 보지는 말아줘.”

“저도 못생긴 건 싫으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하하. 너무하네 정말···.”

사장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서담을 닮아있었다. 하지만 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서, 침대 아래에서 그저 꾸물럭거릴 뿐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되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렇게 형체에 집착하는 겁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

“헬 게이트를······ 안정화하려는 겁니까?”

“하하··· 글쎄.”

헬 게이트는 미완성이다. 저 하늘의 태양조차도 모조품에 불과했으니까. 그 어떤 자연 현상도 없으며, 그 어떤 법칙도 없다. 그러한 것들을 가져오기에 시간은 터무니 없이 부족했으니까.

그래서, 유서담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너도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인간은 이기적이니까요.”

“나는··· 인간이 아니야. 그저 나를 위해서, 그랬을 뿐이지.”

“그래서, 인간이라는 겁니다.”

“뭐······?”

사장님은 이불 속에 숨은 채, 눈동자만을 돌려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나를 위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이기적인 마음으로 움직인다면······ 그럼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됩니다.”

“······그렇군.”

“네. 당신은 훌륭한 인간입니다.”

헬 게이트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제각각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이 사는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 한다.

“레이나······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글쎄요.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거 진짜 너무한 걸······.”

레이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더 이상은 그 어떤 세계조차 흡수하지 못하여, 헬 게이트의 디테일이 좋아질 리는 없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저 태양은 ‘진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레이나.”

“말씀하세요.”

“···만약 내가 사라지면, 너도 네 세계로 돌아가. 이곳은 이제 가망이 없어. 내 의지가 소멸되면, 이 세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다시금 퇴화해버릴 수도 있어.”

미완성의 세계.

이야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런 세계가, 의지조차 없이 존재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주인공’이 되어버린 유서담마저도 떠나버린 지금, 헬 게이트는 서서히 무너져내릴 것이다.

“······예.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흐. 흐흐···. 그동안 너한테는 많이 미안했다. 내가 너무 부려먹었지?”

“그건 괜찮은데 월급이 너무 짭니다.”

“···미안.”

그 순간, 레이나는 자신의 몸을 감싸고 도는 어떤 기운을 느꼈다. 그것의 정체를 깨닫고서,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세계와 세계, 그리고 또다른 세계가 연결되는 어떤 ‘길’이 레이나에게 선명히 느껴졌다.

그동안은 오롯이 사장님의 손을 빌려야만 사용할 수 있었던 바로 그 능력, 차원 이동의 열쇠였다.

“이, 이건···.”

“퇴직금이야. 내가 돈은 없어도, 이런 건 해줄 수 있거든······.”

“······감사합니다.”

레이나는 진심으로 그리 말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은 쿨럭, 거칠게 기침을 하더니 웃었다.

“······그럼, 행복하길 바라. 레이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불이 스르륵 내려앉았다.

사장님의 형체가 완전히 소멸된 것이다.

이 세계를 유지하던 ‘의지’가 사라졌다. 그것은 곧 세계의 죽음을 의미하는 바.

“······.”

레이나는 자신이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챙길만한 짐은 없었다. 아직 식지도 못한 아메리카노 한 잔과 그간의 노고가 담긴 노트북.

이 노트북에는 수많은 세계의 이야기가 들어있기도 했지만, 유서담과 언제나 함께할 수 있게 해주었던 연결 통로이기도 했다.

그녀는 언제나 이 노트북으로 유서담을 지켜보며, 그의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겠지만······.’

그리 생각하며 레이나는 무심코 노트북을 열었고.

[안   레]

[녕   이나]

“······어?”

웬, 이상한 문구가 노트북 화면에 떠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클릭하였다. 그러자 문구가 바뀌었다.

[잘  내고  니]

[  지      있  ?]

대체 이게 뭘까, 하고 의문을 가져보는 척을 해보았지만.

솔직히, 단번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서, 키보드를 천천히 두드렸다.

[유서담...?]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응]

이어서.

[나   잘 지       어]

[  는       내고 있]

라는 답이 돌아온다.

“아, 아아······.”

당황하는 것도 잠시, 그녀는 최대한 장문의 메시지를 적어서 보냈다.

나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으며, 사장님한테 해고를 당했고, 이제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그러나.

[미          로    수가]

[    해          을       어]

[  안   제대  읽       없]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그녀가 유서담의 말을 읽기 힘든 것처럼, 그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뿐.

‘너무, 멀어서······.’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레이나의 노트북 안에는 ‘모든 세상’이 담겨있다. 그 안에 유서담이 있다면 레이나가 모를 리가 없을뿐더러 대화가 이렇게 끊길 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모르는 또다른 세계가 있다면······.’

만약, 유서담이 떠난 장소가 이야기의 공백(空白)따위가 아닌.

새로운 이야기가 쓰여지고 있는 곳이라면.

‘유서담은, 살아있어!’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다.

그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레이나는 최대한 이 메시지의 흔적에 정신을 집중하였다.

유서담이 무슨 수를 썼는진 몰라도, 이쪽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조차도 아마 피를 토하는 고통일 것이다.

어쩌면, 여태 얻었던 대부분의 수명을 깎아먹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해가면서까지 이쪽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기회를 허투루 쓸 생각은 결코 없었다.

레이나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여 유서담의 흔적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없이, 새카맣게 펼쳐진 길 위로······ 아주 자그마한 반딧불이가 날아올랐다.

그것은, 유서담이 지나간 흔적.

아주 옅고, 또 옅어서 잠깐이라도 고개를 돌리면 사라져버릴 것 같지만, 저 옅은 흔적이나마 존재하는 덕분에 레이나는 그를 쫓을 수 있게 되었다.

‘갈 수 있어.’

노트북 위로, 마지막 메시지가 떠오른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

[모두, 함께]

그것을 마지막으로 유서담과의 통신은 끊어졌으나, 이미 반딧불이는 레이나의 황금색 눈동자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결코 길을 잃지 않겠다는 것처럼.

‘지금 당장 떠나야······.’

서둘러 채비를 하려던 레이나는 문득, 지구에 남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녀 자신 말고도 유서담을 찾고자 했던 이들은 수없이도 많았다. ‘사장님’이 주신 권능 덕분에, 몇 명 정도라면 그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도 가능할 터.

그런 생각에 사무실의 문을 박차고 나가려던 레이나는,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어라······?”

헬 게이트의 의지, 즉 사장님이 소멸됨에 따라 이 세계는 붕괴되어야만 정상이거늘.

어째서인지, 모든 게 그대로였다.

투둑, 툭!

“으아아! 비 온다!”

“아씨, 기상청에 그런 예보 없었잖아.”

“편의점 가서 하나 사야되나. 아 일회용 하도 사놔서 엄마가 뭐라 그러는데.”

거리의 사람들은 난데없는 소나기에 당황하여 뛰어다니기 시작하였다. 레이나 또한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게, 왜냐하면 이 세계의 소나기는 오롯이 ‘사장님’이 원할 때만 내리기 때문이었다.

불완전한 세계.

의지를 가진 존재가 다듬어주지 않으면,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았을 세계.

그런 세계가, 또하나의 ‘완성된 세계’로 자리잡고 있었다.

“설마······.”

레이나는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의 머리 위를 확인해보았다.

더 이상, 그 누구의 머리 위에도 ‘주인공 해시태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이 세상에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솜사탕이 젖었다며 우는 저 꼬마도, 사장님께 한 소리 들었다며 하소연하는 저 직장인도, PC방에 가서 게임이나 하자는 저 중학생도, 시험에 떨어져서 슬퍼하는 저 공시생도.

모두가 주인공인 것이다.

“하, 하하······.”

깨닫고야 말았다. 이 세상은 이제 더 이상 헬 게이트의 의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세계가 완성된 그 순간부터 불완전하지만 이 세상은 완성된 세계를 향해 천천히, 꾸준히 나아가고 있던 것이다.

주인공이 필요하지 않지만, 모두가 주인공이기에 비로소 ‘완성된 세계’.

‘사장님이 바랐던 세계가······ 사장님이 떠나고 나서야 완성되다니.’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켰다. 이제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세상이 ‘진짜’가 되었다면.

자신과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헌터와 몬스터와 던전과 초능력자와 대전쟁과 던전과 균열과 게이트가 존재하지 않는, 이 ‘또다른 지구’의 달력을 확인해본다.

[지구, 대한민국]

[2020년 11월 27일]

[오후 12시 30분]

“······.”

타닥, 탁!

그녀는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를 노트북에 업로드하였다. 과연 누가 보기나 할지, 본다고 해서 공감이나 할지,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영원히 그의 이야기가 남아서 떠돌아다닐 수만 있다면.

그래서, 이 또다른 지구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어떤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단 한 명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

[업로드]

그것으로, 족하다.

탁! 엔터를 누른 레이나는 분홍빛이 감도는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서 사무실을 뛰쳐나가려다 말고, 이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곳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점잖게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린다.

“그동안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pilogue 완성된 세계 > 끝

< 후기 >

안녕하세요.

부족한 글쟁이 은밀히입니다.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는 오늘 252화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완결되었습니다. 깔끔하게 이야기를 끝내지 못한 것 같아서 그동안 따라와 주신 독자님들께는 죄송한 마음밖에는 안드네요...

사실 이 소설은 처음 구상 당시에는 평범한 이세계물이었습니다. ‘주인공이 너무 많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해서 하나의 이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주인공들을 사냥한다는 내용이었는데 ‘하나의 세계에 주인공이 너무 많지 않겠냐, 차라리 이계를 왕복하는게 어떻겠느냐’라며 아는 작가님이 조언으로 인해 10화만에 리메이크를 결정, 내주살이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현대와 이계를 왕복하는 스토리를 시도해보았는데, 연재 초기에는 아이디어도 많고 남는 시간 내내 작품을 구상해가며 엄청 대단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독자님들께 소소한 재미를 줄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를 완성시킬 수는 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회차가 길어지면서 이계를 갈 때마다 매번 새로운 등장인물과 새로운 세계관을 짜야한다는 부담감과 아이디어의 고갈로 인해 현대와 이계 파트 모두 스토리가 엉켜 버렸더군요.

제 역량이 부족한 탓이겠죠...

여태까지 쓰면서 가장 집필이 어려웠던 소설이었지만, 그래도 꽤 보람찼던 도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원피스의 우솝이라는 캐릭터를 보고서 깊은 감명을 받아, 유서담이 각종 도구와 전략을 사용해가며 강력한 힘을 가진 적들과 싸우는 스토리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주인공이 제자리에 머물러있고 계속 약한 상태라면 독자님들에게 큰 흥미를 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유서담의 성장을 최대한 억제하되 아주 조금씩이나마 능력치를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작품의 중후반대에서는 유서담의 개성이 상당히 사라졌다는 지적을 많이 들었고 저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서 저도 아쉽고 씁쓸하긴 하지만 결국 제가 한 선택이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완결에 대해서인데,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완성된 세계는 사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현실이다’라는 것을 어렴풋이 표현해보고자 했습니다. 이게 잘 된 것 같지는 않지만, 작품 구상 초기부터 꾸준히 생각해왔던 엔딩이라서 그대로 끝낼 수 있었다는 게 참 다행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작중 후반대에 등장했던 드래곤에 대해서인데.... 사실 드래곤은 떡밥이 아니라 전작 혹은 전전작의 주인공입니다. 저는 모든 작품이 제 자식처럼 느껴져서 다른 작품을 쓰면서도 꾸준히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차기작에 꼭 한번씩 엑스트라로 툭 튀어나오고는 하는데, 제 이전의 작품을 읽지 않으셨던 분들이라면 황당하고 뜬금없이 보이셨을 거라고 생각하니 대단히 죄송한 마음밖에는 없네요...

아무튼, 이렇게 부족한 소설이 부족한 완결을 내게 되었고, 끝까지 따라와주신 독자 여러분께는 정말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또한 전전작 ‘레벨1 드래곤’을 연재할 당시에도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후원을 해주시던 keabe3님이 이번 작품에도 매일 후원을 해주셨습니다. 심지어 댓글은 거의 남기시지 않고 후원으로만 응원을 해주시는데 저를 항상 응원해주시는 분이 있다는 점에서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기회만 된다면 꼭 한번 대화를 나눠보고 싶네요.

물론 keabe3님만이 아니라, 여태 제 소설을 봐주시며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과 마지막까지 유서담의 여행을 함께 지켜봐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독자 여러분 모두 건강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시기를 바라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후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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