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 >
비비안타 제국.
멸망한 세계선에서 벗어날 수 있던 아라셀리는 사하르 공녀와 함께 어느 한적하고 산 좋고, 공기 좋고, 물 좋고, 산새소리 들려오는 숲속에 오두막을 지은 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땔감이 필요하다면 장작을 패고, 먹을 게 필요하다면 자그마한 울타리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고기가 먹고 싶다면 활을 들고 나가서 사냥을 하는 그런 삶.
물욕이 전혀 없다고 봐도 좋은 데다가 그저 한가로이 요리를 하며 지내는 게 좋은 아라셀리였기에 이런 삶을 사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사하르 공녀는 영 불만이 많았다.
“세상에 나가서 당장 네 이름을 밝히기만 해도, 모두가 너를 우러러볼 것이다.”
“그건 부담스럽잖아요.”
“이해가 안 가는군.”
비비안타 제국은 아라셀리 라인칼이라는 이름의 대마법사가 돌아왔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자신들의 세계가 한 번 멸망했었단 사실조차 모른다.
모든 일이 없던 것이 되었기 때문. 하지만 아라셀리는 굳이 나서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굳이 고생까지 해가며 모든 일을 비밀로 부치다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구나.”
“···이쪽 세상에는 이미 저는 필요가 없거든요.”
아라셀리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소박하게 사는 게 더 좋기도 하구요.”
사하르 공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항상 호화롭게 살아왔던 그녀였으나, 다른 차원에서조차 그런 삶을 바라지는 않는다. 애초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차원이동을 결심한 것이었으니까.
그날 이후로도 하루하루 그런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9써클의 마나를 모두 회복하였지만 유서담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고, 닿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라셀리는 시간이 날 때면 자그마한 수제 탁자에 앉아 푸른색의 큐브같은 것을 만지작대고는 했다.
“그건······?”
“아, 이거. 세계선이 바뀌기 직전에 ‘용’이 주고 간 거예요.”
“용···이라.”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그 어떤 차원에서도 신비로운 존재로 다뤄지고 있어서, 그 실체를 목격했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주 간혹 드래곤과 관련된 일화가 생생히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드물게 존재하기도 했다.
세상이 위기에 닥쳤을 때 홀연히 영웅과 함께 나타나, 모두를 구원하고서 다시금 어디론가 사라지는 존재.
아마도, 비비안타 아카데미 역시 어쩌다 보니 드래곤이 위기에 응답하여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아라셀리 일행이 해결한 뒤였고, 드래곤은 그녀에게 선물 하나를 던져준 채 돌아간 것이고.
‘그런데, 이 선물은 대체 뭘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를 모르겠다.
“제국 도서관에 찾아가보는 건 어떻겠느냐? 드래곤과 관련된 기록도 있다고 들었다.”
“음······ 하긴. 그렇긴 하죠. 읽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애초에 미신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아라셀리였기에 관련된 서적은 아예 손조차 대본 적 없었다.
“그럼 몰래 슬쩍 가서 확인해볼까요? 궁금하니까.”
“재미있겠구나.”
가끔은 이런 소소한 일상에서의 일탈도 필요하기에, 제국에서도 보안이 가장 강력하다는 국립 도서관의 1급 기밀서고에 잠입하여 별 것도 아닌 미신과 관련된 책 꺼내읽다가 나오는 것도 좋은 추억일 것이다.
계획은 즉시 실행되었고, 솔직히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서고에 몰래 잡임한 아라셀리는 램프를 벽에 걸어두고서 먼지 쌓인 책을 후후 불었다.
솔직히 불빛이든 먼지 제거든 손가락 한 번만 튕기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만, 그냥 아날로그틱한 기분을 내고 싶은 것 같다.
“드래곤과 관련된 서적이 의외로 많군.”
“아, 그런 소문이 있었거든요. 저희 세계도 수천 년 전에 드래곤이 다녀갔다는. 뭐 실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꽤 많기는 한데, 증거가 이제는 거의 남아있지 않거든요.”
실제로 비비안타 제국 곳곳에서는 드래곤의 조각상이 상당히 많이 보였고, 용의 후예랍시고 어깨에 힘 주고 다니던 왕국도 불과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었다.
비록 현대에 이르러서는 마법의 제국 비비안타에 의해 전부 통일되었지만.
“여기, 그 물건과 관련된 문서가 있군.”
“정말요?”
드래곤과 관련된 설화는 생각보다 많았고, 의외로 이 정체불명의 ‘큐브’에 대한 해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차원 여행자의 길잡이······?”
단 한 번뿐이었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조차 사랑하는 사람을 쫓고 싶었던 사람이 사용했다는 전설적인 물건.
하지만 기뻐하기엔 이르다.
아라셀리가 가지고 있는 큐브는 이미 사용된 것으로 보였기에.
‘어째서 나에게 이런 걸······.’
사하르가 책을 뒤적거리며 어떻게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는 그때, 갑작스레 아라셀리가 큐브를 떨어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
“···왜 그러지? 무슨 일 있나?”
“아, 아뇨, 그게···어······.”
그녀는 어째서인지 상당히 혼란스러운 듯 횡설수설을 하며 자꾸만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하르는 책을 덮고 일어나 아라셀리의 어깨를 짚었다.
“진정하고, 천천히 내 눈을 봐라. 무슨 일이지?”
“아······.”
그제야, 아라셀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말했다.
“갑자기······ 느껴지지 않아요.”
“뭐가 느껴지지 않는단 거지?”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라셀리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 불안한 눈동자를 떨었고, 입술은 창백하게 물들고 있었다.
“갑자기, 교수님의 기운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멀리 사라져버렸어요.”
“······!”
그건, 사하르조차 당황하게 만들 정도로 꽤 충격적인 일이었고.
둘은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로의 눈동자만을 마주보고 있었다.
*
지구 태평양, 헬 게이트 인근.
여덟 척의 크라켄급 항공모함에는 각각 100기의 전투기를 탑재하고 있었고 또한, 구축함이 사방을 포위하여 하늘과 수중 모두를 완벽히 포위하고 있었다.
각각의 항공모함에는 어나더 리그에서 ‘매직 실드’ 마법을 에테르 에너지로 개조한 특수 방호 설계가 되어있었으며, 괴현상 포착 레이더와 대괴수 구속 에테르 와이어 등 그 어떤 괴수가 나오든 완벽히 대응할 수 있도록 대처가 되어 있었다.
또한, 항공모함에 탑승해 있는 수천 명의 초능력자들.
이 정도의 병력이라면 지구상 그 어떤 괴수조차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전력일 것이 뻔했으나.
-······알립니다. ‘헬 게이트’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에너지의 흡수가 진행됩니다.
망망대해 한복판에 펼쳐진 붉은색의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면, 어쩌면 인류가 아무리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힘껏 저항을 한들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갑작스레, 헬 게이트 내부에서 거대한 혓바닥 하나가 솟구쳐 올라와 구름을 꿰뚫더니, 바닷속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마치, 지구에 뿌리를 내리려는 것처럼.
그 혓바닥에서 수천 개의 눈동자가 껌뻑이더니 입과 코, 손과 발처럼 생긴 기형적인 무언가가 솟구쳐 나왔다.
누군가를 구역질을 했고, 심신이 약한 누군가는 기절을 했다. 이 자리에 모여있는 한 명, 한 명이 모두 베테랑이었음에도 그저 바라보는 것조차 버티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투슝···쐐애애액!!
곧이어 전투기에서 미사일을 연달아 발포하자, 촉수가 터지며 바닷속으로 그 잔해를 흩뿌렸다.
-적 괴수의 방어력이 생각보다 약하다!
본래 괴수전에서 미사일 등의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던전 내부에 그러한 장치를 가져갈 수 없는 이유와 시가전에서 도시를 파괴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괴수에게는 ‘에테르 에너지’가 존재하여 그 파괴력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같은 초능력자의 에테르 에너지 파장이 아닌 이상 그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가 어려웠던 것.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마나’라는 신물질이 발견된 이후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포탄에도 얼마든지 적 에너지 보호막을 부술 수 있는 기술을 채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래봐야 A랭크 이상의 초능력자가 내는 출력만큼은 못하기에 큰 파괴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뭔가, 이상한데?’
테일러 나인은 빛의 구체 다섯 개를 강력하게 응집하여 허공에 둥둥 띄운 채 헬 게이트에서 빠져나오는 괴생명체를 바라보았다.
헬 게이트는 지금도 지구의 에너지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었고, 내부의 괴수들이 끊임없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꼬라지가, 마치 싱크대에 빨려들어가는 음식물 쓰레기처럼 억지로 꾸역꾸역 비집고 빠져나오는 모양새였다.
···마치, 내부의 괴수를 모두 버리려는 것처럼.
꾸드드득!!
물론, 그런 테일러의 생각과는 별개로 헬 게이트는 내부를 완전히 비우겠다는 것인지 어마어마한 괴수를 쏟아내고 있었다.
과연 이 항공모함 여덟 척으로 막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아직 헬 게이트로 진입조차 하지 않았건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헌터 테일러.”
그녀는 빛의 구체를 펑펑 쏴갈기며 바다를 타고 다가오는 괴수들의 미간을 꿰뚫는 와중에, 누군가가 부르자 눈을 돌렸다.
이마에 별을 세 개나 달고있는 현역 장군 로버트였다.
“무슨 일이죠?”
초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단 한 번도 뒤로 물러선 적이 없다는 일화로 유명한 로버트 장군이었기에, 테일러도 그에게는 제대로 예의를 갖췄다.
“내륙에서의 소식이 들려왔소. 당신께는 곧바로 소식을 전하라더군. 중국, 상하이에서 마스터 유서담과 무림맹주 설중연이 통칭 ‘괴인 2호’와 혈투를 벌였고, 마침내 사살하는 데 성공했소.”
“오···. 역시 해냈구나.”
그건 꽤 희망적인 소식이었으나, 어째서인지 로버트 장군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그리고요?”
눈치 빠른 테일러가 먼저 묻자, 로버트가 말했다.
“······길드 마스터 유서담이, 혼자의 몸으로 헬 게이트에 진입한 것 같소.”
“예? 아니, 여기를 우리가 떡하니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까진 잘 모르겠소. 하지만 무림맹주의 증언이니, 틀림없을 거요.”
테일러는 황망한 표정으로 팔을 늘어뜨렸다.
헬 게이트로 함께 향하기로 해놓고서, 혼자 들어가 버리다니.
‘어째서······?’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로버트 장군은 할 말을 이어갔다.
“지금 무림맹의 무림인들을 포함하여, 지원군이 오고 있소. 거기에 어나더 리그의 헬 게이트 원정대가 포함되어 있어, 든든하기는 하지만······.”
로버트 장군은 씁쓸한 표정으로 헬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과연 헌터 유서담의 구조 작업을 할 수는 있으련지.”
꿀렁, 꾸르륵!
그들은 헬 게이트 인근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괴수를 쏟아내서 대체 무엇을 하려는가 싶었더니, 그것들은 ‘땅’을 만들고 있었다.
지구라는 낯선 세계에서도 자신들이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공간.
헬 게이트와 흡사한 환경으로, 태평양 한복판을 개조하고 있던 것이다.
어느덧 200m가 넘는 공간에 헬 게이트의 영역이 생성되었고, 그 위로 기형적인 생김새를 가진 괴수들이 비틀거리며 걸어다니기 시작하였다.
어떤 괴수는 너무 거대하여 포격이 전혀 듣지를 않았고, 어떤 괴수는 그저 걷다가 저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쿠르릉······!!
또한, 헬 게이트의 상공에 붉은색의 구름이 끼기 시작하였다.
-가스!
-방독면을 착용하라!
테일러는 말없이 자신의 팔목에 장착되어있던 띠를 눌렀다. 그러자 야구 점퍼 형태로 개조되어있던 에테르 슈트가 순식간에 전신을 감싸는 검은색의 형태로 변이되었다.
헬 게이트의 내부에서도 적응할 수 있도록, 새로이 개발된 슈트.
설마 여기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으나, 지금은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헬 게이트의 영역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었으니까.
‘대체······ 상황이 어떻게 되고있는 거야···?’
잘은 모르겠지만, 만약 유서담이 정말로 헬 게이트로 향한 게 맞다면.
‘어차피 출구는 저기 하나 뿐이야.’
그렇다면.
유서담이 편안히 돌아올 수 있도록, 출구를 깨끗하게 닦아놓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 새끼, 진짜 나중에 만나면 죽여버릴거야.’
<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