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공 클리셰(2) >
지구, 북태평양.
붕괴 된 헬 게이트 연구소 인근에는 일부 가라앉지 못한 건축물의 잔해 등이 파도에 휩쓸려 망망대해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 사이로, 실상 대부분이 미군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겉으로는 UN의 평화유지군으로 포장되어있는 항공모함 8척이 쏜살같이 나아가고 있었다.
에테르 기술력이 더해진 항공모함은 한 척으로도 SSS랭크의 대괴수 크라켄을 퇴치한 전적이 있어 이와 동급은 모두 ‘크라켄급 항공모함(LPD)’이라 불린다.
‘그래봐야 실상은 그 항공모함에 타고 있던 초능력자들이 다 때려잡은 거였던가······.’
테일러 나인은 따분한 눈으로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크라켄급의 항공모함이 여덟 척이나 되든 말든, 별로 상관은 없었으니까.
“아오, 호위함들 때문에 뭔 바다 구경도 못하겠네.”
안 그래도 항공모함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것들의 주변에 따라다니는 구축함들이 시야를 방해한다. 심지어 바다 아래로도 잠수함들이 따라다니고 하늘에도 뭔 벌써부터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걸 보아하니, 위든 아래든 시야가 꽉 막혀있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인다.
-헌터 테일러.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렇구나.”
-···함장실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는 중이었어.”
귀에 꽂아둔 원격 무전이 울린다. B랭크의 자연간섭계 초능력자 수천 명이 모였고, S랭크의 초능력자가 200명이 넘게 모였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SS랭크의 초능력자는 희귀한 전력이었다.
지구상에 무림인을 포함하여 100명도 안 되는 SS랭크의 초능력자 중에서 무려 9명이 이 자리에 모였으니, 상당히 진귀한 풍경이기는 했다.
이만한 병력이 움직이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오로지 헬 게이트 연구소가 붕괴되었다는 최악의 상황이기에 가능했던 일.
함장실로 가기 위해 복도를 비척비척 걷던 테일러는 어느덧 전방에 보이기 시작한 거대하고 붉은 물체를 보고서는 입을 헤 벌렸다.
“오······.”
헬 게이트.
듣기로는 정말 많이도 들었지만, 이렇게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다.
‘저런 곳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건가······.’
솔직히 겁난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공포를 느낄 테니까. 유서담은 저런 곳에 무슨 생각으로 들어갔었을까.
“저 근방을 청소한단 말이지······.”
아직 헬 게이트의 진입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당장은 근처를 수색하여 혹시 헬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괴수가 있으면 소탕하며, 헬 게이트 연구소의 잔해를 회수하려고 찾아왔으니까.
그리고, 임시 보호장을 설치하는 것까지가 최종 목표이다.
헬 게이트 연구소에는 ‘특수 게이트 방해 장치’라는 것을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사라진 지금 헬 게이트의 팽창이 더욱 가속화되었을 것이라는 박사들의 판단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얌전히 할 일만 수행하면 특별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응? 근데 저게 뭐지?”
테일러는 창가에 다가가 바짝 달라붙어서 헬 게이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태양에서 코로나가 발산되는 것처럼, 무언가 오로라같은 것들이 흐물흐물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마치, 외부에 있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테일러만 발견한 게 아닌지, 선실 내부에 요란스럽게 경보가 울렸다.
-이상현상 발생! 이상현상 발생!
전투 준비 태세가 발령되어 헌터와 군인들이 신속하게 뛰어서 어디론가 향한다. 그런 그들과는 다르게 테일러는 그 자리에 남아서 한참이나 헬 게이트를 쳐다보았다.
‘저게, 대체 뭐지······?’
무언가··· 느낌이 불길했다.
*
[13. 주인공이 다수의 적에게 공격당할 경우, 한 번에 한 명씩만 공격한다.]
아주 유서 깊을 클리셰다. 주인공에게 덤벼드는 다수는 반드시 한 명씩 달려들고, 그 다음에 달려드는 놈은 앞서 달려든 놈과 함께 처맞고 날아가 쓰러지는.
지금 내가 딱 그랬다.
[스킬 「주인공 클리셰」에 얽매여 신체의 움직임이 순간 억압됩니다!]
“크으······!”
마침, 설중연 누님이 괴인의 양팔을 베어내었으나 반격을 당해 뒤로 물러난 상태. 괴인이 크게 경직을 입은 그 순간 내가 나서서 큰 마법 한 방을 먹여줬더라면 치명타를 먹일 수 있었겠으나, 안타깝게도 놈이 자세를 회복하기 전까지 내게는 공격 타이밍이 돌아오지 않았다.
[스킬 ‘주인공 사냥꾼’이 일부 저항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보통의 경직보다도 더 빨리 회복되었지만, 놈과 나의 능력치 격차 때문에 거의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
휘오오오!!
갑작스레 몰아치는 태풍에 휩쓸려 바닥에 처박힌 나는 잽싸게 바닥을 굴렀다.
쿵! 쿵쿵!
내가 넘어져 있던 자리에 연달아 바위가 떨어졌다. 간담이 서늘해진다.
‘젠장, 그놈의 클리셰.’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고 있자니, 지친 기색이 역력한 누님이 검을 수직으로 치켜세웠다.
슬슬 지원이 왔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건만, [9. 주인공이 주요 악역과 싸우는 도중에는 결코 지원이 오지 않음]이 발동되어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수준이라니. 일전의 상식개벽 주인공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위험했다. 상식개벽 주인공이 세상의 상식과 물리법칙을 일부 바꿔놓는 수준이라면, 저 괴물은 이 세상의 운명 자체를 뒤흔들어놓고 있었다.
반드시 주인공이 생각하는대로 행해지며, 반드시 그 무언가가 필연적으로 이뤄져야만 한다면.
너무나도 많은 개연성이 소모될 것이다.
위험하다. 단순히 위험한 축을 넘어서, 저 괴물을 공격하면 할수록 지구가 더더욱 빠르게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저 괴물은 죽지 않는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고, 지구에 조금이라도 개연성이 남아있는 한, 저것은 이 세상의 모든 개연성을 소모할 때까지 살아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대체,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어째서 주인공 사냥꾼이 먹히지 않는 거지?’
그동안은 이 스킬로 수많은 주인공들을 개연성을 무시하고 파괴해왔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게 제대로 되질 않았다.
‘레벨이 너무 낮아서?’
아니, 그렇다기엔 나는 저 괴인보다도 더 강할 것이라고 추정되는 달마지존조차도 사냥했다.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주인공의 클리셰에 얼마든지 간섭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 이때, 의뢰인이 있었더라면 무언가 조언을 해주지 않았을까.
레이나라면.
나에게 뭐라고 했을까.
[1?. 주딣?걿 딣······.]
그 순간, 놀라우리만치 가슴이 차분해졌다.
어째서인지 아주 먼 과거에 레이나가 내게 해주었던 조언이 떠오른 것이다. 별로 의미있는 말도 아니고, 단순한 말이었다.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요.’
아마도 내가 별 것도 아닌 것으로 물어보았을 때, 레이나가 웃으며 그렇게 말해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째서 이 순간에 이게 생각난 걸까. 너무나도 인위적이라고 느껴졌지만, 상관없다.
그건 내게 꽤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해주었으니까.
“누님!”
“······난 아직 괜찮다.”
설중연 누님은 숨을 가파르게 고르고는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싸울 수 있는 것인지 검을 잡은 손에 한 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혹시, 저를 믿고 큰 기술을 한 번만 사용해주실 수 있습니까?”
“······.”
그에 누님이 내 눈을 마주보았다. 여태 큰 기술을 사용하지 못해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래봐야, 적이 ‘클리셰’로 모두 회피해버려서 체력낭비만 될 뿐이기에 그러지 않았을 뿐.
그렇기에 여기서 큰 기술을 사용하는 건 굉장한 도박일 것이다.
하지만 누님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그때 괴인이 움직여 손바닥을 누님께 향하려고 했지만, 내가 먼저 소리쳤다.
“「적이든 아군이든, 큰 기술을 준비할 때는 결코 건드리지 않는다!」”
그 순간 놈의 손바닥이 우뚝 멈추었고, 그 궤적은 그대로 나를 향하였다.
퍼엉!!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충격파와 함께 대지가 뒤집혀 올라오고, 공기가 터져나갔지만 나는 이미 방어겹을 겹겹이 쌓은 채였다.
스스스스······.
마법과는 다르게 무림인의 공격 준비는 그리 길지 않았기에, 이렇게 잠깐 시간을 끈 것만으로도 누님은 충분히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휘이이잉···!
누님이 검을 천천히 흔들자, 공기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기상 조건을 강제로 조작하는 괴인조차도, 현경에 도달한 무림인이 의지로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은 결코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천마신공(天魔神公)
천단어검류(天斷馭劍類)
비상(飛翔)
나에게는 그저, 아주 천천히 검을 세로로 내려그은 것처럼 보였다.
그저 그럴 뿐인, 아주 단순한 동작.
그러나 다음 순간.
세상이 새카매지는 듯한 착각이 들더니, 하늘이 절반으로 갈라졌다.
“······!”
그런 착각이 들 정도로, 오로지 누님이 흔든 검의 궤적만이 이 세상에 오롯이 그 존재감을 과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시간이 느려졌다.
[14. 주인공이 결정타를 입기 직전, 과거를 회상하며 시간이 느려진다.]
그 느려진 세상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떨어지는 땀방울, 흩날리는 먼지, 부서지던 구름까지도.
모든 것들이 거의 정지한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그나마 클리셰에 저항할 수 있는 나와, 찰나의 시간조차도 느낄 수 있는 누님만이 이 순간을 인지하고 있을 뿐.
물론 인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같았기에 누님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검을 쥔 손을 떠는 것이 보였다.
[15. 주인공의 과거 회상에는 꼭 누군가의 조언이 등장하며, 그 조언은 위기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거의 치트나 다름없는 주인공 클리셰 스킬이 또다시 발동되었고, 괴인이 몸을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저 필사의 절기를 피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애초에 이 순간 또한, 노리고 있었으니까.
“「최후의 일격을 앞두고 과거 회상을 하는 적은 패배한다.」”
이 또한, 클리셰였다.
주인공이 과거 회상을 한다면 그건 결국 잠재되어있던 능력을 깨우쳐 각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겠지만, 비중있는 악역이 과거 회상을 하는 경우에는 패배하고 만다는 클리셰.
[16. 돓운 젏인0의 공격······.]
무언가 메시지가 떠올랐고.
움직이던 괴인의 허리가 우뚝 멈췄으며.
누님의 절기가, 정확히 놈의 몸을 절반으로 갈라버렸다.
직후 떠오르는 메시지.
[경고! 개연성이 한도를 초과했습니다!]
‘수명을 일부 사용해서 상쇄해!’
[불가능합니다!]
‘젠장······.’
아직은 안 된다. 지구에서는, 절대 주인공화가 되어서는 안 된단 말이다. 한 번 주인공이 되는 순간 나는 이 세계에 얽매일 것이고, 헬 게이트로 들어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나로 인해 내가 사랑했던 이 세계가 멸망해버리겠지.
‘그럴 수는 없어.’
아직은 기회가 있다.
‘······그럼, 가장 가까운 차원으로 이동할 수는 있겠나?’
[시스템의 힘으로는 온전한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겠지. 넌 레이나에게 딸려있던 의지에 불과했으니까.’
어떤 미지의 영역에 인간들이 도달하기 어려워하는 까닭은, 그 미지의 영역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수많은 세상을 여행하며 수십 번의 차원 이동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공간 속에 몸이 녹아드는 감각을 몇 번이나 경험하여 적응하였다.
비록 나 혼자의 능력으로는 다른 차원으로 찾아가는 등의 기적을 행사할 수는 없겠지만.
던전처럼 지구와 정확히 연결되어 있으며, 그리 멀지도 않은 차원인 ‘헬 게이트’라면 얼마든지 향할 수 있을 것이다.
“크으······!”
자리에서 억지로 일어나 괴인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이 와중에도 놈은 신체를 회복하고 있었다.
[17. 주인공이 결정타를 입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옷 안에 들어있던 물건 등이 공격을 막아주었던 것······.]
“넌 아무것도 안 입고 있잖아.”
치직! 상처의 회복이 취소되었다. 간단한 말 한마디에도 클리셰가 취소될 정도로 놈의 힘이 약해져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는 없을 것이다.
나는 괴인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았고.
[지금 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천천히 다가오는 설중연 누님의 눈을 마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생각해보니, 이걸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이거밖에 없어서요.”
“그게 무슨··· 소리지?”
“헬 게이트로 데려갈게요.”
“······뭐라?”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래도, 안전하게 헬 게이트로 기어들어가겠다는 생각 자체가 욕심이었던 모양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누님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금방 돌아올 테니, 기다리세요.”
“자, 잠깐!”
누님이 보법까지 사용해가며 급히 내게 다가왔지만, 나를 잡을 수는 없었다.
[······차원이동을 시작합니다.]
< 주인공 클리셰(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