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들리는 세계(5) >
헬 게이트 내부, 어딘가.
금빛의 향기를 가진 여인, 레이나 주는 말없이 어두운 공간의 내부를 거닐었다. 사방에는 모니터가 가득했고, 그 모니터 하나하나에는 수많은 세계가 담겨있었다.
검과 마법의 판타지 세계.
인공지능과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SF 로맨스의 세계.
주먹 하나로 대륙을 제패하기 위해 떠도는 무협의 세계.
오로지 돈 하나로 세상을 발밑에 두기 위한 재벌의 세계.
사랑을 얻기 위해 세상마저도 등졌으나 끝내는 연인에게마저 배신당한 새드 엔딩의 세계.
5초에 한 번씩 사람이 밀실에서 살해당하는 추리의 세계.
수십? 수백? 수천?
이 세상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세상이 존재하는 걸까. 그건 레이나 주의 머리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띵!
어떤 모니터의 불빛이 꺼지자, 레이나는 무심코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모니터가 꺼졌다는 것은 곧 그 세계의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의 세상이, 완전히 끝났다는 뜻이다.
띵! 띵띵띵!
[지금까지 『99층에 오르긴 했지만 100층은 도전하기 귀찮습니다』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무림말빨: 나는 주둥이로 천하를 지배한다』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나의 사랑은 오늘도 시들어간다』를 사랑해주셔······.]
[지금까지 『보이드 19호, 사라지는 선원들』을······.]
그뿐만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수많은 세계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멸망한 세계는 헬 게이트에게 흡수되어, ‘완성된 세계’의 일부가 된다.
레이나 주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무너져가는 세계들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많은 세계가 지금 이 순간에도 바스라지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많은······ 정말로 많은, 끝없이, 무한한 세계가 레이나의 눈앞에 펼쳐졌다.
또다른 유서담의 목적은 이 수많은 세계를 ‘이야기’로서 멸망시켜 흡수하여, 헬 게이트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야기의 진행이 너무나도 느렸다.
그는 몰랐을 것이다.
[연재 중단]의 존재를.
어떤 세계는 주인공이 난데없이 실종되기도 하였고, 어떤 세계는 주인공이 뜬금없이 자신의 목표를 포기한 채 개연성을 소모하지 않고서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도 했다.
멸망하는 세계가 분명히 더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 또한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개연성을 강제로 소모하여, 바스라진 세계를 흡수한다.’
이것은 또다른 유서담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나의 세계에 ‘주인공’과 그 스토리를 부여하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스토리에 관여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기 때문.
실제로, 비비안타의 두 번째 주인공에게 고작해야 딱 한 줄의 개연성을 부여하려고 어마어마한 힘을 소모했을 정도이지 않던가?
저 수많은 세계를 모두 관리하는 것은 신조차도 불가능하다.
즉, 저 남자의 계획은 시작하자마자 실패했었다.
······8년 전, 유서담이 헬 게이트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 저것도 연중인가.”
흠칫, 어깨를 떤 레이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돌렸다. 유서담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가 모니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놈의 연중. 짜증난단 말이지.”
그러다, 이내 환하게 웃으며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상관없어졌어.”
그는 어딘가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수많은 모니터 중에서도 유독 커다란 크기를 가진 모니터가 몇 개 있었는데, ‘완성된 세계’에 가까운 세계들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지구와 비비안타 등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또다른 유서담은 지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헬 게이트로 진입하기 위해, 수많은 인간들이 모여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원래 인간이라는 종족에게는 반드시 페널티가 있기 마련이거늘.”
잔머리와 손재주, 그리고 창의력이 뛰어난 종족인 인간은 심지어 그 욕심마저도 신을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그래서 세상은 인간에게 수많은 페널티를 부여하였다.
허약한 신체 능력, 짧디짧은 수명, 제한된 자원, 그리고 서로에 대한 공격성.
“그런데, 인간이라는 놈들은 고작 손에 우연찮게 불꽃 하나가 쥐어진 것만으로도 세상을 저렇게까지 발전시켰어.”
인간은 서로를 물어뜯고, 할퀴면서 성장하였다. 남을 죽이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키고, 남보다 잘 되기 위해 능력을 갈고 닦았으며, 남의 위에 서기 위해 정진하였다.
그 결과, 대부분의 세계에서 ‘인간’이 정복하지 아니한 곳이 극히 드물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지구는 특별해. 다른 그 어떤 세계를 보더라도, 이렇게까지 인간이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세계는 정말로 드물어.”
또다른 유서담의 입장에서 지구라는 세계는 가장 이상에 가까운 세계였다.
지구의 과학은 특별하다.
편안과 안락을 위해.
쉽고 간편하게.
쾌락과 욕구를 탐하기 위해 발달한 과학은 인간이라는 그 자체의 존엄성을 더욱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었다.
버튼 하나면 세계 반대편과 얼굴을 마주 보고서 대화할 수 있으며,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원하는 물건을 가질 수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지식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편리하게 기계 하나를 통해 얻을 수 있다.
비록 겉보기에 불과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평등한 존재였으며, 누구라도 가능성을 펼칠 수 있었다.
이론만 듣자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세계, 유토피아에 가까웠으나.
“결함이 너무 많은 게 흠이지.”
결국은 저 세계 또한 정해진 ‘운명’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던 탓일까.
난데없이 세계에 몬스터가 출몰하였으며, 초능력자들이 나타났다.
여태껏 지구가 유지해왔던 모든 평화와 완벽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그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으니까. 그렇지? 레이나.”
“···예. 그렇군요.”
“하하. 왜 그렇게 죽상이야? 결국 이렇게 될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잖아?”
지구의 영상 속에는 유서담이 비춰지고 있었다. 지금도 헬 게이트로 진입하기 위해 수많은 정치적,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바삐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건 모두, 유서담이 바라서 한 일이야. 네가 그러고 있을 필요는 없어.”
그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맞는 말이었기에,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정말 많이 기다렸어. 정말로,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이었지.”
하지만 이제 기다림의 시간이 끝을 보이고 있다.
찌릿!
“윽!”
갑작스러운 두통에, 사내는 머리를 부여잡고서 몸을 비틀거렸다.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 단기간에 너무나도 많은 개연성을 소모한 탓이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겠어. 한시라도 더 빨리 일을 진행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자극하는 수밖에.
*
지구, 태평양.
국제 헬 게이트 연구소.
태평양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균열 ‘헬 게이트’를 둘러싼 형태로 지어진 헬 게이트 연구소는 현재 전쟁을 위해 개조되고 있었다.
연구를 위한 설비는 모두 빠지고 최첨단 현대 병기가 자리를 잡았으며,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그 빈자리를 헌터와 군인들이 메웠다.
이랬던 적이 예전에도 한 번 있었다.
2045년, 마지막 헬 게이트 원정을 시작할 때였을 것이다.
‘뭐, 그때와 지금은 느낌이 다르긴 하지.’
SS랭크의 염동력자, ‘청’은 연구소의 창가에 서서 흉흉하게 빛나고 있는 헬 게이트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넘실거리는 파도의 표면에 자리하고 있는 저 붉은색 덩어리는 얼핏 별것도 아닌 듯싶으면서도, 때때로 난폭한 짐승이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삐잉···삐잉···.
센서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렸다.
“아, 헌터 청께서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헬 게이트의 붕괴 파장이 조금 증폭된 게 끝이라서요.”
고작 시선 한 번에도 연구원들이 쩔쩔맨다. 저들 또한 헬 게이트를 연구할 정도였으니 어디 가서 엘리트라고 불릴 터인데, 지구상에 100명도 채 안 되는 SS랭크의 초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저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헬 게이트의 붕괴 파장이 증폭되었다니요?”
“으음······ 늘상 있는 일입니다. 발생하기 시작한 건 몇 달 되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매일매일 파장이 증폭되고 있거든요.”
“그게 증폭되면······.”
“네.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지구가 저 끔찍한 구덩이 속으로 완전히 흡수당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직까지 그 정도의 파장은 아니라며 연구원이 덧붙였다. 그들의 말을 곱씹으며, 청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그때 자동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시대에 맞지 않게도 끈이 주렁주렁 달린 무복을 입은 사내.
무림, 사천당문(四川唐門)의 당백수였다.
천혈독(千血毒)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가진 그는 현재 헬 게이트 연구소에서 일찍이 대기하고 있는 SS랭크의 초인 두 명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거, 더럽게 심심하구먼! 별 일 없는가?”
“예? 예, 예···. 공략 예정일까지는 아직 석달 넘게 남았습니다. 벌써부터 무슨 일이 발생하면 큰일이지요.”
“가끔 날파리 같은 놈들이 튀어나온다면서?”
“그렇긴 합니다만······ 저 구멍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뭐라? 그놈들 잡으러 왔는데, 저기서 안 나오면 뭐 어쩌란 말이야!”
“저한테 말씀하셔도······.”
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또한 SS랭크의 헌터로서 최근 무림인들과 꽤 많은 교류를 나눠보았기에 무림인들이라고 다 저렇게 무식하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안다.
특히, 무림맹주 설중연은 문무(文武)를 모두 갖춘 팔방미인으로서 그 고귀한 자태에 자신조차 고개를 숙일 뻔하지 않았던가.
다른 무림인들 또한 마찬가지로서 무력과 무관하게 대화를 잠깐 나누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인품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저런 망나니와 함께 헬 게이트를 수호해야 한다니.
“당백수. 연구원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조금은 소란을 줄여주시지요.”
“참 나. 맨날 나한테만 지랄이여 지랄은.”
당백수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럼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뭐.”
“······.”
그게 더 부담된다며 연구원들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희망을 담아 청을 바라보았지만, 저 남자가 그리 하겠다는데 아무리 그녀라도 말릴 재간은 없었다.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연구원들은 더 이상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위잉! 위잉! 위잉!
“어라? 뭐야 이건?”
“겨, 경보······. 큰일입니다! 헬 게이트 내부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왔습니다! 이, 이렇게나 거대한 에너지 파장이라니, 이런 적은 거의 없었는데······.”
“됐고. 어떤 놈인지 모니터나 비춰봐.”
답답하게 움직이던 연구원들은 당백수의 말에 뒤늦게 모니터를 옮겼다. 처음으로 그의 말이 시원하다고 생각하며 청 또한 모니터를 확인하였다.
태평양, 그 한가운데에 위치한 헬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살색의 무언가.
그것은······ 하늘을 치솟을 듯 솟구치는 에너지 파장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너무나도 평범하게 생겼다.
그건 아름답지 않았다. 그건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그건 그레이 휴먼이라 불리는 신종족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괴물도 아니었다.
그저 키가 조금 지나치게 클 뿐이고, 성별이 없을 뿐인.
사람이었다.
“···뭡니까, 저게?”
당황한한 얼굴로 청이 물었으나, 연구원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대답은 당백수가 대신하였다.
“그게 중요하나? 저놈이 위험할지도 모르니 빠르게 달려가서 대가리에 칼이나 들이미는 게 중요하지.”
“···예. 맞는 말이군요.”
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가다듬는데, 모니터 속의 그 ‘괴인’이 손바닥을 치켜들었다.
“음?”
“어?”
저게 무슨 의미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결과가 먼저 발생했다.
쩌억······.
정말로 한순간에, 헬 게이트 연구소를 보호하던 외벽이 잡아 뜯겨서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버린 것.
쿠구구궁-!!
삐-! 삐-! 삐-!
쨍그랑!!
“큭···!”
뒤늦게 거칠게 파도가 몰아치며 연구소를 강타하자, 창문이 모조리 깨져나가며 바닷바람이 거칠게 내부를 몰아쳤다.
짭쪼름한 바다 냄새를 맡으며, 당백수는 식은땀을 살짝 흘렸다.
최소 50m 높이의 외벽이 깔끔하게 일(一)자로 뜯겨져나간 것을 보고 있자니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로 저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밖에 없다.
무림맹주 설중연.
그녀가 가진 압도적인 무위를 잘 아는 당백수였기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괜히 나오라고 도발했나?”
< 흔들리는 세계(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