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들리는 세계(4) >
흔들리는 세계(4)
길드 ‘어나더 리그’는 설립된 지 고작 3년도 채 되지 않았으나, 그 3년간 사회에 미친 파장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는 헌터가 하고 싶은데 초능력에 대한 재능이 없더라도, 무공이나 마법의 길을 걸어도 되었으며 또한 장비의 성능이 좋아져 더 이상 무능력자들이 비참하게 구를 필요가 없어졌다.
에테르 공학과 마도 공학이 결합된 어나더 리그의 신기술은 예카테리나의 이름으로 세워진 ‘마탑’ 소속의 마도 공학자들에 의해 1분1초를 단위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었으며,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개편된 무공과 마법을 배우고자하여 지금도 전 세계에서 수많은 헌터 지망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발명품과 수많은 인재를 낳은 어나더 리그의 목적은 단 하나, 오로지 헬 게이트의 공략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길드 가입 조건에 ‘헬 게이트’ 항목이 버젓히 적혀있었기 때문.
애당초,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유서담의 별명 중 하나가 ‘헬 게이트의 생존자’ 혹은 ‘헬 게이트에 미친 남자’였을 정도로, 그의 헬 게이트에 대한 집착은 유명하다 못해 지구 반대편의 꼬마조차 알 정도였다.
하지만 어나더 리그에 가입하는 그 누구도 헬 게이트에 대해 크게 신경썼던 자는 없었다.
헬 게이트 공략은 너무도 머나먼 일처럼 느껴졌고, 까마득한 미래에나 닥칠 사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나더 리그의 마스터 유서담이 헬 게이트를 공략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UN이 적극 지지하겠다고 뜻을 내세웠습니다.
-장영욱 박사님. 과연 헬 게이트의 공략이 가능할까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겠죠. 하지만 UN이 한국의 일개 길드의 움직임에 맞춰준다는 건, 분명히 이유가 있다는 건데 공식적으로 발표된 바는 없는지라 아직까지 저희들은······.
많은 얘기가 언론을 통해 오갔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부분이 부정적이었다. 덕분에 어나더 리그 내부의 분위기 또한 술렁이기 시작했다.
“진짜 가려는 건 아니겠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친구들이 나 어나더 리그 가입했다고 부러워하던데, 지금은 동정하더라.”
“아. 진짜 미치겠다. 그냥 도망칠까?”
“미쳤냐. 헌터가 길드 규정에 걸려있는 전장에서 탈주하면 얼마나 불이익 받을 줄 알고.”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리고 당연히, 유서담도 이제 막 길드에 가입한 조무래기들을 데리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인원은 50인의 검술가들과 예카테리나의 아래에서 성장하고 있는 마법사들이었다.
“나는 가겠다.”
강혁도. 30년 전부터 검도를 단련해오며, 현재까지도 검술의 명인이라 불렸지만 초능력이 존재하지 않아 강체 능력자들의 무시를 받으며 살아오던 그는 어나더 리그의 무공을 전수받고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기술 하나만큼은 뛰어났던 그였기에, 마나 연공법과 신체를 마나로 강화하는 법을 깨닫는 순간 여태까지 밀려왔던 성장이 한꺼번에 폭풍처럼 몰아친 것이다.
덕분에 그는 순식간에 경지가 상승하여 현재는 S랭크의 수준을 넘어선 채였고, 벌써부터 SS랭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혁도 명인이 가겠다면, 저 또한 따라가겠소.”
“길드에게 입은 은혜가 큽니다. 싸우기 위한 힘을 다 받아놓고, 정작 중요한 싸움에서 빠지겠다면 그건 무술가의 도리가 아니겠지요.”
다른 검술 명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나 쌓는 법을 깨우치는 순간, 여태까지 댐에 막혀있던 폭포가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무시무시할 정도의 성장세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어나더 리그의 마법사들은 사정이 약간 달랐다.
마탑의 마도 공학자들은 마법을 과학에 접목시킬 정도로 뛰어났으나 애당초 마법과 마나를 접한 지 이제 고작해야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고, 그 사이에 가파른 성장을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예카테리나처럼 마녀의 피가 진하게 섞여있다면 모를까, 일반적으로 2년 정도 공부하면 이제 막 1써클에서 2써클을 만드는 수준에 불과했고 그나마 재능이 있는 자들이 3써클을 만들었다.
그마저도 놀랍긴 했으나, 전장에 데려갈 수는 없다.
다만.
“이번에 저희가 개발한 ‘초마나 에테르 붕괴포’입니다. 이론상으로는 A랭크의 괴수조차 단 일격에 소멸시킬 수 있고, 상성이 잘 맞는다면 S랭크 또한······.”
“‘멀룬 하이 레이더’입니다. 룬어 ‘멀룬’은 지면을 핥는다는 뜻인데, 시야가 어둡고 제아무리 낯선 장소에서도 결코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며, 자동으로 반경 100m 이내의 지형을 지도로 기록······.”
“힐링 캡슐입니다. 알약처럼 입에 넣고 깨서 먹으면 순식간에 상처가 회복됩니다. 다만 후유증으로 심각한 무력감이 올 수 있어 위급한 환자에게······.”
“이 슈트를 기존의 에테르 슈트에 장착하면 어떤 환경에서도, 심지어 우주라고 할지라도 버텨낼 수······.”
“이 방독면은 어지간한 고열과 저온은 가볍게 극복해내며 독극물이 근처에서 분사되면 그 즉시 내장 슈퍼 컴퓨터가 해석하여 3초 안에 독을 걸러내고, 혹여나 감염되었다고 하더라도 즉시 해독제를 만들거나 해독제의 레시피를······.”
“또한 이 물건은······.”
신 에너지 ‘에테르’가 발견된 직후, 인간의 과학 수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였다. 여태까지 알지 못했기에 하지 못했으나, 알게된 그 순간 그것을 극한까지 활용할 수 있는 인간의 특성인 것이다.
인간이 몬스터의 에너지 ‘에테르’와 물질에다가 자연의 에너지 ‘마나’까지 같이 다룰 수 있게 되는 순간,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려는 것만 같았다.
어나더 리그는 세계 각지의 수많은 투자자에게서 지원을 받아 부담 없이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이제는 마침내 그것들을 사용할 때가 되었다.
“아쉽군요.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더 좋은 장비를 제공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아닙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하십니다.”
유서담은 여태까지 노력해준 예카테리나와 마법 연구원들에게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최근 마도 공학이 극한까지 발달한 세계에서 온 라칸탈이 어나더 리그에 합류했다지만, 짧은 시간 내에 이렇게까지 많은 장비가 준비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대부분이 전투를 위한 장비인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예카테리나가 진작 전투 장비 위주로 개발하라고 명령한 듯싶다.
그 다음으로 유서담이 찾아간 장소는, 무림맹이었다.
사실 무림맹에게 도움을 구할 생각은 없었다. 군사의 직책을 달고 있으면서도 최근에는 잘 찾아가지도 못해서 그럴 염치도 없었고.
그런데 오히려 무림맹측에서 유서담을 헬 게이트와 관련된 안건으로 불러들였다.
‘무림 회의’
본래 유서담은 군사로서 이 회의에 반드시 참여해야 했지만, 여태까지는 그러질 못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참석하는 무림 회의는 썩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으음······.”
회의실에는 무림맹의 장로 10명을 비롯하여 칠대세가와 구파일방, 거기에 한때 무림의 세계에서는 사파 취급을 받았던 문파마저도 이제는 하나가 되어 같은 공간에 앉아있었다.
하기사 천마신교의 교주였던 자가 무림맹주가 되었는데, 더 이상할 게 무어가 있겠는가.
“맹주님. 전원 착석하였습니다.”
공석이나 다름없는 군사의 직책까지 메꾸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느라 눈빛이 퀭한 신혜지가 말하자 설중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 공기조차도 감히 그녀의 앞에서는 감히 숨을 내쉴 수 없으리라.
‘이게 진짜 위엄인가······.’
며칠 전 어나더 리그의 회의를 소집했을 땐, 누군가의 위에서 직책을 맡고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게 퍽 부담스러워서 테일러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분위기를 풀고서야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설중연은 물 흐르듯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는다는 무림의 가주들을 불러모아 중대사안을 다루었다.
예전에는 알지 못했지만, 비슷한 위치를 경험해보니 새삼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무림맹의 군사가 최근 헬 게이트로의 진입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서 알고들 있겠지.”
그녀는 일부러 군사라는 단어를 강조하였고, 유서담은 그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무림맹은 군사에게 입은 은혜가 아주 크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모든 무공을 잃은 채 세상 언저리에 숨어서 살아가고 있었을 터.”
그 말에 모든 무림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 자신의 무공을 극한까지 단련하기 위해, 또한 그 무공을 후손에게 전수하기 위해 일평생을 바치는 이들.
무림인에게 무공이란 곧 모든 것이라는 의미나 다름없다.
그들은 무공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을 잃었고, 무공을 되찾았을 때 모든 것을 되찾았다.
살아갈 이유마저 없이 하루하루 그저 세월을 보내던 그들에게 있어서, 유서담에게 입은 은혜란 가히 무덤까지 지고 가야 할 정도였다.
하여, 설중연이 무림맹주로서 딱히 설득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로서는 혹여나 뜻이 다른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유서담에게 입은 은혜를 강조하여 그를 돕자고 말하는 것이 본래의 취지였으나, 애초에 무림인들은 결코 은혜를 잊지 않기에 이 회의조차 무의미했다.
“애초부터 나는 따라갈 생각이었소.”
“최근에 거, 뭐냐··· 이마일인가? 그걸 내가 직접 써서 보냈는디···.”
“거 참. 할배, 댁은 신문물 배우기는 늦었으니까 그냥 아들래미 쓰라니까?”
“떽! 자고로 글귀는 직접 써야 그 정성이 묻어나오는 법!”
하여, 무림 회의는 생각보다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모두가 나간 뒤 유서담은 설중연과 단둘이 남아서 시간을 가졌다.
“네 평생의 목적이라고 했으니 말리지는 않겠다. 다만, 나 또한 따라갈 터이니 무리하지는 말거라.”
“······예.”
사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과연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자신의 목적 하나 때문에 전장에 몰아넣어도 되는가.
그래서, 그는 계획을 길게 잡았다.
‘내가 강해지자.’
반신의 경지에 이른 이동준을 넘어서, 신의 경지에 이른 백색 마녀를 넘어서.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강함을 손에 움켜쥐면, 사랑하는 이들을 희생하지 않고도 목표를 스스로 달성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헬 게이트 내부의 신종족 ‘그레이 휴먼’들이 지구를 침공하며 심지어 지구의 에너지를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태는 나날이 심각해져만 갔고, 지금도 뉴스에는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가 붕괴되었느니, 희생자가 몇 명이니 하는 소식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승전보가 1개라면 패배 소식은 10개에 달했고, 헬 게이트의 움직임은 나날이 격해져 더 이상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명심하거라. 네가 다른 세상을 여행하며 얻은 것은 수명과 힘 뿐만이 아니라, 그 수많은 인연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유서담은 단호하게 그리 말했고.
“아니, 너는 명심하고 있지 않다.”
“···네?”
설중연은 고개를 저었다. 당황한 유서담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려 했지만, 고개를 살짝 돌려서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탓에 불가능했다.
“저는 제가 얻은 이 힘으로 만난 인연들을 결코 쉬이 여기지 않습니다. 헬 게이트의 공략 또한, 길드의 반대가 아니었다면 본래는 혼자서 하려고 했습니다.”
다급히 변명을 해보았지만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아니 우리가.”
고개를 들고서 간신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어쩐지 살짝 붉어진 눈시울이 걱정되었으나.
“너를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라도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녀는 먼저 자신의 할 말을 끝낸 뒤 그대로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자리에 홀로 남은 유서담은 그저 굳은 표정으로 그 자리를 우두커니 지켰다.
< 흔들리는 세계(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