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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240화 (240/251)

< 흔들리는 세계(3) >

상황은 하루 전으로 돌아간다.

어나더 리그 길드 본부, 회의실.

실질적 길드 책임자 예카테리나와 이종족 대표 라칸탈, 테일러 나인, 정령왕 등을 비롯하여 어나더 리그의 간부진들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모여있었다.

헬 게이트를 공략하겠노라 밝힌 유서담이 곧장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그들을 불러모은 유서담은 회장석에 앉아 등을 기대고서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회의를 소집한 유서담이 침묵하자 덩달아 다른 이들 모두 침묵하였다. 째깍, 째깍, 그렇게 시간은 점점 더 흘러가고 15분쯤이 지났을 때, 마침내 참지 못한 테일러가 책상을 후려쳤다.

“야! 사람 불렀으면 주둥이를 털던가!”

“그거야!”

“···뭐, 뭐?”

테일러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유서담이 눈을 번쩍 뜨자, 되려 테일러가 당황하였다.

“사실 나도 숨막혀서 죽을 뻔 했거든. 네가 분위기 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뭐 이 새끼야······?”

그렇다. 유서담은 가장 마지막으로 회의장에 도착했는데, 어째서인지 모두가 숨죽인 채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것.

이러한 분위기는 거의 겪어보지 못한 유서담이었기에 섣불리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얼탱이 없는 새끼네 이거 진짜.”

“서담님··· 그냥 말씀하셨어도 괜찮았는데.”

이제야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유서담은 살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야. 헬 게이트 공략한다고 기자들한테까지 문자 돌렸다면서?”

“허허, 무슨 좋은 수라도 있는 겐가? 참으로 기대되는군.”

“네에···. 밖은 완전 난리에요. 서담님 덕분에 직원들이 전화 받느라 고생하고 있다구요.”

헬 게이트를 공략하겠다고 유서담이 언론을 통해 밝히자, 벌써부터 세상이 시끌벅적해졌다. 어디에서는 ‘기회를 노려서 마케팅을 하려는 것이다’라고 지적하기도 했으며 ‘어나더 리그에게 희망을 걸자!’라며 일부러 띄워주는 듯한 기사를 쓰는 이들도 있었다.

세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유서담의 말을 보도하였고, 그건 어나더 리그의 입장에서는 썩 바라지 않던 일이었다.

“조용히 처리했어도 되는 거 아니야?”

“아니. 그건 안 돼.”

유서담은 고개를 젓고서 말했다.

“나는 진짜로 헬 게이트를 공략할 생각인데, 우리의 힘만으로든 부족하거든.”

“···너, 진짜 할 생각이었구나?”

“당연하지. 내가 언제 한 입으로 두 말한 적 있던가?”

“어. 너 12년 전에 콜라 사먹겠다고 돈 빌려가놓고 안 갚았잖아.”

“······.”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오백원짜리 두 개를 꺼내 테일러에게 굴리자 그녀는 시시덕거리며 그것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아무튼, 저는 정말로 헬 게이트로 들어가서 공략을 수행할 예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길드 사람들의 힘이 꼭 필요해요.”

유서담이 길드원들을 가입시킬 때, 다른 길드보다 조건을 더 좋게 주는 대신 반드시 거는 조항이 하나 있었다.

‘훗날 길드 마스터와 함께 단 한 번, 싸워줄 것.’

그는 결코 공짜로 자신이 얻어온 것들을 베풀지 않는다. 어나더 리그는 애초에 헬 게이트로 향하기 위한 초석이었으니까.

하지만··· 계약 관계가 아닌, 정으로 맺어진 인연들은 다르다.

“만약 이 싸움에 참여하기 싫다는 분이 계신다면,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기는 껄끄러울 테니 나중에 저한테 따로 말씀해주세요. 저는 결코 전장에 당신들을 강제로 이끌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 말한 뒤 유서담은 잠시 그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그 누구도 ‘아니, 그래도 나는 너를 따라가겠어!’라는 등의 분위기 타는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정말로 가고 싶지 않은 누군가마저도 억지로 가게 될수도 있으니까.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가보겠습니다. 언론을 뿌리자마자 곧바로 연락이 왔거든요.”

그는 씨익 웃으며 유엔사무총장, 알렌에게서 온 문자를 보여주었고.

다시 현재.

“허······.”

유서담은 유엔 본부에 기껏 들어와, 폭탄같은 막말을 내뱉은 채였다.

UNSC의 이사회가 가만히 참고 있을 리는 만무. 그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이보게 헌터! 지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딴 말을 지껄이는가?

-이래서 못배운 헌터들은··· 쯧.

-뭐하는가? 썩 안내쫓고.

그들이 그러든 말든, 유서담은 주머니에서 음료수 하나를 꺼냈다. 펭귄 캐릭터 펭로로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강조되고 있는 딸기주스였다.

뚜껑을 뽕! 소리가 나도록 따서 유서담이 그걸 쭉쭉 마시고 있으니, 알렌은 차라리 이 상황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의 헌터 중 한 명이나 다름없는 유서담이 이 자리까지 와서 저들에게 빌빌 기었다면, 헌터를 자신들의 장기말 정도로 생각하는 그 자부심과 콧대가 더욱 치솟았을 터.

아예 이참에, 저 콧대를 단단히 뭉개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내심 들어서 알렌은 슬쩍 뒤로 물러났다.

이사회는 유서담의 행동을 계속 지적해대며 분개했고,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슬슬 무언가 폭발할 것 같은 징조가 보일 무렵.

-그만들 하지.

여태껏 조용히 있던 한 사내가 입을 열자, 모두가 침묵하였다. 그제야 대화가 조금 통하겠다 싶었던 유서담은 음료수를 내려놓고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헌터 유서담.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까지 무례한일 줄은 몰랐군.

“배짱이 두둑하다고 해주시죠.”

-그래, 다 좋다. 하지만 그 배짱을 부릴만한 능력은 충분히 되는 거겠지?

“뭣도 없이 이런 데까지 허세를 왜 부립니까? 저도 그 정도 대가리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를 설득해보일 수 있겠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서담은 스마트 스크린을 품에서 꺼냈다. 거의 성인 남성의 몸통만한 크기의 기계가 얇은 에테르 슈트 안쪽에서 튀어나온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으나 지금 이 자리의 누구도 그 점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팟!

허공에 홀로그램이 떠오르며, 어떤 지형의 ‘지도’가 대략적으로 표시되어 둥실 떠다녔다.

피자 한 조각처럼 생긴 그 모형의 안쪽에는 불그스름한 에너지 덩어리가 번쩍이고 있었다.

“이건 헬 게이트 내부의 지도입니다. 과거 제가 탐험했던 지형의 일부를 그대로 복원했죠.”

-마, 말도 안 돼! 당시의 데이터는 거의 다 소실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저도 그래서 제 정신 속으로 직접 들어가, 지도를 제작했습니다. 그 정도는 뭐 놀랍지도 않잖아요?”

실제로 저 헬 게이트의 지도는 진짜가 맞았다. 유서담은 거기에 더불어 또다른 조각을 합쳐서, 완벽한 헬 게이트의 형태를 만들었는데 나머지 부분은 거의 공백으로서 미완성이었다.

그러나 그 미완성된 부분에는 단절된 부분이 있었는데, 유서담은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계란에 흰자와 노른자가 있고 지구에 내핵과 맨틀이 있다면, 헬 게이트에도 ‘층’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제가 참여했던 마지막 원정대는 두 번째 층을 돌파한 뒤, 세 번째 층을 코앞에 두고서 퇴각했죠.”

유서담이 헬 게이트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늘어놓자, 이제는 그 누구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불만 가득한 표정이면서도 애써 그것을 숨기고서 경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전에는 저 ‘층’을 통과하기 위해 수많은 헌터들의 희생을 업고서 전진해야만 했습니다. 어제는 북쪽이던 곳이 오늘은 서쪽이고, 위와 아래가 구분되지 않는 저 공간을 그냥 돌파하는 것도 어려운데 층까지 있으니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죠.”

이 역시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거짓말이 섞일 예정이었다. 여태까지 쌓아놓은 ‘유서담’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그런 거짓말.

“······이번에 제가 꾸린 원정대는, 굳이 저 복잡하고 위험한 길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차원을 관통할 수 있는 제 초능력을 이용해, 헬 게이트의 차원 단층을 뚫고서 그대로 전진할 것입니다.”

-단층을 뚫는다니······ 그게 정말로 가능하단 말인가?

물론, 불가능하다.

“물론, 가능합니다.”

애초에 레이나 주와의 연결이 끊어진 이상 더 이상 차원 이동의 능력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차원 이동을 하도 했던 덕분에 차원파장 정도를 느낄 수는 있다지만,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이 하려는 미친짓을 저들에게 설명하여 납득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과연 그 누가 주인공과 개연성의 존재를 이해해주겠냔 말이지.’

어나더 리그 내부에도 주인공에 대해 아는 사람은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이 사실은 밝히기가 쉽지 않다.

그 어떤 말을 해도 믿어줄 정도로 유대감이 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는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하다.

하지만 그는 주인공에 대해 아는 이들에게도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있는 이사회에게 설명한 것과 똑같은 계획을 어나더 리그의 회의실에서도 늘어놓은 것이다.

‘···어차피 헬 게이트 내부에서의 주인공화가 목적이야. 나만 감당하면 돼.’

과거, 헬 게이트 원정대는 차원단층을 두 겹이나 뚫고 들어가서, 세 번째 벽을 뚫을 수 없었다.

그때의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성도 없고 지능도 없는 괴수들이 득시글했던 첫 번째 층. 그곳을넘어서, 두 번째 층으로 도달한 순간 마주한 ‘함정’을.

그곳의 괴수들은 최소한의 지능을 갖추고 있었다. 마치 사회를 꾸린 것처럼 강력한 우두머리에게는 다른 괴수가 덤비지 않았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또한, 아주 영리한 부류는 함정을 파놓고 먹이를 사냥하기까지 하였는데 하필이면 그곳에 헬 게이트 원정대가 걸려버린 것이다.

옆으로 보면 원숭이, 뒤로 보면 고릴라, 아래로 보면 공룡, 위로 보면 두꺼비처럼 보이는 그 기묘한 형상의 괴수는 깔끔하게 닦인 ‘도로’를 형성하여 인간들을 걷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도망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들어왔을 때.

그대로 혀를 말아서, 자신의 위장으로 꿀꺽 삼켜버렸다.

허무하리만치 원정대 절반을 잃었을 때의 그 끔찍한 기억.

‘첫 번째 층은 헬 게이트의 껍데기일 뿐, 진짜가 아니야.’

진짜 헬 게이트는 두 번째 층부터 펼쳐진다. 그리고, 유서담은 그 두 번째 층으로 동료들을 데리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 겹의 차원 단층을 뚫고 들어가, 헬 게이트의 핵을 부순다. 그런 계획이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해력이 아주 빠르시군요.”

이사회는 침묵하였다. 그러다 이내, 노파가 적막을 깨고 질문을 던졌다.

-그럼, 우리 유엔의 병력을 이끌고 헬 게이트 내부로 들어갈 생각이더냐?

“아닙니다.”

애초에 저들은 믿을 수 없다. 쓸데없는 병력이 헬 게이트 내부에서 얼마나 쓸모없는지, 아니 애초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잘 알고있는 유서담이기에 정말로 최정예라고 생각하는 인원이 아닌 이상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은, 전 세계 모든 헌터들의 구심점이 되어주셔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헬 게이트 내부로 원정대가 진입하는 그 순간 내부에 존재하던 괴수들이 외부로 튀어나옵니다.”

여태 꽤 많은 헬 게이트 원정이 시도되었기에, 그건 저들도 익히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이번에는 그 규모가 차원을 달리할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헬 게이트 내부에서는 ‘그레이 휴먼’이라 불리는 이종족들이 침략을 계속 해오고 있고, 헬 게이트는 지구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는 마당에······ 저희가 그곳으로 쳐들어가면, 과연 가만히 있을까요?”

즉, 유엔의 역할은 곧 ‘뒷처리’가 되겠다.

어나더 리그가 메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들어가면, 밖에 남아서 잡몹들이나 잡으라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유엔 입장에서는 썩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유서담이 실제로 헬 게이트를 클리어하면 결국 유엔은 또다시 세계 평화에 일조하였다며 떵떵거릴 수 있는 데다가, 심지어 내부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면 굉장히 안전할 테니까.

자신들의 병력에 큰 손해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사회가 긍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나 또한, 찬성하겠다. 자네를 믿고 맡겨보도록 하지.

그렇게 헬 게이트로 진입하기 위한 밑그림은 어느 정도 그려졌다.

이제 남은 건, 하나 뿐이다.

[스킬 및 재능을 흡수하시겠습니까?]

[경고! 너무 강력한 개연성을 품고 있습니다!]

스킬 흡수창과 함께 둥실 떠있는, 언젠가 레이나 주가 몰래 남겨두었을 메시지.

그녀는 자신이 사라진 이후에, 혹시 유서담이 엇나갈까봐 수많은 경고 메시지를 녹음하여 남겨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저런 녹음 메시지 따위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직접 만나서, 두 눈을 마주하여, 그 입술로, 똑똑히 말을 전해 들을 것이다.

< 흔들리는 세계(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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