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238화 (238/251)

< 흔들리는 세계(1) >

709년 9월 2일.

아라셀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세상이 뒤바뀌어 있었다.

사고(思考)와 존재의 합치가 곧 마법으로 귀결되며, 천(天)과 지(地)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진리를 마법학적인 관점으로 설명하는 세계.

비비안타 제국.

과학과 기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 세상으로, 아라셀리는 되돌아와 있었다.

“일어났나.”

“아······.”

새하얀 벽지로 심플하게 도배된 벽지, 그곳에 반사되어 부서지는 햇살을 등지고서 사하르 공녀가 책을 읽고 있었다. 비비안타의 역사책이었다.

아라셀리는 천천히 이불을 걷어내어,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깔끔한 디자인의 슬리퍼가 그녀의 발을 감싸 안았다.

“인근의 병원이다. 마법으로 시스템이 굴러가고 있으니 걱정은 안 해도 좋다.”

“···원래대로 돌아왔군요.”

조심스레 발을 움직여 창가로 다가가, 세상을 바라본다. 하늘의 절반을 뒤덮고 있던 스텔라 호라이즌도 없었고, 구름과 대지를 비명지르게 만들었던 비행기와 드론의 존재도 깔끔하게 소멸되어 있었다.

회색빛 하나로 통일되어있던 기계들의 도시는 사라지고, 오색빛깔로 아름다운 마법사들의 탑이 시야 한가득 솟아있었다.

거리에는 꿈 많은 마법사 아이들이 빗자루를 타고 뛰놀았고, 건물 옥상에는 양탄자를 타고서 여유를 즐기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그래. 699년 12월 31일, 아라셀리 라인칼의 후계자라 불리는 대마법사 엘레임에 의해 과학 혁명군 수장 파르텔 리안이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10년 전의 일이지.”

“······그 엘레임이라는 마법사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건··· 모르겠군.”

사하르 공녀는 책을 탁! 덮었다.

“그날 이후,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어. 이전대의 영웅, 아라셀리 라인칼이 그랬던 것처럼. 죽었을 수도,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군요······.”

자신의 후계자라니. 뭔가, 상상만 해도 어색하고 낯간지러워서 아라셀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마법 사회가 풀어야 할 많은 숙제를 해결해놓고서 떠났다. 애초에 마법의 빈부격차에서 시작된 과학 혁명을 근본부터 뿌리 뽑기 위해, 누구든 자신의 마법을 배울 수 있도록 사회에 공유했다고 하더군. 가문의 비전 마법 따위는 대마법사 아라셀리와 엘레임의 마법에 비해, 한낮 종잇조각에 불과해서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폭풍이 불었다지.”

엘레임이 자신의 모든 마법을 사회에 풀어놓은 직후, 사회가 물갈이되었다고 한다.

가문의 힘으로, 그저 정치를 잘해서 높은 자리를 꿰차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갈려 나갔으며 평민 출신 대마법사 엘레임을 시작으로 실력이 있다면 누구든 등용하겠다는 비비안타 마법협회의 뜻이 펼쳐지면서 귀족이라는 개념이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는 누구라도 마법을 배우고 사용할 수 있고, 누구라도 노력만 한다면 스스로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제 후계자라는 분, 한번 뵙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하지만, 혹시 모르지 않겠는가? 언젠가 만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리 말하던 아라셀리는 퍼뜩, 유서담이 떠올랐다.

“······교수님은요? 교수님은, 현재의 시간대로 무사 귀환하셨나요?”

그러자 책장을 넘기던 사하르 공녀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역사책을 덮더니,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세계선이 바뀐 직후, 그 존재감이 돌연 사라져버렸지. 그건 네가 더 잘 느낄 수 있지 않던가?”

“······.”

그 말대로였다. 언제 어디서든, 유서담이 같은 차원에 있다면 비록 시간대가 다르더라도 그의 존재를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유서담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멀어져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신 것 같아요.”

“무사히 귀환했다면, 그리고 아직 살아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안심이다.”

“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라셀리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주 조금씩이지만 유서담의 존재감이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체······.’

난생처음 느껴보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아라셀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

지구, 태평양 한복판.

거대한 인공 섬 위에 지어진 구조물 ‘세계 헬 게이트 연구소’.

그저 헬 게이트를 관측하고 연구하는 이곳이에는 매년 투자되는 예산만 수백억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정부도, 단체도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헬 게이트가 폭주하기 시작하면 그날이 정말 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헬 게이트는 과연 던전인가? 게이트인가? 그도 아니면 혹은 또다른 비관측 자연 현상인가?

아직 ‘차원’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진 실마리조차 없었으므로, 이에 대한 연구가 끝나려면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예상이 있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기다렸다. 자신들의 차원에 발생하는 이상현상을 모두 정복하고, 마침내 헬 게이트의 정체를 모두 밝혀내는 그날을.

그러나, 헬 게이트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부산에서 전해드립니다. 난데없이 부산시 상공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이종족의 습격에 의해, 부산 타워가 무너지며 S랭크 헌터 김광욱 및 17인의 영웅들이 사망하였······.

-미 텍사스주에서 발생한 이상현상에 의해 민간인 139명이 실종되었습니다. 미국 이상현상 연구소의 말을 따르면, 해당 현상은 ‘헬 게이트’와 연관이 있다며······.

-이면 세계 현상을 무림맹에서 또다시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많아지는 와중······.

-국제 이상현상 협회에서는 ‘가능한한 빠른 시일 내에 해당 이상현상에 대해 밝혀내겠다’라고 공식 입장을 발표했으나······.

세계 곳곳에서 알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인 던전 및 게이트, 균열 현상과는 전혀 다른 이 이상현상은 피해 지역이 말끔하게 소멸된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시체조차 남지 않고 깔끔하게 사라져버리는 이 기묘한 이상현상조차 두려운데, 심지어 지구 곳곳에서 SS랭크 이상의 능력치를 지닌 이종족들이 온갖 장소에서 테러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해당 이종족이 ‘헬 게이트’에서 찾아온 것으로 밝혀져,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어나더 리그 길드 소속 이종족 닥터 라칸탈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인간의 상위종으로서 아직까지는 약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통칭 ‘그레이 휴먼’을 발견하는 즉시 신고를 해주시기 바라며······.

그레이 휴먼.

헬 게이트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유사인간들을 칭하는 명칭이었다. 각각의 개체가 SS랭크 수준의 능력치를 지니고 있어서 아직까지는 살해에 성공한 사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구상에 마흔 명도 존재하지 않는 SS랭크의 초능력자 중 일부 헌터가 패배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며 온 지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아직까지는 그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으며, 헌터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인 덕분에 큰 피해는 없었으나··· 이러한 현상이 계속된다면 이전까지의 평화는 결코 없을 것이라며 우려의 목소리가 퍼지게 되었다.

신 무림맹.

설중연은 자신을 찾아온 ‘미국연방 이상현상 안전 위원회’를 맞이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미국을 떠나지 말라는 뜻이더냐?”

“그렇습니다. 당분간은 최대한 미국의 안전 유지에 힘써주셨으면 하는군요. 물론, 그에 따른 사례는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미국의 이상현상 안전 위원회는 국제 이상현상 협회와는 차별화되는 단체였다.

오로지 미국의 안전, 그 목적 하나만을 추구하기에 지구의 다른 장소가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취지인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미국이 위험한 일이 없는지라 활동 자체가 드물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20년 전 이 단체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는 미국이 세계적으로 지탄받기도 하였다.

“······허. 어이가 없구나.”

설중연이 백금발의 머리칼을 어깨 뒤로 스륵 넘기자 위원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매혹적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두렵기도 하였다.

지구상 유일한 SSS랭크의 초인.

그녀가 만약 미국만을 위해 힘써준다면, 그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내가 누구를 위해 움직이는지는 알고있나?”

“예. 어나더 리그 길드와 밀접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 그러는가?”

위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당신들의 무공을 개편해주었고, 또한 살아갈 터전을 제공해준 것은 사실이나 본 당국에서는 그보다 더한 것들을 줄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이 사태가 무사히 지나가고 나면, 이런 아차원이 아니라 실제의 거대한 땅덩어리에 당신들 무림맹을 위한 도시를 만들어드리지요. 금전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혹시나 원하는 바가 있다면 정치적으로도 얼마든지······.”

“틀렸다.”

“······예?”

위원장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설중연과 눈을 마주치고서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빛이 아까와는 판이하게 달라져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나더 리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건, 그들이 내게 베풀어준 게 많아서가 아니다.”

“그럼, 대체······.”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설중연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저런 자들에게 굳이 터놓을만한 속마음은 아니었기에.

“앞으로도 나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것이고, 이러한 뜻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테니, 돌아가거라.”

“······알겠습니다.”

위원장이 돌아가자, 설중연은 의자에 기대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열일곱 번째다. 그녀의 힘을 자신들을 위해 사용해달라는 요구가 말이다.

중국부터 시작하여, 각종 재벌이나 거대 단체 등에서 그녀에게 어마어마한 금전 및 보상을 약속했을 정도였는데, 새삼 그러한 사실을 일깨우면 이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체감할 수 있었다.

벌써부터 인간들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헬 게이트의 무지에 의한 미지를.

헬 게이트로 인한 멸망을.

“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 건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고민도 잠시, 창문의 불이 꺼지며 모니터의 불빛이 들어오자 그녀는 시선을 그곳으로 돌렸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상현상을 비롯하여, 그레이 휴먼의 등장까지 모두 그녀의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브리핑이 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설중연은 검을 챙겨들었다. 한 번 지키기로 마음 먹었으니, 그녀는 끝까지 그 맹세를 어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온전히 세상을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다.’

다만, 사랑하는 이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뿐.

*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빛을 주특기로 다루는 블레스타쉬 가문의 가주 알렉산드르 블레스타쉬는 개인적인 용무로 테일러 블레스타샤······ 아니, 테일러 나인을 불러들였다.

평소라면 결코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을 테일러였으나, 친필로 정성스레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돌아오거라’라는 말이 적혀있는데 어떻게 가지 않겠는가?

그간 악연이 그토록이나 짙었다지만, 결국 테일러도 가슴으로 감정으로 움직이는 생물이었다.

“뭔데요.”

···툭툭 내뱉는 말투에서는 그런 게 전혀 티가 나지 않았지만.

“테일러. 너도 최근 발생하고 있는 기현상에 대해 잘 알 거다. 심지어 어나더 리그 소속이니, 우리보다 더 많은 정보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군.”

“뭐, 그렇죠.”

영화 ‘레옹3’ 여주인공의 헤어스타일을 따라한 똑단발을 배배 꼬며 테일러는 적당히 답했다.

그나마 그녀가 적당히 답하는 이유도, 초대된 장소가 저택이 아닌 도심지의 레스토랑이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으면 그대로 비행기 타고 복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렉산드르 블레스타쉬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알다시피,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더 이상 마음대로 활동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위험해. 가문으로 돌아오거라. 네 능력을 보이지 않아도 좋아. 그냥 놀고 먹기만 해도 좋다. 그저 조용히, 집안에서 우리 가문의 기사들에게 보호를 받거라.”

“허, 참.”

테일러가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지만 알렉산드르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래, 어나더 리그. 굉장한 길드야.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길드가 되었으니 말이야. 하나, 역시 그곳보다는 우리 가문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된다. 테일러 블레스타샤. 부탁이니,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겠나?”

“······.”

알렉산드르가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부탁하는 경우는 또 처음 본다. 하지만 테일러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됐네요. 그렇게 내가 걱정되면 가문 전체를 이끌고 어나더 리그 아래로 들어오시지 그럽니까?”

“그건······.”

“당연히 안 되는 거 알고 한 소립니다.”

애당초 대화 자체가 설립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도, 테일러도, 처음부터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했다.

“···그래, 네 뜻이 그러하다면 그곳에 남아있도록 하거라.”

알렉산드르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나가듯 말했다.

“다 좋으니······ 그저, 이 애비가 네 안전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리 말한 뒤 블레스타쉬 가문의 가주는 순식간에 떠나버렸고, 허망하게 남은 테일러만이 포크로 스테이크를 깨작거렸다.

“······다 먹지도 않고 가버렸네.”

테일러는 그리 툴툴거리면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예전부터 그녀는 혼자 밥 먹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으니까.

레스토랑을 나온 테일러는 코트를 여며 입김을 후 내뱉었다. 딱히 날씨가 추운 건 아니었으나, 어쩐지 쓸쓸했다.

위이이잉!!!

하늘을 가르며 지나가는 전투기 편대. 또다시 어딘가에서 이상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저 독불장군 아버지가 아버지의 정을 운운하며 자신을 불러들일 정도로, 지금의 지구는 평화롭지 않다.

거리는 한산했고, 집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게나 쇼핑 매장의 식품은 진작 털린 지 오래. 인터넷에는 방공호 짓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설치는 것들이 점점 늘어났으며,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폐쇄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테일러는 어나더 리그에 남아있을 것이다.

“이 개자식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서는 아직도 안 오는 건지······.”

가장 믿음직스럽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마음을 두고 있는 누군가가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띠링!

거리를 걷는 와중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발신인 - 유서담]

발신인을 확인한 테일러는 표정이 금세 환해졌고, 내용을 확인하고서는 안색이 서서히 굳어졌다.

“이 새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흔들리는 세계(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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