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237화 (237/251)

< 709년 9월 1일(버려진 세계) >

[609년 3월 28일]

안드로이드 부대는 마침내 라인칼 리가투마의 굳건한 결계를 뚫어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지금껏 그 어떤 마법사도 성공하지 못한 것을 100년 뒤 미래의 과학으로는 아주 손쉽게 뚫려버린 것이다.

그때 안드로이드의 숫자가 장장 300에 달하였고 싸움이 일어나면 정말로 순식간에 나와 엘레임 둘 모두 위험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세계선의 변화를 감지합니다.]

안드로이드가 하나씩 허공에서 소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꿰뚫고 찢었던 구름과 결계들은 어느 순간 다시 보니 수복되어 있었고, 요란하게 굉음을 울려대며 쏘아대던 미사일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어······?”

엘레임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서 하늘을 올려보았다. 나는 그제야 편안히 검과 총을 늘어뜨리고서 말하였다.

“다 끝났어, 엘레임.”

세상이 점점 하얗게 물들어갔다. 이전에도 경험해보았기에 익숙했다. 아마도 내가 이 시간대에 있을 이유가 완전히 사라졌기에, 원래의 시간대인 709년으로 자동 전송되는 것이리라.

“이제 너는 안전해.”

“그, 그러면······.”

황망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엘레임은, 천천히 물었다.

“돌아가시는···건가요······?”

“가야지. 내 할 일은 끝났으니까.”

그녀는 무어라 더 말하려고 했으나, 내가 먼저 말을 끊었다. 이 이상 그녀가 미련을 갖게 하는 것도 옳지 않았다.

“엘레임. 저 뒤를 봐.”

내 손을 따라 돌아본 엘레임은 휘황찬란하게 우뚝 솟아있는 라인칼 리가투마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것들이잖아.”

한때 비비안타 아카데미였으며 현재는 아라셀리의 유산이라 불리는 이 세상 유일무이의 장소. 마법사들에게는 그야말로 꿈과도 같은 장소에서, 과연 호기심 많은 마법사 소녀가 학구열을 참을 수 있을까.

아마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나가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를 위해서라도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자, 잠깐만요······. 저는, 아니, 저같은 게 마법을 배울 수 있을지가······.”

“당연히 배울 수 있지. 미래에서 왔다고 했잖아? 미래의 너는 대마법사야. 내 말 아직도 못믿고 있는 건 아니지?”

“아뇨··· 믿고는 있는데······.”

머뭇거리며 어떤 단어를 우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미래에서 오신 게, 확실한 거죠?”

“일단은··· 그렇지?”

“네. 알겠어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때까지 열심히 공부할게요!”

그때까지? 그 말에 대해 되묻기도 전에, 순식간에 세계가 흐릿해졌다.

[현재의 시간대로 되돌아옵니다.]

[······699년 12월 31일, 개연성을 완전히 잃은 주인공 ‘과학자 파르텔 리안’이 조연 ‘대마법사 엘레임’에게 패배하였습니다.]

[역사가 뒤바뀝니다.]

[400(+120)레벨의 주인공 사냥에 성공하여, 레벨이 15단계 상승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개연성의 대부분을 흡수한 주인공을 사냥하여 추가로 레벨이 3단계 상승합니다.]

[시공간을 오가며 운명적 사냥 확률이 극히 희박한 주인공을 사냥하여 추가 레벨이 2단계 상승합니다.]

[수명이 4000일 지급됩니다.]

허공에 무수히 떠오르는 메시지. 과연, 미래의 파르텔 리안은 과학의 힘으로 SSS랭크를 웃도는 힘을 보유하게 된 모양이었다. 거기에 심지어 전함이라던지 기계 병력을 생산했으니, 오죽 강했겠는가.

그나저나, 거의 달마지존보다 살짝 아래 수준의 주인공을 사냥했는데 이번에도 스킬의 분배를 조금 미뤄야 하나?

그런 생각에 의뢰인을 부르려는 순간.

[···지직! 전송 과정에서 사소한 오류가 발샗!덕럾ㅌ]

[709년 9월 1일(버려짐)]

화아악!!

오류 메시지가 뜨더니, 불길한 공기가 나의 안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

오류?

여태껏 오류 메시지는 무수히 보아왔지만, 대부분 주인공과 관련되어있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전송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했다니······. 이건 대체 뭐야?

정신을 차리고서 황급히 주위를 살펴보기 위해 나는 가장 가까운 언덕을 올랐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전송된 직후를 제외하고서는 어째서인지 바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이 세계의 이질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늘의 구름, 바람에 휘날리던 풀잎과 나뭇잎, 하류를 향해 흐르던 강물과 튀는 물방울.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전부 멈춰있었다.

“무슨······ 야, 의뢰인.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대답이 없다.

“의뢰인?”

지금껏 대답이 없던 적은 가끔씩 있었지만,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상황에 답이 없다니. 미칠 노릇이다.

거기에 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하나 더 느낄 수 있었다.

‘······생명체가 하나도 없어.’

그 사소한 벌레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떼조차 없다. 고요로 물들어버린 공간. 그 소름끼치고 오싹한 감각은, 나를 공포로 몰아넣게 만들었다.

-진정해···.

“······그래. 너라도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다.”

바람조차 불지 않아서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적막 속에서 화분의 느긋한 목소리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내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저쪽···느낌이 이상해···.

“저쪽이라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일단은 화분의 예리한 감각이라도 믿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나는 한참을 걸었다.

산을 넘고, 도시를 지나고, 강을 건넜다.

산에는 그 흔한 토끼조차 없었고, 수백만의 유동 인구가 있을 법했던 대도시조차 아무도 없었다. 해가 지지 않아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알 수 없었고, 시스템의 시간 표기조차 (버려짐)으로 멈춰버린 탓에 나는 오로지 감에 시간을 스스로 세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어느 거대한 계곡. 계곡이라기에는 완전히 말라 비틀어져, 차라리 협곡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그 장소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있었다.

“어······?”

무언가에 직격당한 것처럼 보이는 장소였다.

어떤 건물이 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그 건물의 원형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듯하다.

그 중심에 있는 무언가가, 나를 이끌었기 때문에.

“······헬 게이트.”

그곳은 헬 게이트와 너무나도 흡사한 공간이었다. 일전에 아라셀리가 ‘709년에 헬 게이트가 나타났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그건 분명히 과학에 점령당한 미래일 것이다.

즉, 이제는 없어진 역사라는 건데······.

‘대체 왜 헬 게이트가 아직도···?’

모든 게 멈춰버린 세상 속에서도 헬 게이트는 그 특유의 꾸물거리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이제 보니 헬 게이트의 표면에 사람의 형체를 가진 무언가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서 그것들의 머리 위를 확인해보니.

『후 떃껬 뿖1』

#궥켃0렖 #돷깙뵸 #뚫깋

『릉귗 뿋?긚흐깋』

#걁1뾠 #슗닦 #힇힇힇

···주인공 해시 태그로 보이는 메시지가 선명히 나타났다.

일전에도 저런 것들을 본 적이 있다. 헬 게이트에서 찾아왔다는 정체불명의 여인. 저놈들은, 그 여자와 비슷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검을 뽑아들고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으나, 그들은 나를 힐끔 쳐다보고서도 별다른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바닥을 쥐어뜯거나 이어 붙이는 등의 제할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저번에는 죽일 것처럼 그러더니, 이번에는 왜 안 그러는데?

“······너희들, 정체가 뭐야?”

여기서 더 최악이 될 것도 없다. 막무가내로 질문을 던지자, 그놈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어마어마한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자, 놈들이 갑작스레 동시에 살기를 뿜어대기 시작하였다.

방금까지 보였던 그 호의가, 사실은 적의였다는 것처럼.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불가능하다. 애초에 힘으로 상대할 수 있는 적들이 아니다. 저들 역시도 압도적인 개연성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나와 비슷하거나 혹은 이상이었다.

‘그런 놈들이 수십이라니······.’

입술을 꽉 깨물고서 에테르 블레이드를 사출하려는 순간, 우뚝! 놈들의 움직임이 돌연 멈추었다.

그러더니, 일제히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저벅!

공기가 울리지 않아, 그 어떤 소리가 전달되지 않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울리는 구두소리.

헬 게이트의 중심부가 갈라지며,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리고, 그와 마주한 나는.

“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 참··· 여기는 뭣하러 온 거지? 버려진 곳이 그렇게도 궁금했나?”

비록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헤어 스타일도 달랐고, 나는 일평생 입어본적도 없는 갈색의 양복을 걸치고 있었지만.

틀림없다.

저건, 나였다.

단순히 비슷하게 생긴 정도가 아니다. 말투, 표정, 그 행동조차 완전히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음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어떻게······?’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오면서 느긋하게 손짓했다. 그러자 ‘주인공’들은 우리의 상황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금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음? 뭘 그리 어벙하게 쳐다보나? 흐음··· 그렇지. 우리 초면이던가? 초면에는 어떻게 인사를 하지? 만나서 반갑다? 예전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니지, 아니야. 더 좋은 인사가 있었을 텐데······.”

그러더니, 그는 꽤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나를 소개해야 되는 타이밍이지? 만나서 반갑다. 나는 유서담이라고 한다. 이름은 익히 들어봐서 알고 있겠지?”

“······!”

“좋은데. 내가 알고 있는 인사법을 모두 써먹을 수 있어서. 이거 아주 뿌듯한 일이로군.”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뭐냐니. 유서담이라고 했잖아?”

그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그곳에 위치할만한 메시지는 단 하나.

주인공 해시 태그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주인공 해시 태그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시야의 사각에 있는 것처럼 보려하면 할수록 자꾸만 도망치는 것이다.

“그나저나, 아주 화려하게 망쳐놨어. 예정대로 여기를 흡수했어야 ‘완성된 세계’를 만들 수 있는데··· 너는 뭘 그리도 이런 이야기에 집착하는 거지? 이해가 가질 않는군.”

“뭐?”

“아니야. 뭐, 상관없다. 음, 그래. 상관없지. 무려 완성된 세계의 거대한 존재가 여기에 발자취까지 남겨줬으니 말이야. 덕분에 아주 큰 힘이 되었어. 손해는 면했으니까, 나도 너그럽게 넘어가도록 하지.”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러자, 유서담이 나에게 말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그러고 있어? 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거지? 평소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아, 참. 그렇지. 지금은 ‘의뢰인’을 내가 굴리고 있어서 못하는구나? 미안하군. 사죄하지.”

그는 장난스레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네 의뢰인은 조금 바빠져서 ‘의뢰’는 더 이상 받을 수 없을 거다. 내가 부탁한 업무가 여간 많아야 말이지. 그런 이유로, 앞으로는 의뢰가 없을 거야. 원래 의뢰 관계에 감정을 담는 건 네 철학이 아니잖아?”

그렇다. 그건 틀림없는 내 철학이다. 그런데, 그걸 왜, 저놈이 알고 있느냔 말이다.

“의뢰인은······ 그 여자는 어떻게 된 거야?”

“음? 새삼 미련이라도 생겼나? 어허, 거래 관계에 그러면 쓰나. 이렇게 끝내는 게 가장 깔끔하지.”

그런 이유로.

“네가 진심으로 ‘레이나 주’를 생각하고 있다면, 이 이상 의뢰인을 찾지마. 그게 너에게도, 그녀에게도 좋을 테니까.”

“뭐······?”

“왜 그래? 너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던 거 아니었어?”

그 순간, 여태까지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기억과 추억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로 나는 아예 모르고 있었을까?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걸까?

아주 예전, 성좌들의 세계에서 막 귀환하였을 때.

나는 의뢰인의 모습을 정말로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눈부신 존재감을 가지고 있어, 감히 두 눈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나······ 나는 그녀에게서 어떠한 익숙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쭉, 항상 의문을 품으며 살아가고는 있었다.

이 ‘주인공 살해’라는 의뢰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을 정도로 나에게 너무나도 유리한 것이었기에.

왜 나에게 이런 기회를 주었을까.

왜 나에게 이런 힘을 주었을까.

왜, 그녀는 내가 행복하기를 바랐을까.

정답은, 단 하나밖에 없지 않았던가?

“정말로······ 의뢰인이······?”

뒤늦게 망연자실하여 바닥에 무릎을 꿇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흐음, 원래는 이런 거 말해주면 큰일 나는데. 뭐, 계획이 어긋난 덕분에 일이 빨리 해결돼서 이제는 상관없어졌어. 그런 이유로, 이번에는 내가 집으로 돌려 보내주도록 할게. 원래는 이런 서비스 없는데 너는 나한테 아주 중요하니까 특별히 해주는 거다?”

[목표를 달성하여, 원래의 세계로 귀환하겠다.]

머릿속에 울리는 무뚝뚝한 남자의 목소리. 그건 여태 들어왔던 의뢰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지독하리만치 선명한, 나의 목소리였다.

서서히 차원 이동의 전조가 발생하자, 유서담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여태 자신은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미소였기에 나는 끔찍한 괴리감에 휩싸였다.

“여태까지 고생했다. 나를 위해 참으로 애써주었어. 하지만 이제 때가 되었다. 네가 말했잖아. 누구라도 주인공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나갈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그러기 위해 너는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잖아?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네 역할에 충실하도록 해.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 말이 끝난 직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지구에 도착해 있었다.

“어······.”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방금 겪은 일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랬다.

“···의뢰인?”

그녀를 불러본다.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의 힘이 되어주었고, 나의 조력자가 되어주었으며, 정신적으로 힘들 때 항상 고민을 들어주었던 그 무뚝뚝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가.

“레이나······?”

들려오지 않았다.

< 709년 9월 1일(버려진 세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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