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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235화 (235/251)

< 609년 3월 28일(아테리얼 비행정 12호) >

꿈을 꾸었다.

웬 갑옷 괴인이 나타나 아버지를 상처입히고, 자신마저도 죽이려고 하는······ 그런 이상한 꿈.

참으로 묘하고 이상한 꿈이었다. 묘하게 현실감 있었고, 당시의 고통이 선명하게 느껴졌으며, 자신을 구해주려던 사내의 목소리와 얼굴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으음······.”

부스스, 눈을 뜨려던 엘레임은 관자놀이가 찡하게 울리자 눈살을 힘껏 찌푸렸다.

“그래갖고 얼굴 구겨지겠냐.”

“······헉!”

웬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자, 엘레임은 화들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사내가 가만히 앉아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타닥, 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서 바닥에 누워있던 엘레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찌르르 울리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자 유서담은 아그작아그작 씹고있던 호두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호두 먹을래? 뇌를 닮아서 머리에 좋아.”

“······호두가 머리에 좋은 이유는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한 덕분에 뇌의 활동을 촉진시키기 때문이에요. 뇌를 닮아서가 아니라구요.”

“그러냐? 어쨌든 머리에 좋은 건 맞잖아.”

“두통에는 별로 무의미할 걸요···.”

그러면서도 엘레임은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유서담의 호두 봉투를 받아들었다. 배고프다며 배가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아그작! 호두 하나를 씹으며 엘레임은 조심스레 물었다.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됐죠?”

“허.”

유서담은 다리를 꼰 채 감탄사를 내뱉었다.

“내가 누군지, 여긴 어딘지, 너를 습격했던 괴한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한 것도 참 많을 텐데, 깨어나자마자 묻는다는 게 아버지의 행방이냐?”

“······.”

엘레임은 대답하지 않은 채 유서담을 뚫어져라 노려보았고, 그는 헛웃음을 치며 답했다.

“아버지는 무사하시다.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야. 내가 급한 대로 치료를 해줬거든.”

스킬 [신성력 변환]이 이럴 때 쓸모가 있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

“그럼······.”

“질문할 것 같아서 미리 답하는데, 여기는 네 집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숲이야. 너를 습격한 괴인은 미래 세계에서 찾아왔으며, 나는 널 지키기 위해 그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거슬러서 찾아온 거야. 어때, 질문 더 있나?”

“자, 잠깐만요! 그게 다 무슨 소린지······.”

“여기는 네 집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숲이야. 너를 습격한 괴인은 미래 세계에서-”

“같은 말은 됐어요! 그냥, 좀, 이해가 안 가서··· 그래서 그래요···.”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유서담은 입을 다물고서 땅콩 봉투를 꺼냈다. 사실 죄다 엘레임의 오두막에서 가져온 것이었지만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한 듯싶다.

“······방금, 미래에서 찾아왔다고 하셨죠?”

“그렇지.”

으적! 땅콩을 씹으며 유서담이 답하자 엘레임은 그의 눈을 마주하였다.

“솔직히, 완전히 당신의 말을 믿기는 힘들어요. 하지만······ 책에서조차 본 적 없는 괴한이 저를 습격했고, 당신이 저를 구해주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이에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음. 상황 파악 능력이 빠르네. 인성도 좋고.”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유서담을 향해 조심스레 묻는다.

“······그 괴한은, 처리하셨나요?”

“머리통을 깨버렸지.”

“그럼, 저는 이제 돌아가도 되지 않나요? 어서 아버지에게 가보고 싶어요.”

“그건 안 돼.”

땅콩을 한입에 털어넣은 유서담은 자리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아직 너를 노리는 안드로이드 부대가 많아. 그래서 도망쳐온 거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계속 도망쳐야 해.”

“···언제까지요?”

“미래의 일이 해결될 때까지. 그게 언제가 될지는 나도 잘 몰라. 그냥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거든.”

“······.”

아직도 그 ‘미래’라는 단어가 크게 와닿지 않았기에, 엘레임은 침묵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빨리 누워서 잠이나 더 자. 내일은 바빠질 테니까.”

“네······.”

어쩐지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지 못한 채, 엘레임은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가 눈을 감았다.

*

[609년 3월 28일]

다음날 새벽. 해가 뜨기 직전 일찍부터 기상한 유서담은 엘레임을 깨워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동 수단으로는 마력으로 움직이는 마차(魔車)를 훔쳐서 사용하였다. 드넓은 황야를 달리고 또 달리다보니, 어느덧 빌딩과 타워가 우뚝 솟아있는 도시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테리얼 시티.

드높은 절벽 위에 지어진 도시로서, 거대한 비행정 정류장이 존재하여 수많은 도시들의 연결다리 역할을 하고있는 곳이기도 했다.

“와아······.”

아테리얼 시티에 들어선 엘레임은 입을 다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세상을 구경하였다.

건물이 저렇게 높다니! 마차가 하늘 위로 날아다닌다니! 도로는 건물 사이로 나있으며, 기묘한 마법 조각상이 둥실 떠다니며 광고판을 흔들었고, 마법의 메아리를 사용하여 장사하는 마법 상인들의 목소리가 사운드를 가득 메웠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는 서로를 전혀 방해하지 않아서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새로운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생기 넘치는 도시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을 쫓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팔리게 된다.

“도시에 와본 적은 없어?”

“···네. 원래는 아버지와 함께 도시에 가기로 했었는데······.”

“이번 일이 끝나면, 아버지와 함께 원없이 도시 구경 할 수 있을 거야.”

“하하···.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요.”

“구경하는 건 좋은데, 얼굴 가리는 거 잊지마. 적들은 네 생체 정보를 스캔할 수 있으니까.”

“넵!”

엘레임이 후드를 깊게 눌러쓰자 유서담 자신도 모자를 푹 눌러썼다.

다행스럽게도 609년도에는 인공위성이 존재하지 않아서 저들의 추적 능력이 반감된다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을 터. 유서담은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엘레임을 인도하고 싶었다.

“그런데, 도시는 왜 오신 건가요?”

“‘라인칼 리가투마’로 갈 예정이거든.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하더라.”

“라인칼 리가투마라면······.”

“들어는 봤지?”

리가투마. 고대어로 ‘유산이라는 뜻으로, 대마법사 아라셀리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 섬이 유명해진 이유는 단 하나, 이전 이름이 ‘비비안타 아카데미’였기 때문이다

한때 유서담이 교수로서 활동했던 그 마법 학교는 현재 죽고 없다. 악마의 침공에 의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대마법사 아라셀리는 그 공간을 훗날 되찾아, 다시금 하늘 높이 날려 보냈는데······.

작금에 들어서는 그 어떤 마법사도 대마법사 아라셀리의 결계를 뚫지 못해, 출입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한다.

“거긴··· 들어갈 수 없어요.”

“알아. 방범 시스템이 아주 탁월하다고 하던데.”

“그럼 어째서······.”

“나는 거기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있거든.”

믿을 수 없다.

그 누구라도 들어가는 순간, 세기의 대마법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아라셀리의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그곳에 잠들어 있을 터.

그런 곳을 들어가겠다니······.

“왜. 안 믿겨?”

“네. 솔직히요.”

“걱정마. 내가 없었어도 너는 거기를 들어갈 운명이었거든.”

“그건 또 무슨······.”

평범한 시골 소녀일 뿐이 자신이 거기를 대체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뭐랬더라. 애초부터 결계같은 건 없고, 자신과 똑같은 신념을 가진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다고 그랬는데 놀랍게도 100년이 넘도록 그런 사람이 아무도 안 나타나서 속상하다나 뭐라나.”

“꼭··· 대영웅님과 아는 사이처럼 말씀하시네요?”

“당연하지.”

그에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엘레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아무리 은인이라지만, 자신이 평생을 동경해오던 영웅이 농담거리로 전락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런 허언은··· 하지 말아주세요.”

“······흐음. 네 오두막이 온통 아라셀리 라인칼의 위인전으로 도배되어 있던데, 많이 존경하는구나?”

엘레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유서담은 피식 웃었다.

“기특하네.”

“네?”

“아무것도. 일단, 빨리 가자고. 비행정을 타야 하니까.”

“비···행정이요···?!”

“왜 소리를 질러.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죄, 죄송해요······.”

비행정. 그 단어를 듣자, 엘레임은 철없게도 두근거리기 시작한 자신의 가슴을 진정시켰다.

마치 새처럼 푸른 하늘을 활공하는 비행정. 하늘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떤 느낌일까. 시원할까? 하늘의 공기는 더 맑고 깨끗할까?

항상 타보고 싶었지만, 가난한 시골 소녀였던 그녀였기에 일찌감치 꿈을 접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비행정을 탈 수 있다니.

어쩐지 상기된 표정의 엘레임을 보며 유서담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뭘 기대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행정은 그녀가 상상하는 것만큼의 신나고 즐거운 여행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감각에는 벌써부터 수많은 안드로이드들의 감각이 잡히고 있었고, 저들 역시 이 도시 안에 엘레임이 와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서 센서를 풀가동하고 있었으니까.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서두르자.”

“네!”

유명하거나 조금 큰 비행정에는 이름이 붙어있기 마련이지만, 유서담은 이름 없는 비행정의 티켓을 끊었다.

그들이 탈 예정인 ‘12호 비행정’은 유람선처럼 아주 거대했지만, 승객이 워낙 많이 타서 복잡하고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다만 인파 속에 섞여드는 것이 최대한 들키지 않은 방법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뿌우우···!

비행정은 마치 뱃고동과도 비슷한 소리를 우렁차게 퍼뜨리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와아···.”

엘레임은 후드를 꾹 뒤집어쓴 채, 반짝이는 눈으로 갑판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개미처럼 보여요!”

“그러게.”

“집에 있는 모형 장난감 건물보다도 마탑이 작아졌어요. 와아, 진짜 대박.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서담님. 비행정은 어떻게 날아다니는 거예요?”

“부유수정이 이 배 전체를 지탱하고 있거든. 마법사들은 부유수정의 출력과 방향을 결정하여 배 전체를 컨트롤하는 거고.”

“멋있어······.”

“듣고는 있냐.”

비행정의 고도가 점차 높아지더니, 어느덧 구름 위까지 날아올랐다. 비행정의 겉면은 기압 보호막으로 보호되고 있기에 기압차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엘레임이 비행정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며 유서담도 아주 잠깐의 여유를 즐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 찰나에 난데없이 갑판이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저거 누구야?”

“마법 쇼인가?”

“갑옷······?”

비행정의 아래에서 검은색의 강철 갑주를 입은, 정체불명의 괴생명체가 등장한 것이다.

-타겟의 기운이 포착되었다.

-타겟을 찾아서 제거하라.

“미친!”

B타입 안드로이드 12체. 그것들이 비행정을 둘러싸고서 손바닥을 내밀자, 유서담은 잽싸게 엘레임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몸을 보호하였다.

지이잉, 콰아앙!!

“으아아악!!”

“꺄아악!”

안드로이드의 손에서 붉은 광선이 발사되자 그제야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서, 서, 서담님···!”

“알아. 일단 이거 입고 있어. 이미 들킨 것 같으니까.”

드넓은 도시라면 또 모를까, 비행정 내에서는 스캔할 수 있는 인간의 숫자가 한정되어있기에 정체가 금방 들통나고 말았다.

안드로이드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집중되자, 엘레임은 딸꾹질을 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단은··· 저번 것들보다는 약해. D타입인가?’

그럼에도 A랭크에서 S랭크의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퉁! 퉁!

몇몇 안드로이드가 갑판에 착지하는 그 즉시, 유서담은 그것들 중 하나에게 달려들어 손을 내뻗었다.

빠직! 심장에 오른손을 쑤셔막아 에너지 코어를 빼내자 순식간에 안드로이드 한 개체가 작동정지 상태에 빠졌다. 직후 그것을 부드럽게 던져, 바로 옆에서 달려오던 안드로이드의 가슴팍을 꿰뚫은 뒤 몸을 돌려 팔뚝을 휘두르자 또다른 안드로이드의 주먹과 충돌하였다.

끼기기긱···!! 잠깐의 힘싸움이 벌어졌으나, 버틸 수록 불리한 건 혼자서 사람까지 지켜야하는 유서담이었다.

그대로 반대쪽 손을 허공에 집어넣어 에테르 블레이드를 꺼낸 그는 검을 힘껏 휘두르려고 했으나, 옆쪽에서 튀어나온 또다른 안드로이드의 광선검에 의해 가로막혔다.

-적이 검술을 사용한다.

-검술 스캔 완료.

-강화 인간의 전투 방식에 대응한다.

“허.”

일전에 유서담은 짧은 검술을 안드로이드에게 선보였고, 단 두 합만에 한 개체를 파괴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저들은 검술을 두고 ‘미지의 기술’이라고 판단, 마법이 아닌 강화된 운동 능력으로 싸우는 적에게 대응하기 위한 대비책마저도 마련해서 찾아왔다.

이미 그의 검과 마법이 전부 파악된 상태.

‘윈체스터를 꺼낼까?’

하지만 총은 근거리에서 다수를 상대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거리가 충분하고, 윈체스터가 연발이 된다면 모를까.

어쩔 수 없이 검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아이템 <빛을 잃은 샛별>은 상대방에게 디버프를 걸어 약화하는 타입이었기에, 비생물체인 저들을 상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에테르 블레이드를 들어올린 그는 달마풍천신법을 사용하여 빠르게 기동하였다.

보법, 그건 제아무리 과학이 극한까지 발달한 저들이라도 파악할 수 없는 신묘한 기술이었다.

서걱! 또하나의 안드로이드를 베어내자, 그 자리로 레이저 가닥이 연속으로 쇄도하였다.

허공에 실드를 펼쳐 몇몇 개는 막아내고 몇몇 개는 피해내며, 바닥으로 길게 슬라이드를 한 뒤 허공으로 높이 도약! 그를 쫓기 위해 안드로이드들이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그는 허공을 한 번 더 박차서 전방으로 돌진하였다.

-적의 공격에 대응한다.

안드로이드에게 내장된 컴퓨터가 저 공격을 하나의 개체로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다섯의 안드로이드가 동시에 모여서 에너지 실드를 펼쳤다.

쩌엉!!

그의 검이 에너지 실드에 명중하였지만, 약간의 금이 갔을 뿐 관통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검끝에서 빛이 발광하더니, 마치 드릴처럼 회전하며 날카로운 얼음의 송곳이 에너지 실드를 부수고 돌진하였다.

꽈드득! 안드로이드 하나의 머리통을 찢어발기자 에너지 실드가 자연히 붕괴되었고, 나머지 안드로이드의 진형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기이잉, 쿵!!

기계팔이 주먹을 내지르고, 유서담은 그것을 허벅지로 받아내고, 또다른 기계가 머리로 박치기를 하고 레이저를 쏘면 유서담은 에테르 블레이드로 그것을 막아내거나 튕겨내었다.

엘레임은 구석에 숨어서 그 광경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겁이 나고 무서웠지만, 면식조차 없는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있는 그를 외면하고서 눈을 감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꽤 화려하지만, 잔머리를 굴려가며 싸우고 있었다.

안드로이드가 공격하는 순간, 그 공격을 다른 안드로이드에게 유도하거나 마법으로 시야를 가려 서로를 공격하게 하는 등, 상대방이 가진 이점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파직, 파지직···!

-임무, 실, 패···.

“후우······!”

마침내 마지막 안드로이드를 처리한 유서담은 간신히 숨을 돌렸다. 그는 가장 먼저 숨어있던 엘레임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무사하였다.

“엘레임. 어디 다친 데는-”

“뒤, 뒤에!”

“······!”

엘레임이 소리치자, 유서담은 황급히 뒤돌아 양팔을 X자로 교차하였다.

그러자 붉은색의 피부를 가진 안드로이드가 직선으로 날아와 그의 몸통에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쩌엉-!!

그러자, 사람에게서 발생한 충격파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동이 발생하였다.

“꺄악···!”

엘레임은 한참이나 갑판을 구르고 구르다가 또다른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으윽······!”

숨이 턱턱 막혀왔으나, 애써 몸을 일으켰다.

‘이럴 수가······!’

분명 열두 개체의 안드로이드를 모두 처리했는데, 허공이 갈라지며 30체의 안드로이드가 또다시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니던가?

심지어 그중 하나는 유독 특출나게 강력한 능력을 지녔는지, 유서담조차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붉은색 외피를 두른 기계는······ 틀림없이 B타입이라고 했던가!’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붉은 안드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최소한, 자신과 동급의 수준을 가진 안드로이드다. 만전의 상태에서 1대1을 한다면 틀림없이 죽일 수는 있겠으나, D타입과 C타입의 안드로이드 30체가 허공을 가르며 등장하여 사방을 가로막았다.

‘어떻게 이렇게 많이 온 거야?’

고작 D타입 안드로이드 한 개체를 간신히 과거로 보낼 수 있는 수준이었건만, 지난 번의 개연성 사태 이후로 점점 더 에너지가 많아지고 있었다.

‘이건······ 진짜 힘들겠는데.’

유서담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언제나 항상 이기는 싸움만을 해오지 않았다. 어쩌면, 언제나 지는 싸움을 했을 뿐인데 운이 좋게도 몇 번의 승리를 거머쥐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때, 퍼뜩 드는 생각.

‘······잠깐, 이제 슬슬 거기를 지날 때가 되지 않았나?’

그리 생각하여 비행정의 아래쪽을 확인해보자, 예상대로였다.

‘다른 방법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어.’

거기까지 생각한 유서담은, 이번에도 지는 싸움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흡!”

에테르 블레이드를 치켜들고서, 마나를 발산하기 시작하자 안드로이드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훨씬 강했기에 제대로 대처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컷 모은 마나를 모두 다리에 집중하더니 대뜸 엘레임을 향해 달려들어 껴안았다.

그러고선 묻는다.

“엘레임, 나 믿지?”

“네, 네?”

“그럴 줄 알았어.”

“자···잠깐······꺄아아악!!!”

엘레임은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유서담이 대답조차 듣지 않은 채 더욱 빠르게 질주하여, 아예 난간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거칠게 뺨을 때려왔지만, 느끼는 공포에 비하면야 아무것도 아닌 고통이었다.

‘아, 난 이렇게 가는구나.’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갈 줄 알았으면 적당히 연애도 좀 해보고 그럴걸.

그녀는 그리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엘레임, 꽃다운 18세. 오늘 죽다. 안녕 세상아.’

< 609년 3월 28일(아테리얼 비행정 12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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